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내가 희망이 없노라(욥기 13:1-19, 요한계시록 4:1-11)
욥기 13장 1절에서 19절에 있는 말씀은 욥에게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15절)’
욥은 인간의 지혜와 명철과 교훈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세 가지가 나옵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4절)’
처방도 문제가 있고 진료도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방과 진료가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10절)’
사람의 얼굴을 생각해서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그 말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말, 사람이 싫어하지 않는 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지 신경 쓰면서 하는 말, 욥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욥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그들은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사람들에게 맞는 답 또는 욥을 죽이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리 마태에게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와 같이 식사를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죄인과 함께 밥을 먹으면 자신도 죄인으로 취급받을까 염려하는 것 때문에 세리와 그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남들의 평가, 남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인 생명을 보고 있기 때문에 마태를 찾아갑니다. 죄인과 세리들과 같이 식탁공동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욥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교훈과 명철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 문제 때문에 순수하지 않은 동기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를 말하고 있고 명철을 말하고 있고 교훈을 말하고 있어도 절대로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16절)’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경건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지혜를 말하지만 명철을 말하고 있지만 교훈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희브리어 원전으로 돌아가면 15절 말씀이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 라는 내가 희망이 있다는 내용으로 표현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 개역성경에는 희망이 없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래 원전은 희망이 있다고 표현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명철과 교훈이라고 하는 쓸모없는 처방과 쓸모없는 진료를 통해서 또 순수하지 않은 동기를 통해서 경건하지 않은 것들을 통해서 그것들은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에게 온전한 희망을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명철과 인간의 교훈에는 희망이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참된 희망이 있다고 소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는 죽음만이 죽음 이후의 세상만이 자신에게 참된 소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전능자 하나님에게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변론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12절 13절에서는 참된 격언과 방언도 쓸모없고 우리는 다 같이 잠잠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논리도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없고 어떤 교훈도 참되지 못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맞는 얘기처럼 들립니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내 스스로도 죽음 이후를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의 꿈 중에 하나가 천국에 빨리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빨리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빨리 가기 때문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또 막상 죽음의 때가 닥치면 덥석 가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빨리 천국에 가야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도 똑같은 그 신앙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모른다면 똑같이 유대인들처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는 것은 또는 욥의 결론을 보면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옥 같은 이 세상 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욥의 마지막 고백은 이제는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고백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죽음 이후에나 가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욥의 마지막 고백은 이 땅에서 이곳에서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고 이약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2천 년 전에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고백되고 증언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너는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늘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예수그리스도의 흔적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명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오늘 내가 살아야 될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하면 가늘고 길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살아가고 그 뜻을 이루실 때 까지 ‘다 이루었도다.’ 하실 때 까지 끝까지 가늘고 길게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몇 년 전 성탄절에 너무 아파서 저희 집에서 삼성가정의학과 까지 걸어가는데 하나님 앞에 빨리 데려가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사 한 방 맞고 나서는 더 살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고통 가운데서 살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고백했는데 주님은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살아내지 못하면 이루고 살지 못하는 그 삶 때문에 천국에 가서 천추의 한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A.D 90년에서 100년경에 이루어졌던 종말론적인 사건은 죽어서 가는 인생이 아니라 요한이 바라봤던 미래적 사건은 요한에게는 또 다시 현재의 사건이었고 그리고 그 당시에 박해 받고 고통 가운데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배의 한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의 세계는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과 조건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황제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소망을 봅니다. 요한이 희망을 봅니다.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하늘의 예배를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 예언 가운데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보좌를 둘러서 있는 24장로들이 있습니다. 24장로들은 역대상 24장에 나오는데 제사장들을 24그룹으로 나눴던 하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24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있는 일곱 교회의 대표들인 24명의 장로들입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옆에 함께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네 생물이 있습니다. 사자와 송아지와 사람과 독수리 같은 존재들이 나타나서 그 존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 네 생물은 천지 모든 만물을 지칭하고 있는 맹수와 들짐승과 지성과 공중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증언은 하나님 앞에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모든 만물에게 경배를 받고 계시는데 만물들이 경배하고 있는 내용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과 존귀와 감사뿐만 아니라 24장로들도 똑같이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말합니다. 만물들은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교회들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은 것에 대해 하는 것인데 능력은 다른 것입니다. 그 감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낸 사람들의 능력을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죄를 이긴 능력입니다.
