요한복음 18장

‘빌리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38절)’ 

18장 전체의 key word는 진리가 무엇이냐?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장은 성령이 진리라고 얘기하고 있고 그리고 그 진리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17장에서 얘기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의 진리에 대해서는 15장에서 말씀하고 있고 18장은 진리라는 것이 세상과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진리가 친밀감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세속의 정신과 진리가 부딪치면 죽음이라고 하는 십자가가 우리한테 진리로 드러납니다. 

진리가 친밀감으로 가면 사랑이 되고 진리가 세속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면 공의가 됩니다. 십자가는 공의를 세우는 방법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합시다.’ 가 되지만 세상에서는 ‘사랑합시다.’ 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들이 진짜 있는 세상에서 그 나쁜 사람들과 우리가 진리를 통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할 때에 십자가라고 하는 삶을 통해서만이 세속의 정신을 이길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검으로 세속의 정신들과 싸워서 진리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검은 모든 사망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검은 생명입니다. 실제 검을 상징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베드로이고 하나는 유다입니다. 둘 다 세상의 검을 가지고 뭔가 해보려고 했습니다. 가롯유다는 군대를 데리고 와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고 베드로는 검을 가지고 진리를 보호하고 그 진리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무너집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무너짐은 배신이고 유다의 무너짐은 배반입니다. 배신은 연약함 때문에 하게 된 것이고 배반은 자기가 뭔가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거역하게 된 것입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은 죄성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진리는 검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칼의 노래’를 지었는데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우주의 기운을 받아서 혁명을 일으키려고 그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칼의 노래가 있습니다.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무너뜨리는 부서뜨리는 칼의 노래가 있습니다. 검이라는 것 자체가 양날의 검인데 양날의 검이 싸우기에 적합한 칼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을 죽이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검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검은 무력, 권력, 재력을 의미합니다. 무력이든 권력이든 재력이든 뭐든지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사망의 힘입니다. 미국에 가면 사탄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에게도 힘이 있기 때문에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든 유다든 배신과 배반을 통해서 진리를 이루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오히려 주님은 그 안에서 계속 말씀의 검을 사용하셨습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방패,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진리의 허리띠, 구원의 투구는 모두 방어용인데 말씀의 검은 공격용입니다. 

요한복음을 성령복음 또는 영의 복음이라고 말씀하는데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결국 요한복음은 말씀복음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1서 1절)’ 

요한이 초대교회의 영적 지도자인데 영이 실제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그 영의 실제가 우리 가운데 어떻게 working하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의 관심은 영이었습니다. 그 영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이루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원인이고 생명은 결과입니다. 생명의 씨가 말씀이고 그 생명의 씨를 통해서 생명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십자가라고 하는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제 검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은 죽음인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데 죽는 것이고 십자가의 사망인데 죽고자 하니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원리, 하나님의 모략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주님이 죽으신 성금요일입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 음부에 계십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되어있는데 원래는 ‘장사된 후에 지옥에 내려가시고’가 맞는 것입니다. 지옥이 음부입니다. 음부에 내려가신 그 죽음의 자리, 요나가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음부를 경험하는 것처럼 완전히 죽은 자리입니다. 실제로 죽음의 공간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 말씀이 사망을 거쳐서 생명으로 가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영은 천국에 가고 육신은 남는다고 표현하는데 갔다는 것도 사실은 정확한 의미는 아닙니다. 신학적으로는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기존의 교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가지 않고 중간 단계인 낙원에 임시 거처한다고 얘기합니다. 연옥을 말하는 카돌릭을 사실은 이단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는 가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 예수여 어서오시옵소서.’ 라고 신원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미 끝난 것이지만 우리 편에서 보면 사람이 죽으면 바로 천국에 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죽음을 잠잔다고 표현한 것이고 우리는 천국에 갔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음부에 가셔서 음부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주님이 음부에 가셔서도 전도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옥이라고 하는 지옥과 천국의 중간 단계에서 뭔가 이루어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후손들이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서 조상들이 천국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면죄부를 팔 때의 주장이었습니다. 아무튼 조상에 대한 것을 유보시켜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천국에 갔다는 말은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앉아계시고 어둠 가운데 주님의 빛이 들어오시면 하나님의 나라가 통치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둠 가운데서 살고 빛이 그 어둠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을 낙원에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천국에 이르렀다고 표현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꾸 가설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이것이 진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이럴 수 있다는 얘기지 여기에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적어도 성경에서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들은 어느 정도의 중간 단계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자체를 다른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뭐든지 다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죽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종교적 상징이나 거룩함을 지켜야 되는 어떤 상징으로 봅니다. 

