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욥기 13:20-28, 사도행전 1:15-26)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라고 하셨고 그 말씀이 우리의 길이고 또 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사랑의 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지 못하거나 말씀을 듣고 있지 못하거나 내가 말씀으로 살지 못하면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지 못하는 그런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약, 신약의 ‘약’이 약속의 의미가 있고 그 약속을 하나님은 반드시 지키실 것이라고 또 다시 약속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있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살 것인가? 아마도 그것은 언약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령은 내 안에 계시지만 성령이 일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면 말씀, 언약이라고 하는 약속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동의하고 있고 또 그것을 확증하고 있고 그것을 보증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부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약속이 창세로부터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약속 안에서 살고 있는 한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을 계속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기 13장 20절에서 28절에 있는 말씀에 보면 욥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야 되는데 말씀하고 있지 않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하게 일하고 계셔야 되는데 일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 그래서 지금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왜 욥은 하나님의 부재와 일하고 계시지 않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또 다른 차원에서 욥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학습목표 또는 학습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잘 가르치는 교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한 집사님이 저에게 잘 못 가르치는 목사 중에 한 사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학습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학습목표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사람들이 쫓아가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학습목표의 수준이 굉장히 높고 지체들을 그 수준까지 끌고 가려고 하니까 사람들한테는 그 목표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욥도 똑같이 멘붕이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그 때 그 때 마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쫓아갔습니다. 욥기 1장을 잘 읽어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죄를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전한 마음으로 날마다 대속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그 자식들이 자신이 모르고 있는 죄를 지었을까봐 그것까지도 재물을 드리면서 대속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 욥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의 문제 속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자신은 죄를 묵상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면 엄청난 학습목표, 하나님이 왜 나를 이곳에서 이렇게 끌고 가고 계실까? 라고 생각하느라 멘붕이 온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 속의 하나님은 분명히 이렇게 하실 것인데 이렇게 해야만 되는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지금 욥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욥기 13장을 잘 읽어보면 전반부에는 욥이 친구들에게 얘기합니다. ‘너희만 사람이냐? 너희에게만 지혜가 있느냐? 너희만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나도 사람이고 나도 지혜가 있고 나도 하나님을 믿는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다 변증할 수 있습니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러실 분이고 하나님은 이렇게 하셔야 되는데 이해가 안 됩니다.
당대의 의인 중에 의인이 욥이었습니다. 그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큼의 의를 가지기 위해서는 고난의 길을 가야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의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는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휘장이 찢어지고 이제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내는 사람이 됐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에 더한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개념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온전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구든지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의인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죄를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를 행하지 마옵소서(13:20절)’
사실 원어를 보면 이 말씀은 ‘나에게 두 가지 일을 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의역한 것입니다. ‘행하여 주옵소서.’를 ‘행하지 마옵소서.’로 바꾼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욥의 기도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부재 가운데 계시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 속에서 두 가지를 행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의 내용은 14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하고 있는 ‘행하지 마시옵소서.’ 또는 ‘행하여 주시옵소서.’는 이 두 가지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21절)’
지금의 환란, 고난, 이 심판의 하나님 손을 거두어주시라는 것입니다. 환란의 손에서 나를 거두어 주시라는 것입니다. 내가 환란에 들어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내가 고난 가운데 들어가지 않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손을 하나님의 힘을 하나님의 능력을 거두어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면 환란은 믿음의 사람들도 통과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비가 오고 눈이 오듯이 내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그 삶 속에서는 늘 실패자의 인생 또 힘의 논리로 빼앗기는 자유 경제에 짓눌린 불평등 그리고 죽음 앞에서 초라해지는 내 생명이 사람들은 늘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인생은 수고와 슬픔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말이 수고와 슬픔이라는 말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수고와 슬픔이라는 그 인생 앞에서 내가 수고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 인생을 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힘으로 부자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의 힘으로 건강하게 하실 수도 있고 그래서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믿는 사람이 더 아프고 믿는 사람이 더 가난하고 믿는 사람들이 더 없습니다. 내세울 것이 없고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숨깁니다. 또는 그런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천하에 드러나는 사건으로 욥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환란 가운데 있고 모든 사람이 슬픔 가운데 있다는 것을 욥이라고 하는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들어서 만천하게 알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주는 나를 부르소서(22절)’
이 고백 속에는 욥의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죽은 신입니다. 다른 신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인격적이신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 그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의 신랑이 되시고 나의 친구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세 번째 존귀하고 부요하고 거룩하게 자신을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가지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주님, 나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존귀케 하시고 나를 부유하게하시고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나를 부르셔서 세우신 하나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하는 분이시고 나를 존귀하게 하시고 나를 부유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나의 하나님이신데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부재 가운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욥이 묵상합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23절)’
내가 지금 존귀하지 않고 내가 가난하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비천한 인생의 모습으로 있기 때문에 죄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얘기하고 정직하고 순전하고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욥이었는데 왜 그가 여전히 죄를 묵상하게 만들고 있을까?
