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욥기 15: 17-35, 요한복음 3:16-21)

기독교의 신앙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영원히 살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뱃속에 있던 열 달의 태생과 60이나 70 또 강건하면 80년 연수가 120년인 인생이 있습니다. 그 인생이 끝나면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소리가 들려서 거듭나는 인생의 변화가 내 삶의 전환이 있게 되면 우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 이미 부활이 내 몸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본향이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여기에서 승부를 보는 인생이 아니고, 나그네와 같이 이곳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우리의 본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이코스, 하나님이 거주하는 집, 하나님의 뜻으로 만든 가족, 하나님의 공간과 장소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집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집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 삼마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 곳이 하나님의 삼마,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볼 때는 금과 은과 보석이 깔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허름한 그 곳도 여호와가 통치하고 있다면 여호와 삼마라고 하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여섯 가지의 재료가 있습니다.
풀과 나무와 짚, 금과 은과 보석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짓고 있는 하나님의 집은 반드시 불을 통과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의 집은 풀과 나무와 짚과 금과 은과 보석이라고 하는 재료를 가지고 짓는데 그 집은 반드시 불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고 하나님은 그곳을 화엄검으로 막아놓으셨는데 그 화엄검을 통과해야지만 영원한 에덴동산,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 장인어른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을 다녀오셨다고 간증을 하셨는데 어떤 사람의 집은 커다랗고 어떤 사람의 집은 조그맣고 어떤 사람은 개털 모자를 쓰고 홈리스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있어야 되고 그 재료가 불을 통과하는 재료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옛 구약시대 사람들은 가나안땅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또는 예루살렘성전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삼마, 바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황폐하고 너무나 어둡다면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시면 황폐하고 어두운 곳이라고 할지라도 그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곤경과 환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있는 그 천국을 누리고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 곳에 있습니까?
내 마음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환란과 곤경 속에서 흐트러질 수밖에 없고 너무나 가벼운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지어진 내 마음의 집은 아닌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서 철이 철을 더 날카롭게 하듯이 정금과 같이 되어 나올 수 있는 마음인지를 보고 있어야 합니다.

환란을 만나면, 곤경을 만나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란과 곤경을 만나면 마음이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집인 것처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육신에 끌려가고 상황과 사건에 끌려가고 사람의 감정에 자신의 것을 다 빼앗기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그 집에 귀신이 옵니다. 내가 그 마음의 주인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국에는 다른 가치, 다른 어떤 것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살고 있습니다. 허탄한 말을 하고 망상에 빠지고 도대체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두 번째로 욥을 비난합니다.
17절에서 27절 말씀에 보면 악인은 반드시 내적 고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염려와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8절에서 35절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악인의 미래는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 곳은 어두운 곳이고 불꽃이고 입김 가운데 누구도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자식도 없을 것이고 단명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다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여호와 삼마와 같이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이 또 불을 통과하는 것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책임을 추궁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복음의 말씀이 우리가 어린아이 때 외웠던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 말씀을 외우느냐 안 외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3장 16절 보다 17절이 더 중요합니다. 이 말씀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왜 독생자를 주셨고 왜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3장 16절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을 얘기합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는 하나님, 나와 아무 상관없이 하늘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하나님,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잘 보여야 하고 대들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아버지하나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좋은 것, 가장 필요한 것, 가장 근본적인 것들을 주시고자 하는 분이십니다. 유대교가 생각했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아바아버지로 오셨습니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눈을 감으십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식을 위해서 새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온 동네사람들을 다 불러서 뭔가 이룬 것처럼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 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황폐한 곳에 어두운 곳에 불타서 재만 남아있는 그 곳에 파괴되고 내용도 없고 아무 흔적도 없는 그 곳에 하나님아버지가 오셔서 질서를 잡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빛이라고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오늘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복잡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독단적이거나 자기 멋대로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파하시고 슬퍼하시고 함께 기뻐하시고 함께 즐거워하시는 인격적인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메르스에 대한 글들을 보면 메르스가 하나님이 주신 심판에 대한 경고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성연애자들이 하기로 한 축제를 막기 위해서 메르스에 감염되게 하셨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어떤 법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메르스를 주셨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엘리바스가 하는 말 같았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불편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메르스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의 감정은 무디고 특별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심판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너무나 냉정하게 또 엘리바스처럼 내가 의인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지 않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아래에서 누군가를 계속 정죄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일 것입니다. 메르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편한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3:16)’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은 심판하려고 연구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처럼’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여전히 현재에 또 앞으로 영원히 사랑하셨고 하시고 있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둠이고 이 세상은 혼돈이고 이 세상은 공허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있기에 하나님은 세상을 품고 계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운행하시니라’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집’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까 세 가지의 집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기억하는 집입니다.
내가 살았던 가장 좋은 집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충북 음성에서 살았는데 마당에 펌프도 있고 포도나무도 있었습니다. 포도열매를 따먹는 것이 정말 낙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집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길이 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살고 있는 현재의 집입니다.
현대인들은 그 집이 재산이라고 생각하지만 원래 집은 내 삶의 흔적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추억의 장소입니다. 그 장소에 내 마음이 들어있고 하나하나 모든 것들이 추억 속에 담길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살고 싶은 미래의 집입니다.
저는 가끔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가 집들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많은 집들 중에 왜 내가 주인인 집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도 꿈꾸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공유공간이 있고 거기에 개인의 공간도 마련되는 공동생활주택을 꿈꾸고 있습니다. 신앙에도 똑같이 자신이 기억하는 집이 있을 것이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있을 것이고 내가 살아야 될 영원한 집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이 집짓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엘리바스가 얘기합니다.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 악인은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그 곳에 하나님이 사시면 됩니다. 여호와 삼마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그 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조차도 하나님은 수면위에 운행하듯이 안고 계십니다. 그 안에 내 자녀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마음의 집을 지으면서 세 가지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갈 사람입니다. 하늘의 것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치를 가지고 살고 은혜를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이 여기가 아닙니다. 영과 육이 합일이 되는 영원한 세상에서 살아야 될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기억 속에 흔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집을 짓는 사람이라면 빛과 진리의 운행하심의 흔적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공감이고 그것이 체휼이고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는 뱀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을 하셨는지 흔적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영원한 집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에 초대받은 우리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면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 살다보니까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주인이 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혼돈이고 공허하고 흑암입니다. 이 속에서 기억과 흔적과 영원한 것을 품어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세상은 우리에게 들으라고 말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쉐마와 같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망할 것이고
악인의 미래는 심판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악인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자녀 삼으셨습니다.

황폐한 곳에 어두운 곳에
불타서 재만 남아있는 그 곳에
다시 하나님의 집을 짓겠노라고
우리의 마음을 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묵상하고 살겠습니다.

2015.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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