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욥기 9:1-24, 마가복음 10:13-31)

욥기 9장 말씀을 보면 수아사람 빌닷에게 욥이 대답합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수 없고 하나님은 진노하고 계시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또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라는 말이 욥이 가지고 있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고 하나님은 진노하고 심판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또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쉽지 않고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 스스로가 자기의 생명을 천히 여긴다 또는 경멸한다 또는 멸시하고 업신여긴다고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자기의 생명을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 표현은 자기가 아무리 옳고 아무리 지혜롭고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야기합니다.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멸시하고 경멸하고 업신여길 수밖에 없는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그 모든 고난을 뚫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또는 고난 가운데서 참된 기쁨을 찾을 수밖에 없는 욥의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명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있다고 자기의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자신을 만든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생명조차도 내가 주님 앞에 내려놓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생명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경멸하고 멸시할 정도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마다 내가 지혜롭게 살고 있는 거처럼 보이고 어쩌면 내가 의롭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내가 무엇인가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에는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고 진정한 의이고 진정한 능력이 아닌가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은 그것을 어린아이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만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천국을 간다고 하면 자기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꿈꾸고 그래서 빨리 죽어서 가야 되는 아름답고 좋은 곳, 어떤 공간의 개념으로서의 구원, 천국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원의 의미는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내가 무엇을 하게 되면 무엇을 보여주면 그것이 30배 60배 100배로 뻥튀기되고 또 착한 일을 하고 울지 않으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시는 것 같은 그런 천국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그런 놀라운 신비입니다. 성품이 변하는 것이든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든 그 모든 것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 구원의 경험 구원의 느낌 또 구원의 능력 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귀신의 믿음이 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상관, 관계입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줄 알고 있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예수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있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귀신의 믿음입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는데 하나님과 어떤 것도 하고 있지 않는데 천국에 가면 또 다른 일 이 벌어질까요? 누군가는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에 지옥을 만드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초청을 했는데 그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같이 밥을 먹어 보면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게 멀리 떨어져서 앉습니다. 친하지 않은데 마주보고 앉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리고 가장 친하다고 하는 사람하고 꼭 여행을 가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24시간 그 사람하고만 있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함께 여행을 하면 둘 중 하나의 관계가 됩니다. 더 친해지든지 아니면 다시는 안 볼 원수가 되든지 합니다.

하나님이 천국에 오라고 사람들을 다 초청하셨는데 가고 싶어도 친하지 않아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관계를 해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편한 사람끼리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곳이 지옥입니다.

천국의 개념을 구원의 개념을 너무 종교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다보니까 예수 믿으면 공짜로 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공짜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공짜 안에 관계가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혜로우시고 진노하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분과 관계하고 있어서 아무리 자기가 노력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해도 생명을 하루 더 연장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내어맡깁니다. 자기의 생명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죽느냐 어떻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생명을 천히 여기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주님이고 나의 생명의 은인이시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 어린아이 같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어린아이처럼 살지 말고 성숙하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또 어린아이처럼 살라고 얘기하기도 하십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성숙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어린아이 같이 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둘 키워보니까 하나는 매를 부르고 하나는 매를 댈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똑같이 사랑하는데 잘못했다고 한 마디 하면 끝인데 끝까지 째려보고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열불이 나서 매를 들고 싶어집니다. 또 하나는 눈만 크게 떠도 잘못했다고 바로 손을 비벼댑니다. 그러면 우스워서 도저히 야단을 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까지 머리 숙이지 않고 자기는 괜찮다고 끝까지 자기가 지혜롭다고 얘기하고 자기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버지도 화가 나실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2천 년 전에 썼기 때문에 아이를 때리는 것이 익숙한 문화라고 이야기하긴 하지만 아이를 징계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을 보면 맞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삶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 같이 받들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는 단순합니다. 단순함이 힘이고 단순함이 믿음이고 단순함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것이 정함입니다. 정하지 않고 내가 결정하지 않고 내가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고 어떤 것에 몰입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좋아하는 것에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입니다. 재미있는 동영상을 볼 때는 눈도 깜박이지 않아서 눈이 나빠진다고 합니다. 주님이 잔칫집에 초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장가가야 되고 장사해야 되고 늘 바쁘다고 얘기합니다. 어떤 것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파랑새신드롬이 있습니다. 혹시 저 사람이 나 보다 더 많이 배우지는 않을까? 저 사람이 혹시 나 보다 더 일찍 하지 않을까? 혹시 저 사람이 내가 모르는 어떤 정보를 더 많이 알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계속 바꿉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 보다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단점 중에 하나가 일을 하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른 일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제가 성숙해지려면 한 가지 일을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주목회를 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널뛰기 하면서 목회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은퇴할 때 까지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에서 살겠다고 정했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중국에 가볼까? 새로운 곳에 가서 개척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단순하게 여기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평생의 공동체구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라고 정했습니다. 그 정함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단순함입니다.

어떤 때는 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10년 이상 만나서인지 이제는 지겨울 때도 있습니다. 매일 보는 사람 또 보고 매일 터지는 문제 또 터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지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무 미안하다고 하기에 그래서 매일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 같다고 스스로를 정죄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것처럼 죄도 똑같은 죄라고 생각하지 마시라고 날마다 새로운 죄라고 얘기했습니다. 어제 지은 죄와 오늘 지은 죄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는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도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고백하지 않고 숨겨두면 여전히 내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이 나를 향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 나를 깨끗하게 하셨는데 그 깨끗함이 나에게 오기 위해서는 내가 고백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죄가 있다고 고배하는 것입니다.

