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고달픈 밤 2 (욥기 7:1-16, 벧전 1:13-25)

욥기 본문에 있는 말씀에 보면 욥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든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달픔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고통 가운데 있고 희망도 없고 스올이라고 하는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라고 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자포자기하고 있는 그런 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고 아무런 소망도 없고 하나님조차도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마음의 고백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하나님의 차원들을 바라보고 있는 통로가 아닌가 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하는 마음으로 고달픈 밤이라는 주제를 두 번째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바라볼 때 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나그네와 같은 삶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을 정착지로 여기고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가장 좋은 집, 영원히 살 것 같은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텐트를 짓고 장막생활을 하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라고해서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본향을 향해서 또 푯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 대로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나그네가 아니라 아주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더 가치 있는 더 멋있는 더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나그네인생을 사는 사람은 마음을 동이고 두려움 가운데서 거룩함을 추구하고 피차 뜨겁게 사랑하며 지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지만 우리가 가야될 본향이 있지만 살고 있는 이 삶 속에서는 영원한 것을 향해서 변화하고 변혁할 수밖에 없는 내 인생의 무게가 있지만 아니 지금 욥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 나를 놓으소서라고 하는 내 인생의 고달픈 밤이라는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베드로의 고백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사명입니다.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맞다고 늘 동의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또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사랑하려고하는 순간에 별 소리를 다 듣고 사랑하라고 하면 그 말이 싫어서 사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려고 했는데 누가 말하는 순간에 하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인 동물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많은 신비와 수많은 비밀의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은 ‘사랑’ 한 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 곳인지를 압니다. 세상 사람들도 예수에 대해 너무나 잘 압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갈 때 까지 ‘사랑하라. 사랑하라.’ 수도 없이 듣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을 때 ‘뜨겁게’도 문제가 되지만 ‘서로’ 도 문제가 되고 ‘사랑하라’ 도 문제가 됩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해서 ‘아멘’했는데 뜨겁지가 않습니다. 예배 후에 서로 일어나서 인사하는 시간에 원수 같은 사람하고는 부딪치면 안 된다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빙 돌아서 인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한테 인사 안하는 사람은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체라고 말하고 한 가족이라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끼리 서로 미워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동과 서가 하나가 되고 세대와 세대가 하나가 됩니까?

이사야가 꿈을 꿉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식을 하는 사자가 풀을 먹고 있는 초식동물 어린 양과 함께 뛰노는 나라입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상함도 헤함도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꿈은 동족끼리 같은 기질끼리 같은 사람끼리 모여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동물 전혀 다른 기질의 사람들이 모여서 신비하게 하나가 되고 함께 어울려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달라도 왜 그렇게 다른지. 눈빛만 봐도 싫은 사람 있습니다. 그리고 사귀면 사귈수록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남편이 아니고 아내가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욥이 모든 것을 통과하고 나니까 귀로 듣던 하나님이 이제는 보이는 하나님으로 변했다고 얘기합니다. 영혼의 고달픈 밤이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편 19:2)’

진정한 영혼의 깊은 밤을 이 고달픈 밤을 주님의 이름으로 잘 통과하셔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비밀이고 유일한 길인 것을 우리가 몸으로 겪고 몸으로 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합니다. 내 어두운 면이 내가 숨길 수밖에 없는 면이 아니 ‘나를 놓으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가 오늘 나에게 진정한 소망이 되고 진정한 사랑이 되고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성 요한이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습니다. 이 분을 대학원 때 알게 됐는데 이런 영성가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십자가 성 요한이 얘기하고 있는 네 가지의 인생의 밤이 있습니다. 욥이 겪는 이 고달픈 밤 아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고달픈 이 인생 가운데에서 우리가 겪어야 될 깜깜하고 스올과 같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밤, 이 밤을 십자가 성 요한은 하나님의 참된 빛 가운데 들어가는 네 가지의 통로라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기쁨을 누리는 세속의 밤을 지나야 합니다.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참된 기쁨을 줄 수 없다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19세부터 29세 까지 10년 동안 세상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추구했던 것이 세상의 철학이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 세상의 예술, 교회는 너무 고리타분하고 너무나 일방적이라서 교회 말고 세상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9세를 넘어가면서 세상 한 가운데에서 동서남북이 다 막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너의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시 46편 10절)’

