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욥기 12:1-25, 마가복음 6:30-44)

욥은 오늘 우리에게 너무나 아픈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난의 상징이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우리가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저에게 욥기를 하지 말고 다른 복음을 설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욥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욥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이야기가 연일 이어지고 또 재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슬퍼할 힘도 없고 공감할 수 있는 여유도 없고 아픈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에 더 이상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 욥을 정말로 잘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욥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승리자가 되었고 욥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은 구약의 예수그리스도이고 또 욥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똑같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의 삶을 모르고 쫓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고 생각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예수님의 좌, 우편 권력의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정반대이셨고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강도와 같이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이야기하면 실패자였고 너무나 비참하게 저주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떤 복을 누릴 것인가 라고 하는 그 관점에서 보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복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고난의 길을 또는 욥의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복을 받은 사람이고 이미 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이미 우리들을 존재로 또 우리들의 삶을 인정하고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잘 믿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 또는 내가 성공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을 받는 자가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복을 나눠주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의 복을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되어라’가 아니고 ‘소금이 되어라’가 아니라 빛과 소금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높은 곳, 더 많은 것을 비출 수 있는 자리에 가는 것이 빛의 사명입니다. 내가 빛을 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빛이기 때문에 내가 어느 자리에 가야 더 잘 비출 수 있는 것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처소관입니다.

소금은 맛을 내야하는데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지만 소금이 소금의 맛을 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빛이 되기 위해서 소금이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소금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얘기하고 있고 소금이 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빛이 되기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복을 나눠주는 자로 빛을 비추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빛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을 달래거나 신의 모습으로 비유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별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맞추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그리스도로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고 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터만 잡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터 위에 하나님의 금과 은과 보석으로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도대체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이 욥의 이야기를 우리는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이 죽음 앞에 이 고통 가운데 살아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고 하나님이 그 길을 허락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편집한 저자의 의도에 의하면 사실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욥의 이야기는 빼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믿고 건강해야 되고 예수 믿고 부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 믿고 성공해야 된다고 생각해야하는데 예수 믿었더니 실패하고 예수 믿었더니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 되고 예수 믿었더니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삶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관점에 의하면 예수 믿으면 건강한 것이고 예수 믿으면 성공해야 되는 것인데 욥의 이야기는 도대체 그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그 분을 이해하지 않으면 욥의 이야기가 불편한 이야기가 되고 불편한 진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할 때 마다 내가 복이 있는지를 스스로 묻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건을 만나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내가 혹시 저주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물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와서 또 그것에 대해서 자각하게 만듭니다.

우리 교회 문틀을 누군가가 와서 찌그려 놓고 벽을 부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OOO목사님이 제가 무엇인가 원수진 일을 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와서 해코지를 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냥 벌어진 일인데 저를 해코지 하려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내가 무슨 죄가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을 막대한 적이 있었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하게 한 적이 있었나? 내가 다른 사람이 열 받게 했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제가 전에 축구를 하다가 공에 얼굴을 맞았는데 너무 아프니까 조상의 죄 때문인지 내 죄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내가 복 받은 사람인데 내가 복을 누리고 살아야 되는 사람인데 그리고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셨는데 공에 쎄게 한 대 맞으니까 순간적으로 누구의 죄인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옆에 누가 와서 조상의 죄 때문인지 내 죄 때문인지 살펴보라고 합니다.

욥도 똑같은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욥기를 다른 분들이 어떻게 설교했는지를 들어보니까 욥이 진짜 잘못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욥이 친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다 얘기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욥기 1장 1절에 보면 욥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고 죄를 멀리한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왜 욥은 애매한 고통 가운데 들어갔을까? 왜 저주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사단과 협상을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단 앞에서 욥이 대단하다고 자랑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단이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아 가면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욥은 마지막에 회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그 회개는 하나님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온전한 것 속에 계시다고 생각했는데 누추하고 정말 아무것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면서 저주 가운데 있다고 하는 그 삶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잘못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오신 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내가 무엇인가 하면 반드시 성공하게 하시고 반드시 승리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자기가 너무 목회를 열심히 해서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다 대고 안 갚아주실 수도 있다고 초를 쳤습니다. 가족을 잘 돌봐야지 하나님 앞에 다 맡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갚아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삶의 마지막에 계산하시는 것이지 육신으로 살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갚아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망한 자의 은혜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가난한 자의 은혜가 있습니다. 없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믿으면 건강하고 좋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한테 그렇게 얘기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시니까 폼 났습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16장에 가서 ‘나 이제 죽으러 간다.’ 라고 하십니다. 거기까지도 괜찮습니다. ‘너희도 죽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하셨다면 제자들이 예수님 쫓아다니다가는 죽을 텐데 뭐 하러 쫓아가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걸어가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오너라.’

저주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고통 가운데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서 좀 더 잘 살고 싶고 예수 믿고 다른 사람 보다 좀 더 괜찮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저주 가운데 그 상황 가운데 걸어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운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질질 끌려가는 사람과 고난 가운데서도 고통 가운데서도 기쁘고 즐겁게 감사하고 회개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차피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끌려갈 것인지 아니면 자원함으로 갈 것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욥이 소발에게 대답합니다.

