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친구 (욥기 6:14-30, 빌레몬서 1:4-22)

사랑의 또 다른 모양인 우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잠언에 있는 말씀에 보면 가까운 친구가 먼 형제 보다 낫다는 표현이 있고 또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신랑과 신부라고 하는 부부의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가장 대등하고 동등한 관계는 친구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가장 많이 한 것에 대해서 보상해 주겠다고 했는데 보상의 대상이 본인과 친구와 친척이었는데 가장 많이 앉았다 일어서기를 한 대상이 친구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동료 또는 우정의 관계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정에 대해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빌레몬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빌레몬서는 굉장히 짧은 1장짜리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구약의 아가서와 같은 사랑의 표현들이 들어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이라고하는 친구에게 또는 동역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으면서 감옥에서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과 영적인 부모 자식의 관계가 되었고 잘 들어보니까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안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무익한 종이었고 또 도망친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평등한 관계 안에서 관계를 하고 있지만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는 노예가 흔했고 계급이 분명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낳은 생명, 자신이 낳은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동시에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도 사도바울이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네시모를 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 친구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합니다.

21세기 문화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문화로 보면 천지가 개벽할 내용입니다. 노예, 그것도 도망친 노예를 어떻게 친구로 동역자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빌레몬은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시고 오네시모는 우리 인간이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게 하시려고 소개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내용이 빌레몬서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사랑 받는 형제라고 영접하라고 얘기하고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종이었지만 동역자로 친구로 여기고 있는 사도바울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우정의 모습이었고 또 우리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우정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나이가 차이가 나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얘기하고 또 지역이 달라도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고향을 물어보고 관계를 맺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또 요즘은 정치적인 입장이 다를 때 친구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에 친구 맺기가 있는데 가끔 이상한 내용을 띄워놓고 ‘좋아요’를 누르기를 강요하는 사람은 친구관계를 끊을까 말까를 고민하게 합니다. 온라인 세상 속에서 친구라는 것이 끼리끼리 모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늘 친구 맺기를 하면서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공동체 안에서 우정이라는 것을 쌓아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신비가 있다면 동성끼리 또는 정말 다른 세대도 하나 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아주 중요한 세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격은 사람을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람의 고유한 것들을 존중해주고 신뢰해주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인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할 때 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관계에 있어서의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뭐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인데 그 분이 스스로 힘을 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격과 인격의 관계를 맺을 때 마다 우리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2월 14일에 초콜릿을 주면서 사랑을 표현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맞춰주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무례하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인격의 관계가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중요한 관계의 원리입니다.

심리학자들이 하나님을 연구해 보고서 하나님이 조울증환자 같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좋을 때는 너무 좋으시다가 갑자기 열 받으시면 너무 화를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면 뭐든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고객을 맞이하는 얼굴을 하고 우아하게 계셔야하는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갑자기 사람 만든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너무나 인격적인 관계를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격의 관계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탈랜트가 자기는 매일 이벤트를 하는데 이벤트의 삶을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삶이 이벤트인 사람은 너무 힘든 것입니다. 매일 아이디어를 짜야하고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거룩한 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저 위에 있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우리가 보는 하늘과 물질이 비어있는 이 공간 속에도 하나님께서 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밥을 먹고 드라마를 보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가끔 성경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장모님과 차를 타고 성경 내용을 들으며 가는데 롯과 그 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장모님께서 왜 그런 내용을 성경에 넣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좀 뺐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왕국을 세우면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지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실은 성경은 정확하게 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 죄 가운데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들의 넘어진 이야기 속에서 가장 거룩한 것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말하는 그 삶 속에서도 가장 거룩한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것입니다.

큰 교회 목회를 하는 제 친구 목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목사는 교인들하고 가끔 밥을 먹어줘야된다고 했습니다. 매일 같이 먹으면 깔보고 목사를 쉽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일 년에 딱 한 번만 밥을 먹어준다고 했습니다. 물론 교인이 5천 명이나 되니까 밥 한 번 먹는 것이 힘들긴 합니다. 신비주의, 뭔가 있어야 보여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과 늘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세 번째 성경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이야기합니다.
인격의 관계는 또 일상의 삶 속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없습니다. 급격한 변화는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서 갑자기 은혜를 받아서 감동을 받았을 때나 있는 것인데 그런 감동은 사실 3개월 밖에 안갑니다. 많이 가면 6개월입니다. 일상이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건이 됩니까? 사건의 반복이 일상인데 그 일상의 삶 속에서 내가 변하지 않으면 이벤트는 그냥 사건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내 스스로의 기다림의 시간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똑같이 기다려줘야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변할 것이라고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셨으면 아마도 지구의 절반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빨리 벼락 내려주세요 라고 가끔씩 기도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꼴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그 안에서도 동과 서가 남과 북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조차도 누구 편을 들면서 죄를 뒤집어씌우기를 하고 분열의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정말 기도해서 싹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격체이기 때문에 일상의 삶 가운데 있기 때문에 대단한 이벤트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일상이 되기 위해서는 더 기다리고 더 기다려 주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친구와의 우정의 관계입니다. 유진피터슨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21세기의 신학자이면서 영성가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우정 안에서 평범한 믿음이 놀랍게 자라나고 우정 안에서 하나님이 거룩한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우정 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고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남자와 여자의 사랑만 아는데 동성끼리 가지고 있는 진정한 친구, 이웃과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관계로 있는 것입니다.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니까 요한1서가 다시 읽혀졌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1서 4:20)’

