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위로와 기쁨 (욥기 6:1-13, 빌립보서 1:19-26)

사람들은 낙심할 때 복을 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저주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언제 기대와 소망을 갖느냐 하면 그 기대와 소망이 끝났을 때 진짜 기대와 소망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끝나야지 하나님의 열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려고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기대와 소망이 아니라 우리에게 원망과 불평으로 올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욥이 고백합니다. 아무 힘도 없다고. 모든 것을 다 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러면서 결론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할찌라도(10절)’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 기대가 없습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해보려고 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괴로움을 달아보니까 바닷가에 있는 모래의 무게 보다 더 무겁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저주스러운 고통 가운데 있는데 그러할찌라도 위로와 기쁨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통과 정말 큰 아픔이 있고 해결할 수 없는 동, 서, 남, 북 사방에 우겨쌈이 있다고 할지라도 진짜 위로와 진짜 기쁨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오늘 욥의 이 고백이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진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욥기 강해설교를 한다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요즘 교통사고도 나고 경찰서에도 두 번씩이나 끌려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제가 욥기 설교를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인생 살면서 경찰서에 두 번씩이나 가고 사고도 두 번씩이나 난 적은 처음이라고 저에게 욥기를 빨리 끝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육십년을 사셨는데 겨우 경찰서에 두 번 밖에 안 끌려가신 걸 보면 목사님이 정말 편하게 사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과 그 아픔 가운데 있으면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을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해서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할 정도로 그 아픔과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진 것 같은 그 고통 가운데 있는데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능하면 그런 고통은 피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가능하면 그 일이 내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가능하면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외국에서 살아보니까 제2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얼굴 자체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멸시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이민 간다면 말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외국에 나가서 아주 잘 사는 사람들도 있고 한국인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사람은 많이 나가고 아는 사람은 안 갔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고생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우리가 늘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위로하고 기쁨을 주는 것을 주저합니다.

몇 달 전에 세월호 유가족이 동네에 와서 모여서 위로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절에 다니는데 스님이 좋은 데 갔으니까 잊어버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 자체가 위로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모임이 다 끝날 때쯤 저보고 한 말씀 하라고 하는데 도저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인가 하기도 어렵고 또 우리는 늘 고통 가운데서 떠나기를 원하고 있고 그런 일은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인생은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통과 고난을 어떻게 뚫고 지나갈 수 있을까? 욥기 6장 10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6:10)’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역이라는 것은 복종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현대는 복종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렸습니다. 복종하라고 하면 ‘왜?’하고 반문합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서 늘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어른들의 말씀을 따라가는 인생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복종하라면 ‘왜?’ 합니다. 정신과 의사 스캇펫 박사가 쓴 책에 있는 내용 중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신병리학 중에 하나가 나르시즘이라고 했습니다.

나르시즘의 특징 중에 하나가 복종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어떤 기준에 대해서, 어떤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지 않습니다. 악합니다.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거역으로 나타나고 힘이 없는 사람은 수동적인 반항으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얘기하는데 힘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는 못하겠으니까 계속 수동적인 공격을 합니다.

두 번째는 자기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문제가 없는데 저 사람, 저 것 때문에 모든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의 전가를 합니다. 탓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얘기합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고 한 사람이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그 복종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야말로 무한책임을 말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는데 노아의 방주를 타고 없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12월 14일에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답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입니다. 예언하고 방언하는 그 전도사가 동영상으로 12가지인가 14가지인가 메시지를 전하면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50명은 태국에 가 있습니다. 정말 기독교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 교인들입니다. 주어도 동사도 목적어도 다 하나님이고 다 믿음이 좋습니다. 엄마가 없어지고 자녀가 없어지고 미국으로 가고 태국으로 가고 필리핀으로 가고 다 갔습니다. 지금 가정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다 불뿔히 흩어져서 돌아오지 않는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인터뷰를 하는데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자신은 모른다고 합니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기독교야말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책임인데 책임지지 않으려고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전쟁 나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서 여기에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도망간다고 100년을 살까요? 그 전도사가 부흥회를 했던 교회를 찾아갔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신의 탓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 나르시즘입니다. 자기는 잘 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는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로와 기쁨도 너무나 세상적인 위로와 기쁨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로와 기쁨도 뭔가 하나 더 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용서하는 것처럼 위로 받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줄 것 하나 더 주지 않고 오히려 빼면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얼마나 살겠다고 비행기 타고 도망을 가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내린 결론은 그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면서까지 왜 도망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해보니까 한국사회가 못 믿을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한국이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제가 10년 전에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에 왜 가느냐고 했습니다. 곧 전쟁이 날 것 같은데 왜 들어가느냐고들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내면 아주 깊은 곳에 불안이 있습니다. 원망이 있고 염려가 있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 받고 기뻐하기 위해서 한국을 떠나서 살려고 합니다. 욥은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위로와 기쁨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빌립보서 1장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감옥에 있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말합니다. 상황이 원망스럽고 불평을 할 수밖에 없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죽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죽음도 유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2천 년 전에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 자체도 죽음이 아니라고 죽어도 유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데 무엇으로 택하든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2절)’

