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1

요한복음 19장은 주님의 죽으심의 사건입니다. 죽으심의 사건은 우리가 얘기하는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종교적인 상징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 당시에는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하면 주님이 기억나지만 그 당시에는 ‘십자가’하면 강도나 노예 같은 이들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죽음이 기억나고 죄로 인해 당연히 죽어야 될 사람들에 대한 대가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상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기능으로 십자가를 생각하지만 그 당시의 문화로는 철저한 고통, 철저한 슬픔 또는 공의의 세우심, 정의의 실현이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법의 실현이 십자가였고 사회정의의 실현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정의, 공의라는 이름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되고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는 이 사건을 통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완전한 변화가 있게 된 것입니다. 19장으로만 보면 예수님 편에서 볼 때는 잘 죽으신 것입니다. 잘 죽었다는 말은 정당하게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죽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진짜 죽으심을 통해서 기독교는 이 죽음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믿는 것인데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복을 받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소위 인과응보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응하시고 응답해주시는 이유는 믿음이 좋기 때문에, 잘 믿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유대인들의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면 하나님 앞에 복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하면 또 하나님 앞에 복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 속에서 인과응보가 아니라 신비라고 하는 ‘모름’입니다. 누가 복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 앞에 저주 받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1을 넣으면 1이 나와야 하는데 1을 넣었는데 뜬금없이 3이 나오는 신비인 것입니다. 고난의 신비입니다. 고난의 신비를 모르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이시라는 것,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고 얘기했고 그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내어주는 것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유대교에서 믿었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자기 기준을 가지고 하는 사랑으로부터 이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라고 하는 신의 기준으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요한복음 19장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엄밀히 따지면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또는 하나님이 주신 참된 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너 죽었어.’ 이것이 아니라 진짜 죽은 것입니다. 

‘이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2절)’ 

19장의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무덤 속에, 죽음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요한복음 19장은 죽음의 장입니다. 죽음의 장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독교는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서 받은 것이 없는 것 같은 그 죽음을 통과해야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가 아닌 또 다른 신비를 경험하는 것인데 인과응보는 결과가 보이는 것이고 신비는 결과를 모르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성공을 바란다면 기독교를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성공 못한다고 하면 도망갈까 봐 말하지 않는 것이고 주님도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죽을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제자들에게 계속 이적과 기적을 베푸십니다. 마태복음 16장 중간단계까지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비로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말씀을 고백하고 나서 주님은 비로소 죽을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계산이 안 되는 종교이고 저주받은 인생처럼 살 수밖에 없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 고난을 이해하지 않으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을 어떤 종교적 언어로 이해하지만 이것이 실제 삶 속에서는 엄밀히 따지면 고난을 통과해야지만 진짜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죽음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죽음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주님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인하고 배신하고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잘 먹고 잘 살고 죽을 때도 너무 잘 죽은 부자들을 바라보는 시인이 하나님께 도대체 이게 뭐냐고 하소연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객사하시고 정치범으로 돌아가셔서 사람들은 ‘저 분이 하나님이야?’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는 결과를 알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미안한 죽음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안한 죽음이었고 이해가 되지 않는 죽음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저주받았다고 이야기했는데 주님은 그 저주가, 십자가가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앙꼬 없는 찐빵입니다. 그리고 오아시스 없는 사막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없이 기독교를 얘기하고 기독교라고 하면서 유대교처럼 행세합니다. 

죽으심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영광이 있습니다. 영광은 고난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니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믿고 잘 되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고난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지만 진짜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얘기해서 반드시 십자가라고 하는 죽음을 통과해야지만 부활의 경험을 하고 부활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한 죽음과 이해되지 않는 죽음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 속에 뭔가 있을 것이라는 신비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도 뭔가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근거 없이 갖는 소망은 없는 것이지만 허탄한 것이고 망상일 수 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신은 내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고 내가 생각할 때 정말 말이 안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것은 약속, 언약입니다. 기독교가 고난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은 약속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처음부터 약속하고 시작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일방적인 계약이 아니라 쌍무계약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쌍무의 약속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이든지 어떻게든지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도대체 이해가 안 됐던 사람, 인과응보를 벗어난 사람이 욥이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말 악에서 떠나있는 사람이고 자기의 삶의 자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욥을 자랑하자 사단이 와서 욥은 하나님이 다 주셔서 잘 믿는 것이라고 말했고 하나님이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라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욥이 엄청난 고난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욥이 고난 가운데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처음에는 창대했는데 미약해졌으니까 친구들이 와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도대체 이 사건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알아야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얘를 들어 진도가 우리나라에게 원한 굿을 하는 첫 번째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 달 뒤 정도에는 원한굿을 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이 죽음에는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상의 죄인지, 그들의 죄인지 따지는 것이고 그 죄 때문에 떠도는 영혼을 달래기 위해 무엇인가 해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원을 풀어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로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과응보니까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 자리를 그냥 묵묵히 통과하니까 나중에 욥기 42장에서 ‘내가 귀로 듣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본 분은 사실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욥은 구약에서 예수를 본 것입니다. 욥은 사사기시대 사람인데 그 시대 사람인 욥이 예수를 본 것입니다. 예수를 자기 인생 가운데서 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보니까 하나님도 자신과 같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울어주고 함께 슬퍼하고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서 끄집어내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애매한 고난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요? 그것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미안한 죽음이었고 가장 이해되지 않은 죽음이었는데 그들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그 저주받은 자들 가운데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주님이 죽으셔서 음부에 가셨다고 합니다. 음부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입니다. 그래서 밑바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복 받은 사람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인생이 가장 축복받은 인생이야.’ 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201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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