그 이유는 존귀하고 부유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세우심은 알고 있지만 보내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고 부유하고 거룩하게 나를 부르셨는데 왜 그렇게 부르시고 세우셨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왜 육신으로 살아내야 되는 것인가? 왜 21세기에 대한민국에 이 가정에 이 교회 공동체 가운데 이 시대에 나를 보내셨는지를 모르니까 여전히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라고 하는 것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아빠 고르기>라는 동화책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빠를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고른 아빠는 정치가 아빠도 아니고 CEO아빠도 아니고 인터넷 쓰레기통에 버려진 백수아빠입니다. 백수아빠가 아이와 가장 잘 놀아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아버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지금의 아버지를 선택할 사람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제 딸도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자기가 주워온 딸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혹시 이씨가 아니냐고 하면서 자신의 출생이 삼성가과 관련되어있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니라고 정씨라고 그리고 나랑 너무 똑같이 생겼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농담이지만 제 딸도 아버지를 바꾸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아버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가정,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공동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직업,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상황 가운데 있을 때 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이곳에다 세우셨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라나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를 원하시는데 보내심에 대한 아주 분명한 사명이 없으면 우리는 날마다 죄를 묵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8년을 살았는데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분입니다. 미국시민권자들은 정말 부럽습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8년 살고 열 받아서 한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이 신분이 정말 중요한 것인데 한국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우리는 그 중요성을 모릅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면 그 신분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공간에 왜 이 시간에 하나님이 왜 이 속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 일을 감당케 하시고 그 말씀을 나에게 허락하셨는지에 대한 보내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욥이 ‘내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라고 고백하고 나니까 자기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 같고 마른 지푸라기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게다가 기억조차 나지 않던 어렸을 때 지은 죄들까지도 다 들춰내시면서 하나님은 나를 고발하고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28절)’
그 시대 속에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를 묵상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욥이 하나님이 자신을 왜 고난 가운데 환란 가운데 그 자리 가운데 집어 넣으셨는지를 나중에 깨닫습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고난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학습목표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가 도대체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보내심의 목적을 나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내심의 이 사명을 깨닫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 두 가지를 행하여 주시옵소서.’ 이것도 아닙니다. 욥이 성숙한 사람으로, 다시 말해서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봤다고 고백하는 욥이라면 ‘내 믿음의 행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내 믿음의 행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할 것입니다. 질문이 바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옛날 베드로라면 성령이 빨리 와야 된다고 다급하게 말하든지 아니 너무나 연약해서 여종 앞에서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겁쟁이 베드로라면 똑같이 욥처럼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가 있기에 스승을 못 박혀 죽게 하는 그런 상황까지 갔을까? 도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리고 언제까지 이것을 해야 되는 것인가? 라고 자책하고 죄책감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베드로가 변했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2)’
지금 베드로에게는 열두 번째 제자를 세우는 것이 반드시 해야 할 믿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와 싸울 때 하나님의 불을 내리게 하기위해 첫 번째 했던 행위가 무너진 재단을 수축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열두 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열두 돌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야곱을 거쳐 이스라엘까지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기억하는 두 가지 장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삭에게 약속하셨고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스라엘민족공동체에게 반드시 지키셔야 된다는 싸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래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셔. 내가 지금 이 상황과 이 사건과 이 사람 속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셔.’ 라고 하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열두 돌, 열두 사람이라고 하는 믿음의 행위의 표적, 싸인입니다.
유다와 다말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우리는 압니다. 만약 다말이 그 상황 속에서 유다에게 돈을 받았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어도 죽었을 것입니다. 다말은 자기의 욕정이나 원하는 어떤 것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증표, 바로 그 믿음의 행위의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유다의 지팡이였습니다. 유다가 다말의 행동을 책망할 때 다말이 믿음의 행위의 표적을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유다가 ‘네가 옳도다.’ 라고 말합니다. 만약 다말이 죄를 묵상하고 있었다면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가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의 행위의 표적을 구했습니다.
야고보서에 있는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얘기합니다.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아들을 바치러 간 아브라함이었지만 야고보는 그것을 믿음의 행위의 표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방 여인 라합, 몸을 팔아서 살았던 인생이었는데 붉은 기를 올려서 믿음의 행위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 집안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묵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많습니다. 이 주 동안 제가 싸움닭이 된 것처럼 정말 열심히 싸웠는데 아무래도 설교를 못 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열두 돌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하는데 기회가 없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죄, 많습니다.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런데 죄를 묵상하면 안 됩니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믿음의 행위를 구해야 합니다.
‘되게 하여야 하리라.’ ‘열두 돌을 세워야 하리라.’ ‘아들을 바쳐서 여호와 이레를 경험하는 믿음의 길을 가야하리라.’
저도 개인적으로 열두 번째 돌, 열두 번째 사람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혼자 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모으라고 얘기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두 번째 사람, 그 믿음의 행위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수준도 종류도 분야도 다 다를 것입니다. 어쨌든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죄를 묵상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그래서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로 열두 번째 돌을 열두 번째 사람을 어떻게 세워야할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열두 번째 돌이 무엇인지 찾았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행위를 보이라고 얘기하셨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내리게 했던 하나님의 불은 원래는 열두 번째 돌이 있든지 없든지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두 번째 돌을 세워야만 불이 내리게 하신 것은 그래야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것이 되고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열두 사람을 세우고 나서 오순절다락방에 성령의 불이 내립니다.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1:26)’
그리고 나서 성령의 불이 내립니다.
우리 인생에 우리들의 신앙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상황과 사건 속에 열두 번째 사람, 열두 번째 돌을 수축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욥이 겪었던 인생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실패자의 삶이었고
자식도 물질도 다 빼앗긴 삶이었습니다.
힘의 논리로 경제의 논리로
날마다 죽음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인생의 실패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힘의 논리에서 경제적인 그 상황 속에서
기근과 가뭄과 전쟁과 슬픔이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행위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느니라.’
오늘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셨고
오늘 우리를 세우셔서
이 땅에 이곳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이 보내심의 명령을 따라서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
믿음의 행위
열두 번째 사람을 세우고,
열두 번째 돌을 수축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2015.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