단순함은 절대적 신뢰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한테 고백했던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OOO권사님은 기도하실 때 하나님아버님이라고 하시는데 생각해보니까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버릇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까? 아버님이라고 해야지. 그런데 더 버릇없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두려우니까 가서 손 씻고 몸 씻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불러야 했고 함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아도나이, 주라고 하는 이름으로 다 바꿔서 불렀습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우리 아버지들 이름을 부를 때 O자 O자 O자 쓰신다고 했던 것처럼 여자 호자 와자라고 불러야하니까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 대신에 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아빠하나님, 나의 아빠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절대적 신뢰 그것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두 번째 어린아이는 수용합니다. 그냥 받아들입니다. 요즘은 아이들한테 차 조심하라는 말 보다 사람 조심하라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하도 세상이 험악하니까 차 보다 더 위험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인사하라고 해야 하는데 사람을 만나면 조심하라고 얘기해야하는 세상입니다. 특별히 친절한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실컷 주의를 듣고도 실제로 친절한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따라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수용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긍휼함이 있는 것입니다. 공감하고 수용하는 힘이 있습니다.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습니다. 금방 아빠한테 혼나고서도 재미있는 방송을 보면 바로 웃습니다. 그런데 크면 클수록 아빠한테 혼나면 두고 보자 복수하리라 생각하면서 재미있는 방송을 봐도 인상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주님은 인생의 처음과 끝을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지 다 알고계십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보고 우시고 배고픈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분이었습니다. 미국식으로 얘기하면 파티광이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지으신 별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가끔 예수님에 대한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는 목소리를 깔고 ‘얘들아, 이리 오너라.’ 하시는데 저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평범하게 얘기하시다가 갑자기 전화가 오면 육중한 목소리로 ‘할렐루야.’ 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깔아야지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속 겉 사람의 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오면 수용하지 못하고 계속 재고 있습니다. 재고 재다가 내가 정말 섬길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그때서야 받아들이는데 그 때는 이미 떠났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제가 아들하고 놀 때 가끔 속여먹습니다. 너무 피곤할 때는 시체놀이를 합니다. 시체놀이하자고 해놓고 저는 자면 아들도 가만히 누워서 시체놀이를 하다가 심심하니까 그만하자고 합니다. 아빠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따지고 묻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라고 들이대려고 합니다.

세 번째 어린아이는 부드럽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연약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온유는 힘을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온유합니다. 그리고 겸손합니다. 자기를 비움으로 모든 사람들을 채우려고 합니다. 예수의 마음,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부드럽습니다. 무엇인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인격적으로 하려고합니다.

네 번째 어린아이는 늘 즐겁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계수하지 않고 계량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너무 재미있어합니다. 저는 가끔 개콘을 보면 왜 웃어야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아이들은 너무 신나게 웃습니다. 주님이 늘 정치적이고 근엄하고 어른스럽기만 하시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주님 앞에 다가갈 수 없을 것입니다.

스가랴가 꿈을 꿨습니다. ‘성읍 거리에서 소년들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장난하는 평화와 기쁨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사야가 꿈을 꿉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으며 놀이하는 나라’ 스가랴의 환상과 이사야의 환상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즐겁고 기쁜 나라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게가 나를 힘들고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언제 가스실로 가고 언제 사형장으로 갈지 모르는 상항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어린 아들한테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그 수용소가 가장 즐거운 곳입니다. 아빠와 매일 같이 있고 사람들이 총을 들고 왔다갔다하니까 너무 재미있는 놀이터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쩌면 수용소와 같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인생은 고난이고 인생은 핍박이고 인생은 아픔이고 상처투성이지만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감싸주고 계시고 우리와 같이 놀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이 단순함 수용함 부드러움 즐거움이 살아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안에서 살아내고 누가 뭐라고 해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부자청년은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복잡함과 남을 수용하지 못하는 마음과 경직된 마음과 진지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가 돈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 물질 때문에 단순하게 살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물질 때문에 아무나 수용할 수 없고 경직되고 즐겁게 살 수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물질을 버리라고 얘기합니다. 청년은 근심하고 갑니다.

주님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부자가 그냥 부자가 아니라 마음 가장 밑바닥에 물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3절에서부터 31절까지 꿰뚫고 있는 말씀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예수그리스도 그 분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정말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근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늘 재미있으십니다. 그리고 늘 자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너무 근엄하셨다면 제가 목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너무 재미없게 살아야 했다면 아마도 목사 1년 하고 순교? 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자신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사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OOO장로님은 이 말씀을 듣고 중간에 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빠는 슈퍼맨
하나님아버지는 슈퍼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우리를 쉬지 않고 돌보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실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십니다.

아빠 어디가
아빠와 놀이하고 아빠와 즐기고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함께 나누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진지하게 기도만 하지 말고 하나님아버지와 함께 노셔야 합니다.

아빠를 부탁해
아빠가 아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 필요하신 분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계시듯이 하나님아버지도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사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아빠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아빠는 슈퍼맨이고 아빠와 어디를 가든 같이 즐길 수 있는 내가 되어야하고 아빠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내 생명 내 것을 천히 여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단의 기도>

우리가 귀신의 믿음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만날 수 있는
그런 관계의 사랑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믿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술이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와 실제로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그 실제의 사랑으로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을 꿈꾸고 계십니다.

사랑의 하나님
내가 주님과 함께 아빠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 됨을 믿고 살겠습니다.

2015. 3. 29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