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2

왜 십자가가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일까요? 우리나라에서 부자소리 들으려면 재산이 최소한 10억은 있어야 합니다. 1% 부자들이 반 이상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99%는 거의 가진 것이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왕으로 오셨으면 왕족만 구원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감리교목사들은 최소한 아버지나 장인어른이 감리교목사였어야 왕족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골과 진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아버지나 장인어른이 없다면 그냥 평민입니다. 우리나라에 대기업이 10개 정도 되는데 내 가족 중에 대기업 다니는 사람 따져보면 10%정도 될까요? 그런데 삼성은 GNP의 50% 정도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불합리한 구조입니다. 빈민들끼리 무엇인가 해보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도대체 비빌 언덕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그런 부자로 오셨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주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람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죽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음부가운데 가셨습니다. 기준을 가장 낮추고, 낮추고, 낮춰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고난 가운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밑바닥에 오셔서 밑바닥 인생들에게 창세전부터 복 받은 사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 받은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대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없는데 고난 가운데 들어간다면 정말 죽을 맛인 것입니다.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창대했기 때문에 애매한 고난가운데 들어갈 수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 가운데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시작은 창대하고 과정은 죽음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욥이 욥기 1장1절에서 하나님 앞에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욥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욥이 모든 과정 가운데서 버티고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믿음이 그것입니다. 약속을 가지고 사는 힘이 견디고 이길 수 있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었고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고난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있지만 애매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진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애매한 고난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 누구든 어른들이 들어가서 아이들을 구출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명감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훈련이 되어있거나 평상시에 사명이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글을 썼는데 우리나라는 여자와 어린이를 먼저 보호해야한다는 세상의 아주 보편적 가치조차도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사고가 나면 여자와 어린아이 먼저 구해야하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식입니다. 우리 안에 훈련이 되어있거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고난 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면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이 내가 복 받은 이유이고 나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저도 아무것도 없는데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없는 것 때문에 탓하지 않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야 될 이유입니다. 종교는 세상에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 헌신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종교는 의미를 주는 힘이 있는 것이고 인생을 살아야 될 이유를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유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고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 것을 기꺼이 버리면서까지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 없고,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사명 때문에 힘들고 어렵지만 기꺼이 가다보면 그 안에서 진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진리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황, 사건,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엉거주춤,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고, 우유부단, 결정하지 못합니다. 인생이 쉼표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인생은 마침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마치고 나서 뭔가 이루었다고 해야지만 다음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 번 성공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것을 할 때도 또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든 다른 것이든 계속 통과점을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 쳇바퀴 돌듯이 도는 것입니다. 밑 빠진 독입니다. 아무리 부어줘도 못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결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으로 얘기하면 ‘아멘’하는 것이 그 말씀에 목숨을 걸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미와 하나님이 주신 헌신의 마음에 내가 정말 하기 싫지만 또 사람들에게 내가 조롱거리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간다는 것입니다. 불교용어이긴 하지만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따라서 살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정신이 멀쩡해서 얘기합니다. 예수님도 사실 ‘내가 진리가 아니고 또 스스로 왕이라고 하지 않았고 또 사람을 선동하지도 않았다.’ 고 얘기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는 돌에 맞아 죽을 만한 말을 계속 했습니다. 아둔하게 매를 부른 집사가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스데반 집사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광,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임재 속에서 자기가 죽을 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처신을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심리검사를 해보니까 종교망상증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망상증이라는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24시간 신을 생각한다는 것과 가끔 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미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다니더라도 미치지는 말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상황보고 사건보고 사람 보는 것은 매일 눈치 보는 것입니다. 매일 체면 생각해야 되고 사람의 칭찬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은 또 너무 눈치를 안 보는 막가파입니다. 너무 눈치 보고 너무 체면 차리고 너무 사람한테 칭찬 받을 것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이 기도할 때 할렐루야, 주여 외치면서 미친 사람처럼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힘들어합니다. 믿으려면 곱게 믿지 왜 저럴까? 하고 생각합니다. 

