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설교) 거기서는 (욥기 3:1-19, 마태복음 2:1-23절)

지금이 성탄절기인데 4주 연속 대강절이라고 해서 보통 교회에서는 촛불을 한 주에 하나씩 켜서 4주 동안 네 개가 다 채워지면 어둠 가운데 진정한 빛이 오셨다고 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예식을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어쩌면 욥의 이야기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성탄과는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누구처럼 믿으라고 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또 누구누구처럼 믿지 말라고 하는 실패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의 편에서 보면 다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어떻게 그런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까? 라고 하겠지만 그 사람들의 삶은 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로 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다 예수그리스도의 한 부분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욥도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과정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을 드러내고 있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의 의미는 위대한 성인이 우리 가운데 탄생했다고 하는 위대한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절기로 얘기하면 강림절이고 대강절이라고 얘기합니다. ‘강림’이란 하나님이 사람으로 내려오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던 모양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절기로서는 대강절이 맞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내려오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오셨다고 했을 때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또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했던 위대한 그리스도, 위대한 메시야의 꿈이 있습니다. 그 메시야는 가장 지혜로운 자이고 가장 권능 있는 자였고 또 그 메시야는 모든 만물,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꿈꾸었던 메시야는 건장한 남자이면서 누가 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고 누가 보더라도 흠모할만한 모습을 가진 존재, 동시에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오는 그런 모습의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모습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입니다. 왜 사람들은 그들이 평생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믿지 않는 동방박사들만 가서 경배하고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왜 가서 경배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꿈꿨던 것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도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임하시는 공간입니다. 그 안에 성전이 있습니다. 그 곳에 주님이 내려오시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령하고 거룩한 공간에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이 거룩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성지, 거룩한 땅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헤롯왕이 현존하는 왕이었는데 그 왕 앞에서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헤롯을 이어서 또는 헤롯정권을 엎어서 주님이 현존하는 왕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힘이 있고 권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 힘과 권력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움직이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이 세계가 운행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권력과 힘의 상징인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면서 뭔가 있을 것 같다고 하는 추측 가운데에서 오고 있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분명하게 말씀 안에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정확한 지명과 또 그가 누구인지 정확한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확신에 찬 사람들에 의해서 바로 메시야가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가 분명하게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기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누군가의 돌봄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 가장 연약한 존재로, 가장 부족한 존재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존하는 존재, 연약한 존재, 부족한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지혜로우시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스리는 자로 오셔야지만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이 너무나 부족한 너무나 의존적인 존재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존하는 왕으로써 권력을 쥐고 있어서 무엇인가 계속 추진하고 있어야 되는 왕으로 오셔야 되는데 그 왕은 그 현존을 뛰어넘는 영원한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하고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실패하러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현실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아니라고 하는 현실을 초월하는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와야 되는데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오셨고 그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육신의 이스라엘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고 자기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고 할지라도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절대로 저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진리가 그들 가운데 왔을 때 그들은 경배하지 않고 오히려 짐승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에게 주님이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 보다 더 깨어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헤롯에게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진실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년 동안 만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을 다 죽였다고 하는데 2년 동안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오기까지 썼던 비용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들이 허비했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기약도 없고 얻어갈 이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묵묵히 별만 보고 쫓아온 사람들입니다. 계수하지 않고 계량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계수하고 계량하고 계산했던 삶이었으면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고 예수 앞에서 보배합을 열어서 경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을 읽을 때 마다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겸손하게 바라봐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라고 하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이 신비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어 놓은 역사 속에서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 성탄은 애매한 죽음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권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입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18절)’

주님이 탄생하는데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시간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탄생을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탄생으로 인해서 누군가가 울고 있습니다.

두 번째 성탄은 머리로만 믿었던 확신에 찬 사람들과 별개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가시는데 머리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 뭔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님은 처음부터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신했었고 처음부터 주님은 나그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변두리지역인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은 가장 비천한 삶의 자리 나사렛에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라마, 애굽,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이 지명들은 위대한 인물의 발자취가 아니라 가장 억울한 자, 부족한 자, 연약한 자들의 삶의 경로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나의 생명의 구원자라고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믿지 않는 자들을 너무나 불쌍하다고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정말 그 안에 있는 것인지를 물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면서 똑같이 주님이 오셨던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그 사람들 그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정확하게 베들레헴이라고 찍었던 그 사람들과 같이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이 성탄의 절기 속에서 스스로 물어야 될 것입니다.

