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나의 중보자(욥기 16:6-22, 디모데전서 2:1-7)
하나님은 우리를 중보자로 부르셨습니다. 중보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양쪽 사이를 통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서로 만나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조정하고 화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양쪽 사이를 통화한다는 것은 영어로는 In the gap 인데 먼저 들은 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증인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만나게 한다는 것은 On the wall 인데 성벽 위에서 먼저 본 사람을 의미합니다. 먼저 본 사람은 파수꾼인데 파수꾼은 먼저 봤기 때문에 소리쳐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Against the wind 는 분열과 거짓과 잘못된 것을 저항하고 서로 하나 되게 하고 통일되게 하고 분명하게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조정자와 화해자입니다. 화해자는 먼저 행하는 지도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중보자는 증인이고 파수꾼이고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진리를 쫓아가고 생명을 쫓아가는 자들에게 중보자로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내가 죄인인지 의인인지를 날마다 묻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회개하고 돌아서고 그래서 진리 가운데 서 있는 것에 대해서 날마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선줄 알았을 때는 넘어질 것을 염려하고 내가 무엇인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심 받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를 묵상하지 않고 진리를 쫓아가는 의인의 삶을 살아가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개혁자들이 많고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구원파가 있습니다. 구원파는 아예 자신들은 의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았기 때문에 의인의 삶으로 살아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상담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기적수업>이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책은 성경의 이야기를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굉장히 심리학적이고 과학적으로 풀어서 원리화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 분들 중에 한 분은 원불교신자이고 또 한 분은 그 책을 공부하고 나서 교회를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은 분이었습니다. 제가 로마서 내용을 이야기하고 성경의 원리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영화<매트릭스> 이야기를 하니까 그 책의 내용과 너무나 비숫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사람의 ego 즉 자아는 버려야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고 특별히 사람을 갈등 가운데 빠지게 하는데 그 자아를 이겨내려면 외부에서 성령이 오시거나 다른 영이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정리가 되는데 그러려면 ego가 죽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성경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책을 쓴 사람이 미국사람인데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쓴 책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을 성경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기 나름의 현대적인 언어로 설명해낸 것입니다. 제목과 발제한 내용들을 읽어보니까 다 맞는 얘기이고 옳은 얘기입니다.
우리는 죄인일까요? 의인일까요? 의인이라고 하면 ‘너 죄인이잖아.’ 라고 할까 봐 죄인이라고 해야 할 것 같고 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 받은 사람이니까 의인이라고 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요즘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여기저기 난리가 났습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을 합법화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축제하는 옆에 떼 지어 가서 데모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동성연애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말씀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나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기적수업>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악인인데 어떤 방식을 취해야지만 의인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내가 죄인인지 의인인지를 고민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구조 안에서 이 틀 안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개혁파가 되든지 구원파가 되든지 아니면 내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생각하면서 마음의 수련을 하고 자기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욥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재난을 주는 위로자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상처 입은 치유자의 모습으로 사셨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있어야 한다.’ 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보자의 삶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들어가기 전에는 철저하게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그리스도의 살리신 영이 내 마음 속에 들어오면 그 때는 그 시선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선 돌리기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내 마음 내 상태에 대한 얘기를 계속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인지 내가 의인인지 내가 어떻게 하면 의인의 삶으로 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서 스스로 거룩함의 연습을 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셨던 것은 죄인과 함께 밥을 먹은 것이고 죄인들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얼마나 정결하고 자신이 거룩한지에 대해 고민하는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가장 억울한 사람들을 연약한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Mers 때문에 바깥출입도 꺼리고 사람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만나도 악수도 잘 하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그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Mers에 걸린 환자만 찾아냅니다. 멀쩡한 사람을 만나서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은 의사의 사명이 아닙니다. 아픈 사람, 억울한 사람, 불쌍한 사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자신의 구원과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거룩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의인으로 살 것인가가 아니라,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의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판단이 참 빠릅니다. 같은 글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 다 비슷하다는 것도 놀랍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또 놀랍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를 어떻게 해결자로 중보자로 부르셨는지를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냐 의인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맡겨주신 생명,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오늘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분이 오늘 저에게 목사님이 기도를 하셔야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딸이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하려다가도 하기 싫다고 하는 것처럼 저도 기도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기도하라고 하니까 갑자기 기도하기 싫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에게 왜 기도를 하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무슨 일을 잘 하기 위해서? 내가 사람들에게 거룩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인가? 만약 그것 때문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때 목사니까 다른 교인들 보다 가장 늦게 까지 기도하다가 일어나야 하는데 기도는 안 되고 사람들은 안 가고 그걸 너무 힘들어하는 자기 모습을 보면서 목사하면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보면 정말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저는 벌써 목사 그만뒀어야 합니다. 저희 교인 중에 어떤 분은 새벽기도회 끝나서 가장 먼저 일어나서 가는 목사님은 제가 처음이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나는 죄인일까요? 의인일까요? 끊임없이 물으면서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는데 주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계셨고 죄의 자리에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인지 의인인지 고민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맡겨진 생명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파수꾼으로 지도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의 실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너희는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다.’ 라고 말했던 욥이 자기는 정결한 기도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맞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욥이 의인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욥의 지금 말은 정확한 말입니다.