‘가만히’ 라는 이 말씀이 영원한 stop이고 멈추라는 뜻인데 말씀대로 딱 멈추고 나니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나에게 소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무엇인가 되고자하는 것조차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말씀이 살아있는 것처럼 튀어나오는데 성경의 글씨가 그냥 글씨가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으로 느껴지고 경험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더 이상 빛이 없다는 그 세속의 밤이 경험되었습니다. 이 밤을 경험하지 않으면 세상의 것에 대해서 아직도 기대하고 있고 세상의 것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거룩한 행위의 밤을 지나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말씀이 최고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다 뒤로 넘어질 것 같았습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으로 살면 우리나라에 거룩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전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와서 교주가 되어달라고 할까봐서 스스로 겸손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말씀을 전할 때 마다 제 자신이 그렇게 거룩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까 정말 뼈가 녹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목사를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정말 죄인 중의 죄인이고 죄인 중의 괴수가 나였습니다. 한 죄가 저를 짓누르기 시작하는데 그 아픔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거룩한 행위의 밤이 거룩한 행위 자체가 어떤 영광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라고 말들을 합니다. 목사도 똑같이 사람입니다. 장로님도 똑같습니다. 인간의 메카니즘 안에 들어가는 순간에 로마서로 얘기하면 육신의 법에 들어가는 순간에 누구도 그 안에서 거룩한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거룩한 행위의 밤이 나에게 어떤 소망도 기대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 성 요한은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행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늘 어둠 가운데서 살 수밖에 없는 이 갈망이 있어야지만 하나님 앞에서 참 된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나의 영혼의 현존을 벗어난 기쁨으로 가는 나의 밤을 지나야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얘기하시는데 여전히 내 안에 내가 많습니다. 내가 여전히 나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흙이라는 두 가지만으로 나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따로 나라고 하는 존재 따로 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쁘고 내가 기분 나쁘고 내가 이루었고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나의 밤을 지나지 않으면 나의 영혼의 현존을 벗어나는 부재를 경험하지 않으면 진정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가운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나의 밤을 지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절망, 어둠 자체의 밤을 지나야 합니다.
영혼의 깊은 어둠 가운데 있어야지만 내가 존재할 수 없는 어떤 절망 가운데 있어야지만 참된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고 참된 임재가 나에게 얼마나 크고 놀랍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인지를 알아야지만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과 같이. 바다가 모든 오염물을 다 품고 자체적으로 정화시켜서 새로운 물로 만들 듯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정물이 들어가니까 구정물이 되고 내가 붓는 것이 그대로 나오는 물이 아니라 부어도, 부어도 다 품을 수 있는 그 어둠의 밤을 지나가야지만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바퀴가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굴러가려면 구덩이 보다 큰 바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16절에 나를 놓으소서 라고 하는 욥의 기도와 같은 세 사람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

모세가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서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데 모세가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라고 ‘나를 놓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원수를 향한 최고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제발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모세의 기도는 다릅니다. 어둠의 밤을 지나고 고달픈 밤을 지난 사람들은 인생의 기도가 다릅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어떻게 저런 사람을 전도사로 세우고 지도자로 세울 수 있습니까?’ 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습이 그 모습이었다고 얘기합니다. 제가 그렇게 막나가는 전도사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또 누군가의 은혜로 목사가 되어서 조금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기도가 우리들의 기도가 되고 모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과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 단절될 수밖에 없는 고달픈 밤을 통해서 밤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소망이 되고 참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2)’

자신이 저주 가운데 들어가겠다고 사도바울이 기도합니다. 육신의 형제들이 버림받는 것을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저주 받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늘 설명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는 12제자 안에 못 들어가지 않았느냐? 너는 예수를 못 만나지 않았느냐? 그래서 사도가 아닌 것 같다.’ 고 계속 의심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쟤네들이 나한테 손가락질 했다 쟤네들은 나를 사도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저주 가운데 들어간다 할지라도 육신의 이스라엘들을 버리지 마시라고 기도합니다.

고달픈 밤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달픈 밤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 가운데 살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달픈 밤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정말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어둠 가운데서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겠노라고 하는 이 믿음의 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 밤의 지식을 함께 나누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영광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고난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고난을 고난으로만 지나지 말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지혜와 참된 진리지식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인생의 고달픔을 통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있다할지라도
그 밤에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나를 놓으셔서
진정한 생명
진정한 구원을 이루어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결단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참된 소망이며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빛인 것을
함께 고백하고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201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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