가끔 진짜 일상 속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하는 사람하고는 관계를 못하면서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하고는 관계를 하려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체간의 우정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인데 지체 안에서는 사랑을 못하고 계속 다른 데 가서 찾으려고 합니다. 일상이 무너져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계를 못하는 것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악은 관계성입니다. 음란은 그 관계를 목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수단화 해서 쾌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내 입맛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씁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이 우정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향해서 또는 오네시모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 이 우정의 사랑이 오늘 우리 가운데 우리 공동체 가운데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에서는 어르신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아래가 분명하지만 미국에서는 경어는 거의 쓰지 않고 서로 친구가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친구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욥의 한탄이 있습니다. 6장 14절에서 30절에서 얘기합니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14절)’

내가 하나님을 멀리한다할지라도 그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내 편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같이 지나가누나(15절)’

욥이 친구들에게 왜 그렇게 변덕이 심하냐고 얘기합니다. 늘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친구이고 어떤 때는 원수입니다. 어떤 때는 평생 가자고 하더니 어떤 때는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25절)’

옳은 말이고 책망하는 말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우정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영화를 만드는데 제목이 친구1, 친구2입니다. 친구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세상이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친구는 동역자입니다. 동업자는 6:4, 7:3 계산하고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계산합니다. 계산해 보고 손해가 날 것 같으면 관계를 끊습니다. 조금 착한 사람은 가만히 끊습니다. 그 속에 우정이라는 사랑이 없습니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29절)’

오히려 옳은 말이, 책망이 악한 행동으로 관계를 끊어버리는 행동으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22절)’
‘나는 잠잠하리라(24절)’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28절)’

우정이 깨지고 사랑이 깨지면 첫 번째로 얼굴을 안 봅니다. 신앙의 빨간 경고가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삶 가운데 계시는데 오늘 우리가 특별하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형제 안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형제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29절)’

‘의’는 옳은 행위가 아닙니다. 욥은 자기가 가진 행동은 계속 무너져 있었습니다. 자기 자식도 죽고 재물도 빼앗기고 온몸도 상했고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의’가 있습니다. 그 ‘의’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우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처럼 사람들이 말한다할지라도 내가 무슨 소리를 듣는다할지라도 내 우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의가 건재하니’라고 말합니다.

왜 세상에서 친구, 친구2라는 영화를 만들까요? 세상에 우정이 없고 세상에 의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의리를 찾기 위해서 조폭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정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너무 창피한 얘기입니다. 만약 제가 친구3를 만든다면 크리스챤의 우정을 말하고 싶습니다. 조폭 보다 더한 우정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에게 우정이 없다고 의리도 없다고 얘기합니다.

며칠 전에 구의원하고 회의도 하고 저녁을 먹는데 그 사람이 자기가 가진 원칙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여유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십시일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일조인데요? 라고 말했더니 십일조는 뭔가 강요하는 느낌이 있고 너무나 종교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래 십시일반이 십일조라고 다시 얘기했습니다. 밥을 먹는데 한 숟가락씩 덜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숟가락 덜어준 것 때문에 한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십시일반 하려면 우정이 있어야 합니다.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계란반찬 쏘세지반찬 싸가지고 학교에 간 날은 도시락 뚜껑 다 열지도 않고 몰래 한 숟가락씩 밥 먹었던 것처럼 누가 볼까봐 몰래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눠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가지고 있는 것을 함께 나눠서 우정의 사랑에 함께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종교적이고 율법적으로 바뀌어버려서 언어의 타락이 온 것입니다. 사단이 가지고 있는 전략 중에 하나가 언어를 타락하게 해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십의일조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분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인데 정치를 해도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관계는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친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친구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친구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와도 나의 친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버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진피터슨이 The Power of a Friend. 친구의 힘을 이야기했습니다. 우정의 힘이 있습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다들 잘못됐다고 말할 때 그래도 옆에서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친구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런 친구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친구의 마음이 있는 것이고 다윗과 요나단도 정치적인 배경이 다르고 권력다툼의 한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우정을 버리지 않습니다. 신앙은 정치를 넘어서있습니다. 신앙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넘어서있는 것입니다.

가끔 제가 얘기하는데 ‘사랑합니다.’라는 말 보다 진짜 좋은 말은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냥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기분 나쁠 때는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20년 됐다 30년 됐다고 얘기하는데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관계인데 어떤 때는 미워하고 어떤 때는 싫어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요나단의 정치를 뛰어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조차도 뛰어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정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 42절에 다윗을 향해서 요나단이 평안히 가라고 얘기합니다. 평안히 가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우정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하는데 다윗을 기거이 보내줍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먼저 된 사람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크리스찬을 죽이려고 했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고 또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순간에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를 얘기하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때 바나바가 기꺼이 와서 동역자가 되어달라고 얘기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한 가지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성경 어디에도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과거 있습니다. 상처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수 하나 때문에 전체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실수 하나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잘못 됐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나바의 허물을 덮어주는 친구의 사랑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최후의 만찬을 할 때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요한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우정이 예수님과 요한 사이에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영어로 꿈을 꾸었는데 누군가 저에게 johan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는 johan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왜 johan일까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johan을 해석해보니까 요한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친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꿈은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이 되고 예수님이 되고 바울이 되고 바나바가 되고 요나단이 되어 충만한 우정을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면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내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우정이 있습니다.
그 우정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함께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2. 15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