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위로자(욥기 16:1-5, 고린도후서 1:3-11)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 목적, 그 뜻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획이고 경륜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하나님을 세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셨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던 또 부활하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인격적인 관계로써의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의 주제와 같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3절부터 11절까지 ‘위로’라는 단어가 열 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 위로하심, 위로가 고린도후서 1장의 아주 중요한 주제어입니다. 위로하심은 하나님의 치유하심, 하나님의 고치심, 상처를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로는 영어로는 파라클레시스라는 말인데 도와주고 위로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라클레스토스(paraclétus)는 사람으로 말하면 보혜사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로하는 자, 도와주는 자입니다.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개념 중에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치유하시는 도와주시는 또는 위로하시는 그 하나님의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살리신 영과 살린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령은 실체가 없습니다. 성경은 실체가 없는 성령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같은 성령, 단비와 같은 성령, 바람과 같은 성령, 비둘기 같은 성령, 기름 부으신 성령입니다. 성령의 사역 하나 하나를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죽었던 영혼이 또 식었던 열정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고 가뭄이 든 것처럼 내 마음이 갈아지고 찢어지고 그래서 인색하고 아무에게도 무엇인가 줄 수 없는 내 마음의 상태일 때에 단비와 같은 성령이 내게 오시면 풍성하게하고 나누게 하고 부요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내가 어떤 것에 매어있거나 무엇 때문에 공포와 불안 가운데 있을 때에 바람과 같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나를 온전케 하고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무례하고 어떻게 보면 무지하고 또 교만했던 마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오시면 내 마음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름 부으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내가 죄 가운데 허우적거리고 그 죄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에 분별과 판단과 육신의 힘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치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나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종교는 계속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수련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계속 사람의 행위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신앙은 내 마음의 상태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으면 치유케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지 않으면 결단코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 무엇인가 찾으려고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위로’라는 이 말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말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위로하지 않는 사회,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는 사회, 누군가를 위로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무엇인가 빨리 결정하고 빨리 판단하고 빨리 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것을 선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내가 빨리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빼앗길 것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며느리가 시댁에 들어가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봉사 3년으로 살아야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 당시 시간의 개념은 3년 정도 해야지 조금 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30분이면 다 압니다. 3시간이면 다 압니다. 그래서 빨리 판단합니다. 우리는 1년이라는 시간도 참을 수 없습니다. 부천에서 성경공부 할 때 시편은 한 5년 정도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매 주 해도 만 3년은 걸릴 텐데 방학도 하고 중간이 일이 있으면 쉬기도 할 테니까 5년 정도 할 거라고 했습니다. 정말 5년 동안 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5년을 어떻게 계획하고 사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판단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빨리 가고 있는 것이냐 하면 아닙니다. 어쩌면 빠른 판단을 하고 있고 빨리빨리 선택을 하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인생을 뒤돌아보면 겨우 한 발자국 간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빨리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도 척 보면 바로 판단합니다.

제가 기도를 잘 안 하는 이유가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벌써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니까 그런 것이라고 누군가가 얘기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딱 보고서 판단합니다. 우리 편, 남의 편 바로 가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 잘 못하는 사람 나눕니다. 나에게 필요한 사람,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 가릅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위로하지 못할까를 보니까 거기에 자신이 없습니다. 다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 내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해야 하는데 비난을 하게 되고 위로를 한다고 하는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세월호에 대해 얘기할 때 선장을 탓하지만 어쩌면 그 선장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인데 나의 모습인데 21세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국 땅에서 이 시대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실 텐데 우리는 나를 뺀 상태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문제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유체이탈 화법을 씁니다. 그 문제 속에 내가 빠져있고 남의 탓만 하고 삽니다. 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것도 안 되면 보이지 않는 조상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문제청소년의 부모님들이 담임선생님한테 상담하러 가면 대부분 자기 아이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얘기합니다. 친구는 끼리끼리 친구합니다. 끼리끼리 노는 것입니다. T.V 프로그램에서 장OO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목사들도 탁고 치는 목사들은 탁무만 치고 테니스 치는 목사들은 모여서 테니스만 치고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만 하고 말씀공부 하는 목사들은 말씀공부만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들도 끼리끼리 놀더라는 것입니다. 친구도 끼리끼리 노는 것입니다.

책임지지 않고 늘 방관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문제입니다. 그 대통령 내가 뽑았습니다. 내가 안 뽑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뽑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책임지지 않는 상태에서 계속 비난하고 누군가를 탓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은 종의 모습입니다. 책임자가 없습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가 머리이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몸의 지체로써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교회 주인은 나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교회의 모습입니다. 영사기모임에서 한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쿼바디스>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큰 교회 문제다, 한국교회 문제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부끄럽지만 그 모습 하나 하나에 저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분명하게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책임져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비판하는 것도 쉽습니다.

