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지혜의 오묘함(욥기 11:1-20, 갈라디아서 5:16-24)

하나님과 사단의 합의를 통해서 사단에게 놀아나고 있는 욥의 모습을 보는데 욥은 친구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단하고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욥의 진짜 적은 세 친구가 아니라 사단인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욥은 사단과 싸우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질문에 대해서 욥의 관심은 사단에게 있지 않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단을 이기기 위해서 더 큰 사단의 논리를 가지고 싸워야 되는데 그 논리가 결국에는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늘 지는 사람은 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쓰고 있는 수법 보다 더 큰 수법을 사용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을 뿌려서 선거를 하는 사람들을 이기려면 더 많은 돈을 줘야 된다고 하는 것이 사단의 논리이고 사단을 이기는 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단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에 500만 원을 줬다 1000만 원을 줬다가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찾고자하고 또 그것이 어쩌면 손해라고 할지라도 그 방법을 사용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에 보면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하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이라고 하는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수도사가 열심히 수도를 하고 있는데 계속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는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투덜거리느라 기도를 못했다고 합니다.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아니 내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때문에 나머지를 포기하고 절망하느라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것들을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급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교회 한 구석에 귀신이 있어서 귀신을 물리치는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귀신을 내쫓고 자기가 승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박한 기도는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한 가지에 잡혀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왔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면서 저들은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라는 그 생각에만 빠져버렸다면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는 것이 사단이 쓰고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진리의 허리띠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의의 흉배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있는지 또 믿음의 방패가 있는지 구원의 투구가 있는지 또 성경의 검, 말씀으로 이기고 있는지를 봐야 되는데 그 파리 때문에 그 귀신 때문에 누구 때문에 내가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서 있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고 그것 때문에 어려워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죽을 맛인데 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관심 없습니다. 현재의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곤고한 상황에 빠져있기 때문에 빨리 빠져나가야하는 내 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계속 다른 음성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도록 계속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고 우리의 손과 발이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계속 다른 일로 분주하게 만듭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곤고한 것이고 우리에게 절망스러운 것입니다.

일요일이면 쉬어야지 왜 교회 가서 고생을 하느냐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오늘 이 시각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똑같이 사단의 전략에 사단의 것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고 계십니까? 그것 들으셔야 하고 그거 보셔야 합니다. 목사가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매일매일 사단의 전략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내가 거룩하게 살고 싶습니다. 소발의 훈계가 그렇습니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 그래서 스스로 죄 없다고 결백을 주장한 것처럼 보이는 욥이 자기도 고난으로 슬프다고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자기도 절망가운데 있고 슬프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구하고 있는 욥에게 소발은 네가 흠이 없다고? 네가 머리가 좋다고? 네가 죄가 없다고? 지금 벌 받고 있는데? 네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에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가당치않다는 것입니다.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욥이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분별력 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에서 들나귀 새끼 같다고 얘기합니다. 기준이 없고 너무나 연약한 새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너무나 연약하지만 자기가 다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욥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회개할 것인지 고집을 부릴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마음의 자세와 행실을 고쳐야 하고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기만 하면 소망과 안식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고집할 경우 눈이 어두워 도망칠 길마저 찾지 못하고 쓸쓸히 죽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발의 이 논리 안에서 소발의 훈계 안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분별력 안에서 누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소발은 그 당시에 너무나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로힘하나님, 여호와하나님, 창조주하나님과 지금 나와함께 계시는 여호와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는 그 창조 안에 우리는 그 섭리 가운데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하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계셔서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나와 함께 슬퍼하시고 나와 함께 그 속에 계시면서 긍휼로 은혜로 사랑으로 덮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어떻게 감당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지혜를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격에 부어주셨다는 또 다른 오묘함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2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소발이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알라라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부처라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신이라고 얘기하는 그 앞에서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옳은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성령의 지혜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지혜는 신비의 세계에서 붕붕 날아다니는 지혜가 아니라 높이가 깊이가 길이가 넓이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깊이를 알고 하나님의 높이를 경험하면 사람이 천사가 되고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뭘 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아.’ ‘저 사람은 뭘 해도 초월한 것처럼 보여.’ 신비이고 도인입니다. 하나님의 그 신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을 경험한 사람은 대단한 도인처럼 보여야 되는 것일까요?