예수의 삶 자체는 철저하게 혁명적이었는데 그 혁명이 베드로나 유다가 생각했던 그런 혁명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예수를 급진적 종교주의자로 봤고 빌라도는 민란을 일으키는 지도자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보는 객관화 된 관점들입니다. 우리한테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이 보면 유대교 이단이었습니다. 유대교 쪽에서 볼 때는 급진적으로 너무나 레디컬한 유대교인이고 빌라도 편에서 볼 때는 정치적인 사람들을 끌고 다니는 선동가의 이미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름을 쭉 빼고 ‘우리 하나님’ 이라고 하는 것은 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빼고 저것도 빼고 아주 거룩하고 좋으신 그런 하나님으로만 보면 십자가의 모든 모욕과 수치와 슬픔과 절망과 고난을 쭉 빼고 영광의 것만 보고 있으면 결론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착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되고 유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공의를 지키기 위해서 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고 유다는 칼로 쳐서 죽여야지만 공의가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철저하게 당하셨습니다. 철저하게 내어주심을 통해서만이 공의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죽음을 단순한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하는 철저한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도 다시 희망과 기대를 줄 수 있는 죽음이냐? 라고 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 우리는 맨날 죽음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리엔테이션 가서 죽고, 수학여행 가서 죽고, 안타까워하고 분노하기만 하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은 잘못된 죽음이고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 안타까운 죽음이 사회적으로 승화되거나 이러면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 모아지지 않고 그냥 안타까울 뿐입니다. 

죽음에 대한 시각을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우리도 똑같이 가롯유다나 베드로처럼 누군가를 죽여야지만 또는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거나 뭔가 이루기 위해서 죽이는 문화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모습이 죽음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 세월호에 탄 아이들이 죽었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을 다 죽여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원고 교감이 자살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문화가 있는 것입니다. ‘쟤 죽었으니까 너도 죽어야 돼’ 그것이 베드로입니다. 가롯유다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보호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다 죽여야 된다는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계속 죽이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진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을 통해서 내가 완전히 내어주는 것, 그 죽음을 통해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써먹으려고 합니다. ‘귀신이 나타나면 십자가를 보여줘야지, 내가 얼마나 거룩한 사람인지를 보여줘야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배우는 것이 진리공부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십자가가 진리입니다. 죽음이 진리인데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온전하게 완전하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것이 진정한 진리입니다. 온전하고 완전하게 내어준다는 것은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힘인 것입니다. 신입생들이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지붕이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면 집을 제대로 지을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제대로 짓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죽음을 사용해야하는데 계속 누군가를 죽여야 된다고 하는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사람이 살아서 미안해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믿어지는 믿음이 있고 말씀믿음이 있고 상급믿음이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내주하신 성령으로 인정하고 말씀을 가지고서 내재하신 성령이 나를 깨우쳐 주시고 그래서 이제는 푯대를 향해서 하나 됨의 상급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고 하나님이 보여주고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미 이것이 다 끝났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서 순종하느냐 안하느냐 입니다. ‘내가 하나님이야.’ 라고 했을 때 ‘네’ 하는 것, ‘말씀으로 성숙해져야지.’ 라고 했을 때 ‘네’ 하는 것,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거야.’ 라고 했을 때 ‘네’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아니오’가 없고 ‘네’만 있는 것입니다. 