성막 안에 뜰이 있고 그 안에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습니다. 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소와 지성소가 그냥 천막입니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면 거기에 금촛대와 진설병이 있는 것입니다. 또 지성소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시온좌가 있고 법궤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밖에서 보면 그것은 천막인데 그 안에서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입니다. 뜰에 있는 사람과 성소에 있는 사람과 지성소에 있는 사람은 정말 천지차이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황홀경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뜰에 있는 사람들은 천막에 들어가서 무슨 짓이야? 하는 것입니다. 성소에 있는 사람들은 지성소에 뭐가 있을 것 같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일 안타까워하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다고 돈 내고 혼난다고 얘기합니다. 목사가 보기에도 교회는 정말 신기한 곳입니다. 어떻게 매주 나오고, 게다가 돈도 내고, 아무것도 생기는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 안내면 혼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또 적게 냈다고 미안해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저런 미친 짓을 왜 하지?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그 맛을 아는 것입니다. 그 맛은 십자가를 통해서 결단하고 ‘아멘’ 하는 사람만이, 밑 빠진 독이 막혀서 채워짐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우유부단하고 결단하지 않는다면 빌라도처럼 사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얘기합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라고 해야 하는데 다 빼고 모든 인류의 욕을 빌라도가 먹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마지막 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선장이 아무리 비정규직이다, 월급을 270만원 밖에 못 받았다 해도 결국 선장한테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시스템이나 구조의 문제와 비정규직을 쓰고 있는 자본주의가 더 큰 죄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선장에게 고난을 받아’ 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결단이 없는 것, 누군가가 마지막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성연애자들이 자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성연애인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생이 그런 것이라고 하는데 저는 태생이 죄 짓는 것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니 하나님이 이미 고치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죄를 인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다 죄인입니다. 날마다 마음으로 짓는 죄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죄에 매여서 살지 않게끔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고 우리를 회복시키신 것이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인데 우리는 그것조차도 여전히 ‘태생이’ 라는 말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태생이’ 라는 말은 조상의 죄라는 의미입니다. 더 올라가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책임 지셨습니다. 

빌라도가 나중에 자신은 죄가 없다고 손을 씻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지금도 주문처럼 외우고 있습니다. 진리로 살려면 핍박 받아야 합니다. 이왕 받을 거 즐겁게,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에서 온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 내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왕 받을 거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친척 중에 매일 한숨 쉬고 사는 분이 있습니다. 그 한숨은 좋은 것을 줘도 쉽니다. 너무 행복해서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줘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진리로 살기위해 고난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다면 그냥 그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으로 얘기하면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이번에 300명이 죽은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지만 제정신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받아들이고 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사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말하는데 그것이 다 상황과 사건과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처럼 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빌라도는 어떻게든지 황제한테 잘 보여서 한 자리 하려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한 자리 한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욕만 먹고 있습니다. 