제가 한동안 한복을 입고 싶었습니다. 평생 한복을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한복을 입으면 도인처럼 보이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한복이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키도 너무 크고 얼굴도 너무 작고 머리도 곱슬이라 한복을 입으면 이상할 것 같다고들 합니다. 고무신을 신고 머리를 밀고 도인처럼 보이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머리를 아예 밀거나 반대로 머리를 기르는 것이 세상과 분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지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혜가 성령의 지혜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다 인격입니다. ‘저 사람 참 기쁨이 있네.’ ‘저 사람 참 누군가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이네.’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높이와 하나님의 깊이와 하나님의 길이와 하나님의 넓이라고 생각하면 붕붕 날아야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그 신비가 오늘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인격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공중부양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람 뒤에 귀신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서 무엇을 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인격이 변했느냐,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가 우리의 몸으로 삶으로 보이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비의 역사화라고 생각합니다. 신비가 오늘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육신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생명을 위해서 어떤 때는 징계하고 어떤 때는 권면하고 어떤 때는 참아주시고 어떤 때는 기다리시는 육체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그것이 진짜 영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단하고 협상을 하셨고 왜 사단은 친구들을 붙여주고 왜 그 사건과 상황과 그 사람을 붙여주었을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관계입니다. 내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것은 사실은 한 가지입니다. 원래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아홉 가지가 그 때 그 때 마다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을 다 가봤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하는데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절제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도인처럼 살지 않습니다. 절제합니다. 자기 스스로 다 아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절제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절제입니다. 생명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욥은 소발의 훈계를 들으면서 또 다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있는데 소발은 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욥을 공격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욥을 공감하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욥이 왜 그렇게 됐을까를 생각해봤는데 단순하게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봤다는 것이 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욥에게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성령의 열매는 세 친구였고 그의 아내였고 그의 공동체의 회복이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봤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놀라운 3차원적이고 4차원적인 또 다른 차원의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은 결국에는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구박하고 죽으라고 했던 그 아내가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합니까? 나의 거룩함 때문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신비한 체험이 필요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구원의 통로로 내가 쓰임받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 내쫓았다고 내가 어떤 일을 대단하게 감당했다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 없으십니다.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다. 귀신을 내쫓고 권능을 일으키고 무엇을 한다할지라도 내가 도대체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관심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신비의 세계가 있습니다.
상황이 왜 그렇게 벌어졌는지, 왜 사건이 그렇게 일어났는지, 왜 저 사람을 나한테 붙여주셨는지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싸우고 있는데 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잘 들여다보면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갈등들이 있습니다. 왜 싫으냐고 물어보면 그냥 싫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에 이끌려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얘기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 있으십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평가할 때 딱 한 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들이 다 자기만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계속 매어서 아무것도 못합니다. 결국에는 그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을 욥이라는 사건을 욥의 상황을 왜 주셨을까 생각했다면 소발은 자기를 봤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통해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상황 사건 사람은 나를 만드는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입니다. 오늘 내가 살려면 그 사건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죽은 사람도 일으키고 권능을 일으켜서 신이라고 불림을 받은 사람이었고 뱀에 물려도 죽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는데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도바울은 평생 가지고 살아야 될 자신의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내 것입니다. 남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우고 싶은 과거가 아닙니다.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냥 내 몸의 일부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신을 자고치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욥의 상황이 욥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이고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양식입니다. 그것을 먹어야지만 내가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을 크게 벌려서 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은 다 내 양식입니다. 어두움도 다 내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기가 막힌 나라인지 모릅니다. 남과 북이 갈라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라도 사람이라서 그래.’ 라고 누군가를 평가하는 소리를 들으면 저도 순간적으로 ‘그런가?’하게 됩니다. 또 ‘내가 전라도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경상도 사람도 충청도 사람도 뇌물 받아 먹습니다. 남과 북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동과 서도 갈라졌고 세대와 세대가 갈라지고 얼마나 갈등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가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이고 오늘 나에게 주신 내 몸의 일부분이고 내가 몸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소발의 논리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쁜 놈이라고 팔짱 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먹는다고 손가락질하는 그 가운데 내 지체 내 몸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비판도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오늘 그것을 내 몸의 일부로 받지 않으면 우리는 늘 내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건으로 받지 않으면 늘 방관자처럼 구경꾼처럼 또는 내가 심판자처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오늘 말씀 이 사건들은 나를 통해서 너를 세우는 하나님의 생명의 관계입니다. 소발은 원래 친구입니다. 그렇다면 욥을 내 친구로 받아야 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담겨있는 ‘친구’의 개념에 대해 쓴 책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우정입니다. 도리에 어긋나고 의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섭리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늘 섭리 가운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의리도 없고 도리에도 어긋나지만 더 큰 차원의 생명의 관계로 살아야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생명의 관계입니다. 욥은 소발의 비난하는 소리와 비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지막에 보면 소발을 위해 기도합니다.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 결국에는 소발을 구원하는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관계를 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는 함께 만들고 함께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생명의 관계로 더욱더 견고해지고 튼튼해집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들어져서 우리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디 가서, 어디에 가야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 받고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메시야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를 추앙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배척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하고자할 때 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들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함께 만들고 함께 세우는 하나님의 나라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 보다 높고
스올 보다 깊고
땅끝 까지의 길이 보다 길고
바다 보다 넓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발은
하나님의 지혜가
높고 깊고 길고 넓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성경의 말씀은
그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는
우리 몸 가운데
우리들의 인격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 녹아져서
살이 되고 육신이 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그 신비가
오늘 내 몸 가운데 오셔서
내 몸의 일부가 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그 생명의 지혜를
내 몸 가운데 두고
내 몸의 일부로 살아내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나에게 그 육신의 삶으로 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고 살겠습니다.
믿고 행하겠습니다.

내가 사망권세를 묵상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내가 묵상하고 살겠습니다.

티끌과 같고 먼지와 같은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으신
주님 앞에
내가 의지하고 위임하고 신뢰하고 살겠습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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