두 번째 6절에서 17절까지는 열두 가지의 하나님의 행동이 나옵니다. 피로하게 하고 패망케 하고 시들게 하고 찢고 눈초리로 보시고 악인에게 넘기시고 던지시고 꺾으시고 부서뜨리시고 과녁으로 삼으시고 흘러나오게 하시고 치고 다치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단이 한 모든 짓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런 모든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고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보자가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중간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중보자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보자는 양쪽 사이에 낀 사람이고 서로를 만나게 하고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오직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욥은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욥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디모데전서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이 다릅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아주 못된 독재자이고 자신의 삶을 심하게 괴롭히고 있는 존재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욥이 나의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중보자는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의 거룩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변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죄를 위해서 스스로 죄인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을 위해서 죽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딤전 2:1)’
긍휼이 필요한 자를 위해 간구하고 모든 믿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연약한 자를 위해 중보하는 것이 도고이고 하나님을 향한 증언자의 고백이 감사기도입니다. 자신의 것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순간부터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의 이타적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기도가 뭐가 필요할까? 늘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생명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하나님이 뜻을 알겨 주시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주위에 있는 너무나 연약한 자들을 위한 기도의 사명을, 기도의 능력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능력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욥에게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그는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에게는 중보자가 필요 없습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이 잘 못 됐고 자신은 의인이고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얘기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의인을 위한 중보자가 아닙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선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 가운데 들어가서 그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사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는 처음에는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봤다고 하는 것이 욥기의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욥을 비난하고 있는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욥의 고난은 이 세 친구를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잘못된 신학과 잘못된 전통과 잘못된 인생관 때문에 욥을 끝까지 비난하고 비판해서 사단의 하수인처럼 살고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관심은 바로 이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복을 받고 복을 이루고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제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복을 나눠주기 위해서 나에게 맡겨진 생명을 위해서 종교생활이 아니라 진짜 생명의 삶으로 살아내는 내가 중보자가 되어서 증인이 되고 파수꾼이 되고 먼저 행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의인에게 오신 중보자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억울함으로 오신 주님이 아니라 내 사명을 위해서 생명의 사역을 위해서 오신 주님입니다. 우리가 중보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데 예수를 빼고 얘기하려고 하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고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열 받고 배가 부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우리는 짐승이라는 fact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짐승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너무나 영적인 천사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짐승도 되면 안 되고 천사도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거룩한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증인이고 파수꾼이고 지도자인 삶은 내가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깨지고 부서지고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깨지고 부서지고 연약한 것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말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그 중보자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또는 인간의 편에서 말합니다.
어느 분이 페이스북에 교인이 100명 정도 되는 교회라면 반드시 그 안에 동성연애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동성연애가 죄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런데 죄인은 모호합니다. 죄는 분명하지만 내 삶의 자리에 있는 내 사람은 기다려주고 또 기다려주고 용납해주고 또 용납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호함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정하고 화해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명입니다.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자, 화해를 이루는 자, 갈등의 자리에서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보이면서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되게 할까?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의 편을 들어주고 서로가 단일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하는 사명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명이 있어서
육신을 가지고 죄 가운데 살아내는
의인으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신앙은 자기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다른 생명을 위해서
거룩한 삶으로 불러내기 위해서
오늘 나를 부르셨습니다.
나의 눈을 들어서 먼저 본 자가 되겠습니다.
내가 양쪽 사이에 끼어서 먼저 들은 자가 되겠습니다.
내가 앞서서 조정하고 앞서서 화해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님이 중보자가 되라고 말씀하여 주셨으니
나에게 맡겨진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겠습니다.
2015.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