첫 번째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개역개정에는 백성이라고 되어있지만 개역성경에 보면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라고 되어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이기 때문에 지혜를 알고 있고 명철을 알고 있고 교훈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7절부터 또 말씀하는 것은 지혜와 교훈과 명철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지만 원래 동물들도 이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움직이고 계시다고 하는 섭리사상입니다.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동물들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지혜와 명철과 교훈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나이가 든 사람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 그 방백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고귀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흩어놓을 것입니다.

욥이 얘기한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라고 하는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만 백성이 아니야. 나도 백성이야.’ 라는 의미이고 ‘네가 알 수 있는 것은 나도 알 수 있어.’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안에 욥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적어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어떻게 하나님이 일을 하실 것인지 지혜와 명철과 교훈을 알 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소발은 욥에게 하나님의 생각은 욥의 생각과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른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넘어 오면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비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은 배고프면 드셔야 되는 분입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울 수밖에 없습니다. 소발이 아는 하나님은 인간하고는 다른 하나님 인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 마음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욥도 맞다고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오늘 내 생각과 내 마음 가운데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느냐고 묻습니다. 에코 넣은 음성으로 들리느냐고 물어봅니다. 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궁금합니다. 임마누엘하신 하나님이 오늘 내 마음 가운데 내 생각 가운데 좌정하여 주셔서 오늘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신론자가 우주에 올라가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올라가 봤더니 하나님이 안계시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우주에 올라가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여기에도 계시네.’ 라고 얘기합니다. 늘 하늘이라고 하는 또 다른 차원에서 또 다른 공간 속에서 어떤 존재가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은 나하고 상관없는 하나님 아니 마음대로 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구약의 개념이었다면 오늘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체휼하십니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공감하십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또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세대 가운데 그들과 같이 울고 같이 춤출 수 있는 주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욥이 ‘너희만 하나님의 백성이로구나.’ 라고 하는 그 속에 숨겨진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오늘 우리에게 오셨고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지혜와 명철과 교훈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누가 맞는지 물어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말이 백프로 맞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끔 목사님들하고 얘기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면 ‘네가 하나님이냐?’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더 높은 지혜가 있고 너무나 고상하고 거룩해서 그 하나님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할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100이라면 우리는 1정도 밖에 안 된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사람의 생각과 마음 가운데 법을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안에 좌정하였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내 몸을 불의의 병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의의 병기로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연수가 70이나 80이고 120년 사는 그 짧은 인생 속에서 이제는 영원한 시간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시간으로 확장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오늘 고통당하고 내가 슬퍼하고 내가 있는 그 상황이 더럽고 추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리로 삼으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가장 구질구질한 삶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낮아지고 또 낮아진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가장 거룩한 인생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남자는 단순해서 좋다 싫다 표현이 분명한데 여자들은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화요일 성경공부 모임에서 어떤 분이 남편 흉을 보는데 전부 제 얘기 같았습니다. 냉장고에 가서 뭘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냉장고 문을 열고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못 보고 계속 어디 있느냐고 묻고 또 기껏 찾아서 들고 오는데 바닥에 줄줄 흘리면서 들고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남편이라고 정말 눈이 비뚤어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평소에 제가 많이 듣던 얘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자가 이해가 안 됩니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싫은 것 같기도 하고 어제는 분명히 좋았는데 오늘은 왜 싫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면서 미묘하고 복잡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전혀 미묘하고 복잡하질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도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나도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가 되자고 하십니다. 오늘 내 생각과 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라고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욥이 이야기합니다. ‘너만 하나님의 사람이냐? 너만 하나님의 백성이냐? 나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에도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오병이어의 사건에는 마태복음과는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막 6:34)’

주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단이 와서 temptation유혹을 했습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기적 가운데서 살아날 수 있다고 합니다.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사단에게 절을 하면 모든 부귀와 존귀함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 배고파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기적을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는 돌봄이 필요한 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돌봐야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한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랑을 채워주신 하나님으로 인해 사랑이 필요한 자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바라봐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분 사명을 맡은 자로써 이제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은 것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나누고 베풀고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남 주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남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더 먹고 더 마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난 가운데 들어가서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눈으로 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소발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면 아니 제대로 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목자 없는 양 같은 욥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답이 너무 빠릅니다. 제가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 이유가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시간은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겨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릎이 닿기도 전에 다 아니까 기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된 것을 통해서 같은 고통 가운데 같은 슬픔 가운데 같은 저주 가운데 들어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누군가가 자극을 주면 앎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요동을 칩니다. 우리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생명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나누어 주는 떡의 인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배고픔을 배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적이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기적이 매일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하나님 앞에 돈 기도를 많이 합니다. 기도할 때 마다 다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기적은 생명을 위해 베푸는 것이지 능력이 드러나게 하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욕심과 내 정욕에 의한 비교와 경쟁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써 먹지 말라고 하고 계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지고 축사하고 떼고 나눠주는 떡의 인생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진바 되었고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자이기 때문에 상처 받고 아파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받은 것을 나눠주는 그 떡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오천 명이 축복 가운데 배부름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생명 오천 명이 있습니다. 내가 채워야 될 열 두 바구니가 있습니다. 그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풍성하고 부요하고 존귀한 것들을 나눠주는 우리들의 인생이 되기를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두 번째 아담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시는
생명의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를 인간의 모습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마음을 열어 놓으시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서
사랑하시고 내어주시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과 부리는 영들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
사람을 위한 존재
만물을 위한 존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노라고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케 하시는 능력으로 살겠노라고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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