이 교회들은 24장로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그들의 인생 가운데 죄를 이긴 능력 사망 권세를 이긴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았던 우리들의 인생은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살아가는 하나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묵상하지 않습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이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간증이고 증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과 존귀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는데 내가 더 이상 죽음을 묵상하고 살지 않습니다.
두 번째 예수의 이름으로 주시는 통치의 능력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말하는 대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을 두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마다 새로운 창조 새로운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는 능력입니다.
그 보좌는 누구도 앉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만물들은 영광과 존귀와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데 24장로들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이 능력의 가치가 24장로들이 썼던 금관입니다. 24장로들이 받은 생명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그 금관을 보좌 앞에 드립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10절)’
일곱 개의 교회들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었는데 그것이 금관입니다.
원래 예배는 하나님 앞에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존귀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시를 받고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셨던 금관을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모든 예배는 내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승리자의 노래입니다. 예배는 승리자의 축제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지치고 힘들어서 겨우 끌려와서 앉아서 드리는 패배자의 예배가 아닙니다.
유대교는 늘 패배자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늘 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왔습니다. 그래서 양을 잡던 소를 잡던 내가 그것을 드림으로 인해서 내 죄가 깨끗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배는 다릅니다. 내가 죄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씻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 금관, 승리했던 이기는 자의 획득물,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획득물, 전쟁의 전리품, 내가 세상에 나가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한 결과물을 가지고 와야지 주님 앞에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기고 오셨습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서 승리했던 경험들을 가지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관을 주님 앞에 드리는데 나에게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운 예배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주님 때문에 이겼습니다. 오늘 내가 주님 때문에 승리해서 승리의 면류관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승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예배의 금관을 주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금관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고 천상의 예배 가운데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금관은 불 시험을 통과합니다.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어진 그 모든 것들은 불을 통과할 때 마다 다 태워져서 없어집니다. 불 시험은 오늘 나에게 하나님의 것으로 시작했는지 동기를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했는지 과정을 묻는 것이고 과연 하나님의 열매인지 결과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서 스스로 묻습니다. 내가 왜 사랑했는지, 내가 왜 살고 있는 것인지, 내가 오늘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정말 하나님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결과였습니까? 만약에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무너져버리면 하나님의 불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 일곱 개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교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기지 않으면 우리는 금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니골랏당이었고 또 이세벨의 가르침이었고 발람의 교훈이었습니다. 니골랏당은 생각만 있고 육신이 없는 것입니다. 소위 영지주의자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관계가 목적이고 사랑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사람을 계속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을 추구하고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쓰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것을 보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돈을 받고 자기가 보고 있는 것들을 왜곡시켰습니다. 이 세 가지를 지금 이곳에서 겪어내지 않으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금관을 차지하고 획득하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욥은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고백은 상처받고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만이 소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만이 참된 소망이라고 고백합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이루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구질구질하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안에 이루어야 될 하나님의 숙제가 있습니다. 이루어야 될 하나님의 상급이 있고 내가 받아야 될 하나님의 금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소망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곳에 계셔서 우리 가운데 모든 것에 소망이 있다고 하신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 주님 안에서 참된 소망을 누리고 이루고 살아가는 하나교회 모든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세대
절망의 전쟁의 가뭄의 지진의 도시 가운데서
너무나 슬퍼하고 힘들어합니다.
그 절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슬픔 가운데 그 상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소망의 자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참된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육신의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셔서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능력이 있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가지고 살겠노라고
나의 금관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참된 예배 가운데 참여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주님 앞에 이루고 살겠습니다.
주님의 가치와 주님의 희생과 주님의 내어주심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승리자로 이기는 자로 살겠습니다.
2015.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