제가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어느 조직에 들어가거나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면 바로 문제들이 보입니다. 그걸 얘기하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 곳의 주인이 아닙니다.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 나도 있습니다. 큰 자가 위로자가 될 수 있고 책임지고 있는 자가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위로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려줘야 하는데 세상은 너무나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이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비의 아버지가 내 마음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위로의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이, 성령의 하나님이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16장에 보면 욥이 엘리바스에게 두 번째 답을 합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재난을 주는 위로라고 이야기합니다. 위로자는 원래 치유하고 기다려주고 보듬어주는 사람인데 재난을 주는 위로라는 것입니다. 위로라는 틀은 가지고 있지만 내용은 저주이고 비난이고 오히려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는 헛된 말을 합니다. 말 자체에 내용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이 없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데 7%의 효과 밖에 없다고 합니다. 93%는 몸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4절)’ 위로를 한다고 하고 있는 엘리바스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안 된다고 너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개를 흔들고 있는 그 모습이 부정하고 멸시하고 조소하고 비웃는 것을 그대로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욥이 느끼고 있는 엘리바스의 위로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생명을 주는 위로를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부터 11절까지의 논리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이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위로의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서 위로하겠다는 말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위로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청해서 고난의 현장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들어가셔서 본인도 그 고난 가운데 계십니다. 그랬더니 믿은 우리가 그 고난 받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면서 나와 똑같이 고난당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위로로 말미암아 내 고난이 내 슬픔이 치유되고 이제 위로 받고 치유 받은 우리가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는 너희를 위해서 그 고난 가운데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고난은 너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 위로하심을 통해서 너희도 누군가의 위로자가 되기 위해 누군가의 고난의 현장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로를 늘 객관화해서 또 무엇인가 내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 속에서 위로하고 있지만 그것은 헛된 것이고 말할 때 마다 그것이 상처와 재난, 아픔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모습은 체휼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같이 느끼고 같이 경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픔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 고난의 현장에 자청해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그리스도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내어줄 때 마다 성령께서 나에게 주시는 능력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하나가 20세기의 최고의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통곡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들려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랍비가 엘리야에게 찾아와서 메시야가 언제쯤 올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야가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는 성문 밖에 이미 오셨다고 얘기했습니다.

성문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누가 메시야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성문 밖에는 죽을병에 걸린 자들과 성문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파서 모두 붕대를 싸매고 있는데 그 사람들 중에 자기 붕대를 풀어서 다른 사람을 싸매주고 있는 사람이 바로 메시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메시야도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붕대를 풀어서 자기의 아픔과 자기의 상처와 숨기고 싶은 어떤 것을 드러내고 붕대를 풀어 누군가를 싸매주고 있는 사람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보듬어주고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예전에 사업을 해서 네 번을 망한 집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에게 망한 자의 치유자로 하나님이 쓰실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한 번 사업에 망해서 죽을 것 같다고 세상 끝났다고 하는 사람한테 가서 네 번 망한 이야기를 해주라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아픔이고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숨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그 상처가 그 과거가 또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소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 수고와 슬픔입니다. 결론은 이미 났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와 슬픔 안에 하나님은 나를 누군가를 구원케하시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치유자의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생명의 치유자 상처 입은 치유자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 첫 번째는 돕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

성령의 사역은 우리를 날마다 깨우쳐주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체휼하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데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해서 돕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 중에 백수였던 사람이 많습니다. 공자도 예수님도 소크라테스도 백수였습니다. 정직원으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백수가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네 번 망해서 없음이 한 번, 두 번, 세 번 망한 자에게 살아있는 소망이 됩니다. 나 때문에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나에게 맡겨진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너무 멀리 있는 아프리카사람들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정말 많이 걱정되면 아프리카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맡겨진 지극히 작은 자들, 이 시대에 함께 아파해야할 사람들을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특별히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는 개신교인은 항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존의 질서에 항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기존의 질서에 항거하는 삶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삶입니다. 소수를 존중하고 소수가 중요하다고 말해 주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쿼바디스>에 보면 큰 교회에 치어서 작은 교회 사람들이 설 자리를 잡지 못하니까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은 돈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영광의 자리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을 볼 수 없는 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내 마음을 자꾸 주님 앞에 내려놓고 씻김 받고 하나님의 불을 경험하고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착한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안 다녀도 열심히 봉사하며 사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이 되기를 원합니다. 착한 일을 해서 내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나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말씀을 나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오신 전도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시카고에 있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셨던 분입니다. 한 목사님이 그 전도사님한테 그 곳에서 5년 동안 스텝으로 일을 하셨으니까 한국에서 교회 성장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세미나를 해 달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전도사님이 프로그램은 별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순히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성연애이든 어떤 것이든 남의 부정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판단하는데 오늘 내가 정말 정직하게 살고 있는지는 다시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참된 위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위로자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 나를 집어넣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빠져있는 위로는 위로가 아닙니다.

세월호사건 때 자녀를 잃은 가족이 우리 마을에 왔는데 그 분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자식이 죽은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니까 스님이 너무나 쉽게 잊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절에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갑자기 저한테 한 마디 하시라고 하는데 정말 해줄 말이 없었습니다. 잊으라고 얘기할 수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남이 당하는 고난에서 내가 빠져 있으면 우리는 계속 가르치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 내가 있습니다. 그 아픔 가운데 나를 적용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새김질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말씀을 남에게 먹이는 꼴이 됩니다. 소와 양이 새김질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변이 생명을 살리는 거름이 되고 새김질하지 않는 동물의 변은 거름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적용하며 살아야 하고 새김질 하며 살아야 하고 진리에 대해서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위로자의 삶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위로자의 삶을 살라는 사명을 받았는데 생명을 주는 위로자 상처 입은 치유자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재난을 주는 위로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말씀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상처 입은 치유자의 삶으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고난 받는 사람들의 위로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라고
상처와 고난과 환란과 없음과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
고난을 자처하고 들어가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우리도 그 고난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삶으로 살아내겠다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성령이 마음을 주시면
아멘으로 동의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주님 앞에 내 입술을 벌려서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2015.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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