죽어도 괜찮은데 어떻게 살아야 될지 사실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다.’

죽음과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육신과 육신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 속에 끼어있는 삶인데 자신도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함이라(빌 1:24)’

두 가지 유익함이 있습니다. 죽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런데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빨리 죽고 싶다고 빨리 가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진짜 위로와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괜찮고 육신으로 사는 것도 괜찮은데 어떤 것으로 살든지 그 안에 진짜 위로와 진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욥은 ‘내 안에 말씀의 복종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다시 물으셔야 합니다. 내가 정말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위로와 기쁨이라는 이 고백 가운데 있는 것은 오늘 나에게 죽는 것조차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실패해도 유익합니다. 지는 것도 유익한 것이고 망한 것도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고 이기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구청장님하고 회의가 있어서 구청에 갔었는데 구청 과장님이 커피를 마시다가 우리 동네에 신라면집, 신라가 있고 또 고구려도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잘 들어보니까 홍순애권사님이 하시는 고구려 같아서 고구려의 의미를 얘기해줬습니다. 구려가 아름답다는 뜻인데 ‘고’자가 높을 고자여서 지극히 아름다운 뜻이라고 성경에 보면 지극히 아름다운 곳이 시온인데 그 시온에는 계수하고 계산하고 계량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고구려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시온과 같이 이 동작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산하지 말고 계수하지 말고 계량하지 말고 고구마를 먹이겠다고 생각하고 장사를 하시라고 했다고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정말 좋은 의미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청에서 나오는 잡지에 기업을 소개하는 코너에 고구려이야기를 싣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고구려도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시온성은 계수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계량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위로와 기쁨은 정말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계량하지 않고 계수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다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무엇인가에 기뻐하고 있고 무엇인가에 내 기쁨을 빼앗길 수 있습니까? 욥은 피부병 때문에 몸을 긁으면서 사람들에게 별소리를 다 들으면서 말씀 안에 서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 안에 계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내면에 있는 예수그리스도 그 분의 참된 위로와 참된 기쁨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내가 부하든 흥하든 가난하든 망하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는 비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강이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욥의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 위로와 기쁨의 신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서운하게 했다고 해서 죽을 것처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500시간 기도하기로 했는데 500시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40일 작정기도를 했는데 마지막 날 일어나서 39일 밖에 못 채웠다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기뻐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500시간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서 정말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위로와 기쁨이 우리 가운데 충만해지는 것이 진짜 목적인 것입니다. 저도 500시간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제 아내가 제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그냥 말씀만 펼치면 바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도 틀리지 않은데 사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무릎 좀 꿇어보라고 하셔서 그 말씀에 복종하기로 했습니다. 요즘 저희 교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황윤정집사님이 새벽에 나오시는 것도 제가 한 시간씩 기도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한 시간을 채우는 것은 저에게는 열 시간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을 눈빛만 봐도 알겠는데 계속 어떤 때는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합니다. 하나님도 지겨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물러 있는 시간을 갖다보니까 예전 보다 하나님하고 더 친해진 느낌이 있습니다.

올해 표어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한 번 해 보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또 다른 열매를 주실 것에 대해 기대하고 소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유익하다고 하는 위로와 기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이 얘기합니다. 내가 죽는 것이 유익하다 그런데 내가 사는 것도 더 유익하다. 모든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로와 기쁨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감사와 영원히 꺼지지 않는 감격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감동이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울려 퍼지기를 그래서 그 위로와 기쁨 때문에 오늘 고통의 이 문제를 딛고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참된 위로와 기쁨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변화무쌍한 것이고
날마다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과 위로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이 1초에 여덟 번씩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변화무쌍하게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위로와 기쁨은
말씀으로부터
내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깊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기를
하나님의 깊은 사랑 가운데
내가 머물러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을
경험했던 것처럼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넓고 깊고 높고 충만한 그 사랑 가운데 임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그렇게 살겠노라고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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