오늘 대표기도하신 집사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가장 연약한 자들을 열거하셨는데 과연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들의 마음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고속도로를 100KM속도로 달리고 있는 인생과 같습니다. 옆을 보면 사고가 납니다. 누군가에게 눈길을 주면 사고 납니다. 앞만 보고 계속 달려야 되는 운명처럼 살고 있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천천히 걸으면서 꽃도 보고 사람도 보고 이야기도 하면서 가야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길인데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100KM로 달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누가 저에게 운전을 잘한다고 하는 말을 해서 그 소리를 듣고 나서 제 마음이 갑자기 급해져서 운전을 잘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서인지 속도도 빨라지고 갈지자로 운전을 했습니다. 내 인생 속에서 무엇인가 잘 하고 있다고 하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범법자가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갈지자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 빨간불인지도 모르고 지나가다가 카메라에 찍혀서 곧 딱지가 날아올 것입니다.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막 달리느라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확하게 아기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가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바빴습니다. 다음 날 예배 준비해야 하고 시간이 너무 걸려서 못 가고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못 간 것입니다. 진짜 메시야이면 연락하라고 그 때 스케줄 조정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즘 중고등부학생들이나 청년들이 왜 옛날처럼 패기가 없을까? 그들은 왜 예전의 우리처럼 고민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봉사할 시간도 없어서 스케줄 잘 정해서 딱 그 시간만큼만 해야 합니다. 목요일마다 동작지방에서 전도훈련을 하는데 제가 대표로 가고 있습니다. 전도학교에서 산타 모자를 쓰고 밖에 나가서 함께 찬양을 부르고 예수 믿으라고 외칩니다. 상도역 앞에서 50명 정도 모여서 찬양을 하고 외치는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어렸을 때 밖에 나가서 기타 치면서 찬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학교에서 저와 함께 했던 분들은 대부분 60대였습니다. 옛날에는 10대나 20대들이 했던 것을 지금은 60대들이 하는 것입니다. 옛날 기억이 나니까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20대들은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늙어도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대 20대들은 공부하고 취업 준비하느라 전도할 시간 없고 어르신들이 옛날 향수에 젖어서 찬양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 너무나 바쁩니다. 수다 떨 시간도 없고 옆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옛날 제가 다니던 교회 지하에 가면 난로가 있어서 성탄절 절기 그 즈음에는 난로 가에 둘러앉아서 얘기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과외도 없었고 공부도 별로 안했던 것 같습니다. 모여서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둥 누가 마음에 안든다는둥 오순도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또 가끔 방언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또 방언 받아볼까? 이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간과하고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장 1절에서 욥이 자신의 슬픔을 말합니다. 3절부터 10절까지는 자신이 태어난 날과 잉태된 날에 대해 저주를 합니다. 11절부터 19절에서는 왜 태어나 죽지 않았던가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욥이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였더라면’ ‘하지 않았더라면’ ‘어찌하여’입니다.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욥이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라마의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앞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 가운데에서도 붙들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오셔서 가장 큰 고통 가운데 살아오시면서 하셨던 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의 신앙의 표현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고백을 하는데 그것이 ‘거기에서’입니다. 욥은 자신이 왜 태어났을까? 왜 잉태되었을까? 왜 죽지 못해 살고 있을까? 하지만 그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마지막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거기에서는 진정한 안식이 있고 진정한 평안이 있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오늘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이 믿음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구합니다. ‘거기에서’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내가 지금 이 곳에서 비참합니다.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참된 안식과 참된 평안과 참된 임마누엘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이 첫 번째로 사역하시면서 험악한 인생을 사시면서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천국에 대한 메시지였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얘기합니다. 한국교회가 60년대 70년대에는 천국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후로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면서 타락했다고 얘기합니다. 하면 된다, 함께 부흥하자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닌데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주님은 가장 강력한 황제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야 합니다.

주님의 생각, 주님의 눈은 천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귀가 어디에 열려있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썩고 쇠하고 없어질 이 땅에 보물을 두면 동록과 좀이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천국에 두면 영원히 썩지 않는 하나님의 보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탄 절기 속에서 우리가 묵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나 비참하고 슬픈 것입니다. ‘거기’가 있습니다. 그 곳이 진정한 안식의 자리이고 그 곳이 참된 평안의 자리이고 그 곳이 더불어 살아가는 임마누엘의 자리입니다. 이 시간 욥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우리의 눈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는 진정한 가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안식 ,진정한 생명을 묵상하는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는 이 절기 안에서 다시 새김질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100KM로 달리던 내 인생의 시간이 있다면
그 인생의 차에서 내리시고
천천히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결단과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믿음이 없을 것 같았던 동방박사들이
오직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2년 동안 별을 보고 왔던 것처럼

슬픔과 절망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놓지 않는
천국의 믿음이 욥을 다시 일어나게 한 것처럼
우리가 이 시간 주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과 평안과 주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다시 한 번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이루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우리들 인생의 끝날 그 시점에
또 다른 영생이 시작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눈이 현실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01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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