‘네’가 믿음입니다. ‘네’하는 것이 성령충만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믿어지니까 칭의, 믿어지니까 성화, 믿어지니까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음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하기가 죽을 만큼 힘든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우리도 똑같이 죽었고 주님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똑같이 부활했다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미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미 부활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은 피동의 의미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능동적인 의미입니다. 

믿음의 수준이 다른 것처럼 그 때 그 때의 순종이 다릅니다. 오늘의 ‘네’와 내일의 ‘네’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수준의 ‘네’와 중학교수준에서의 ‘네’와 대학교수준에서의 ‘네’가 다릅니다. 스무 살 때의 ‘네’는 No를 할 수 있는 ‘네’였습니다. 그런데 초등학생의 ‘네’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스무 살 이상의 ‘네’가 더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초등학생 수준의 ‘네’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이것이 맞는 것 같은데?’ 라고 고민해야 할 수 있는 ‘네’를 더 수준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이거냐 저거냐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이고 ‘이거 해도 되는데 네 마음대로 해.’ 라고 하는 것은 수준이 높은 신앙입니다. ‘마음대로 해.’ 라고 할 때가 진짜 책임이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힘들어 합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진짜 마음대로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할 때에 진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말씀인데 말씀 자체가 십자가이고 순종하는 삶은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내가 순종하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죽음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뭔가 내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특심이 있을 때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데 하나님의 부재가 있습니다. 이 부재 안에서도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특심으로 인한 은혜는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부재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말씀으로 아는 것입니다. 말씀과 거꾸로 가는 상황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 같은 때에도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차원도 똑같습니다.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면 어린아이 같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면 그 때 ‘네가 해’ 라고 나의 책임을 물으실 때입니다. 그 때가 공동체를 함께 훈련시키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에서 내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내 신앙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네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사단아 물러가라.’ 해서는 안 됩니다. 아들을 바치러 가서 죽이려고 하는데 멈추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어제 죽이라고 하셨으니까 바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사단이 됩니다. 만약에 사단의 말이라고 생각해서 아들을 죽였다면 이삭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냐 사람의 것이냐를 생각하는 것 자체도 사실 죄의 묵상입니다. 결국 큰 틀에서 보면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인 것은 맞고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제가 죽일 놈이 되겠지만 감정의 눈으로 보지 않고 더 큰 틀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죄를 묵상하지 않는 삶입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제대로 만들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하는데 왜 죽었을까를 묵상하는 것은 다 죄책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왜 주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성경을 보면 결국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왜 하셨는지는 모른다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왜 주셨는지를 생각해보면 더 큰 희생을 만들지 말고 두세 번 반복하지 말고 울분을 토하고 있지만 말고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문화가 되어야 하고 헛된 죽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음을 기억하기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언론과 종교가 죽음이 왜 왔을까만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탓합니다. 탓도 긍정적인 탓이 있고 너 죽고 나죽자고 하는 탓이 있는데 탓의 문화로만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여전히 현세적이고 여전히 유교적인 관점입니다. 죽음에 대한 시각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입신양명의 죽음이 되어야만 훌륭한 사람이고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억울한 죽음인 것입니다. 그 억울한 죽음을 승화시키는 죽음의 관점이 없습니다. 불쌍하고 정말 안타까운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죽음을 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사람도 죽이려고 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미국은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어떤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이 있다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관심이 집중되고 사회가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예전에 몇 십 명 에게 총을 쏴서 죽게 한 사람을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문화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인마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하고 어떤 매뉴얼을 만들어서 그런 사람이 또 나온다면 어떻게 도와줄 것인지를 찾습니다.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뒷조사를 해서 만약에 이혼한 가정의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나쁜 놈이라고 서로 각인을 합니다. 계속 분리시켜서 왕따의 문화를 조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그런 사람의 죽음도 기립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지만 사회적으로 그 사람도 살인당한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사회가 공동의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유교적 관점이 아니라 이 죽음을 내어주는 죽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의미 있는 죽음이었다고 하는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열심히 죽이려고 하는 제사장그룹이 있고 나는 절대로 끼고 싶지 않다고 하는 빌라도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서도 아름다운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화가 되고 다른 죽음은 미화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2014.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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