99%가 왜 여전히 1%에게 지고 있느냐 하면 자신들도 1% 안에 들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1% 안에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혼택이라는 것이 있지만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1% 안에 들어도 외롭고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 안 한 자매가 매일 좋은 남자를 찾기에 좋은 남자 1명 있다 그리고 진짜 나쁜 남자도 1명 있다 그 나머지는 그 놈이 그놈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 놈이 그 놈인 것을 가지고 너무 아파하거나 너무 슬퍼하지 말고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가장 저주스러운 삶을 사셨습니다. 결혼도 못하셨고 객사하셨고 죄인으로 죽으셨고 머리 둘 곳도 없었고 무일푼이셨고 제자들에게조차 배신당하고 배반당했습니다. 이 죽음은 정말 최악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미가 있다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세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세 가지의 십자가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불교로 얘기하면 인생이 다 고난입니다. 눈 뜬 순간부터 고행이고 다 죽음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차피 다 십자가를 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이고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했던 강도의 십자가는 실패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너나 나나 똑같네.’ 라고 주님께 말했던 강도의 사망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인생이 어차피 죽으러 가는 십자가 앞에 있다면 영광의 십자가로 갈 것인지 실패의 십자가로 갈 것인지 또는 사망의 십자가로 갈 것인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 주신 사람, 주신 일이 있습니다. 영광의 십자가는 이 세 가지를 다 이룬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자질구레한 일을 다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으러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의미 있는 죽음으로 헌신하는 죽음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패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에 알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였구나.’ 깨닫기는 했는데 뒤돌아보니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죽을 때 서울대 갔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죽는 사람 없습니다. 죽을 때 10억 있었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언어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죽음 앞에서 보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사람들이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가치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죽음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언어를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을 깨닫고 하늘의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광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죽을 때 아는 사람은 종교의 의미도 못 찾고 자기가 헌신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의미는 알아도 헌신은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실패입니다. 그런데 사망의 십자가는 아예 그것도 모릅니다. 너무 먹어서 눈이 튀어나오고 죽을 때도 너무 잘 죽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내면을 볼 수 있는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잘 먹고 잘 죽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생 끝난 것입니다. 그것을 사망의 십자가라고 합니다. 저급한 언어로 이 세 가지의 죽음을 표현해 보면 영광의 십자가는 돌아가신 것이고 실패의 십자가는 죽은 것이고 사망의 십자가는 뒤진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음 가운데 계셨다는 의미는 죽음을 통과한 가치와 죽음을 통과한 내 감성과 죽음을 통과한 또 다른 지식으로 우리에게 살라고 주님이 먼저 죽으신 것입니다. 로마서는 그것을 더 실제적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가 죽고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는데 나도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실제입니다. 이 실제의 삶으로 살지 않으면 영광의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2천 년 전의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여전히 우리는 죽을 때쯤 돼서 ‘사랑할 걸’ ‘용서할 걸’ ‘미안하다고 말할 걸’ ‘감사하다고 말할 걸’ 하고 죽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의 주제는 잘 죽자는 것입니다. 

시체가 있는데 시체에다가 돌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은 척 했다면 돌을 세 개쯤 쌓으니까 벌떡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죽을 것 같다고 합니다. 죽을 뻔했다고 얘기합니다. 진짜 죽으면 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진짜 죽으면 세상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차력사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웬만한 무게가 와도 견뎌서 죽은 척 합니다. 그래서 진짜 죽어야 합니다. 잘 죽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다시 일어나서 죽을 것 같다고 얘기합니다. 고난 가운데 잘 들어가야 합니다. 진짜 죽으면 내 정과 욕으로부터 벗어나서 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끗하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해결하셨다고 하는 정직함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표현에 의하면 두 가지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과 세상이 나를 향해서 너 죽었어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고 하는데 세상이 안 죽었다고 하거나 나는 살아있는 것 같은데 세상이 죽었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제 아내가 어느 순간 제가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3년 뒤쯤 제 자신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엣날에는 제가 거룩하지 않거나 불의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고 정죄했는데 어느 순간에 나도 그 죄 속에 있는 것이고 내가 여전히 사는 것은 주님이 나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기다릴 줄도 알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편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변한 걸 몰랐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남이 보기에도 잘 죽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깨닫는 것은 의미와 헌신을 통해서 생명이 생명다워지도록 도와주고 보살펴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너는 내 자녀야.’ 라고 하신 것은 ‘내 자녀를 너도 같이 섬겨줘.’ 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나 구원받았네.’ 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라는 것이 깨달아지면 음부에 들어가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견뎌주고 이겨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여전히 고난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여지느냐 하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고 생각했는데 열방을 섬기는 제사장나라로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림하려고하고 자기들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잘나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섬겨주라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신앙, 내가 믿고 내가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원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눠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공짜로 받은 것을 알아야 공짜로 나눠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것은 공짜입니다. 

2014.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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