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설교) 내가 인정하리라(욥기 40:6-14, 로마서 10:4-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욥 40: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의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욥기 40:7)’

위엄과 존귀는 내면의 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셔서 위엄 있고 존귀한 내면을 주셨고 그것이 드러날 때에 영광과 영화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대장부처럼 강하고 담대하게 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면이 위엄 있고 존귀한 존재이니 영광과 영화의 삶으로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강하고 담대하게 대장부처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하나님께도 대답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장부처럼’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으로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공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에게도 양심이라고 하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의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영광과 영화라고 하는 권위자의 옷을 입을 수 있는데 이것은 교만한 자와 악인을 이길 수 있는 권리를 얘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뿐만 아니라 악을 악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선으로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9절)’,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있느냐(14절)’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에게는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를 가진 존재인데 네가 과연 하나님처럼 할 수 있고 네가 과연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고 다시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공의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하나님 같은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고 또 내가 하나님 같은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내가 악을 이기고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내가 구원자가 될 수 없고 내가 능력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두 가지 중 한 쪽에 치우치거나 아니면 둘 다 부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자와 능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늘 패배자처럼 살아가는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지 못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또 내가 권위자의 옷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권위를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애매모호한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권위자인데 권위자가 가진 구원의 능력은 가지지 못했고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같은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한 존재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절망 가운데 빠지고 내가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실패자의 삶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욥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는 대장부이고 너는 하나님 안에서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의 옷을 입은 존재인데 대장부이지만 하나님만큼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의 옷을 입었지만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613가지 모든 행위의 마침표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장부처럼 권위자처럼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모든 의를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마침표가 되지 않으면 날마다 쉼표를 찍으며 스스로 좌절하고 실패자인 것처럼 또는 내가 하나님 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법을 모으면 613가지의 율법이 있는데 다 행위에 관한 법입니다. 그 모든 행위의 법의 마침표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서 10절까지 그것을 설명해내고 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다는 것이고 그 믿음의 말씀의 내용이 있고 믿음의 행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욥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축소시켜 설명하는 원리입니다. 법의 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인데 믿음의 의는 행함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도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롬 10:6)’

첫 번째는 하늘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마음이 존귀와 위엄과 영광과 영화의 마음이고 우리가 대장부처럼 말하게 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만약에 우리가 하늘에 있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하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늘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는 주님이 나에게 왜 오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과 죄 때문에 주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에게 오셨습니다. 하늘의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주님 앞에서 주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7)’

두 번째는 무저갱의 마음입니다. 지옥 같은 내 마음이 있습니다. 불편한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억울한 마음이 있고 상처 받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죄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생명을 가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무저갱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느냐면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 하늘의 마음과 무저갱의 마음이 순간 순간 부딪칠 때 마다 하늘의 마음일 때는 내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며 겸손하고 내가 바닥을 치고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합니다. 하늘의 마음일 때는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교만하고 또 무저갱에 있을 때는 매일 죄를 묵상하며 살아갑니다. 죄를 묵상하니까 무저갱에서 죽은 자가 부활한 사건이 없습니다. 하늘에 마음이 있으니까 내가 하나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필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하늘에 있을 때와 무저갱에 있을 때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믿음의 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늘에서 내가 하늘의 행위를 하면 거룩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상처받을 일이 생겼다면 죄를 묵상하고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의가 어떤 의인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어제 마을에 있는 단체의 사람들과 회의를 했는데 회의를 하고나서 제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김OO성도님이 목사님이 3:2로 지셨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제가 회의 하다가 버럭 화를 냈습니다. 좀 더 너그럽게 할 걸 하고 후회가 됐습니다. 그리고 또 저희 교인들이 정말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질 나쁜 목사하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게 기적인 것 같습니다. 마음이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정말 제게 주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구원자도 아니고 저도 주님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제는 졌지만 내일은 주님이 함께하셔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뿐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마다 내가 다 가지고 있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장부처럼 말하고 존귀와 위엄과 영광과 영화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또 오늘 주님 앞에 다시 돌아서서 행위로는 도저히 깨끗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주님의 능력이 필요하고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의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마음과 입으로 전파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믿음의 말씀을 내 입술로 말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고 부활하심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이 나에게 대장부처럼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뭔가 있기 때문에 위엄 있고 존귀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옷을 입으라고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친구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피부병에 걸린 몸을 기왓장으로 긁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느끼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대장부처럼 위엄과 존귀와 영광과 영화의 옷을 입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얘기하지 말고 구원자처럼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좋은 일, 착한 일, 바른 일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일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기를 물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의 보다 낫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철저하게 613가지 율법을 지키는 육신의 행위였습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하루에 네 시간 씩 기도를 합니다. 일을 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멈추고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의 종교행위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고 613가지 행위에 절대로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마침표가 되셨습니다.

마음을 예수로 채우고 예수님으로 인정하고 그 예수로 인해서 오늘도 내가 산다고 말하는 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오늘 실패해도 오늘 내가 영광 가운데 있어도 내가 부하든 빈하든 그 안에서 자족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제 그 마음으로는 절대로 말씀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가서 이기고 돌아와야 하는데 깨져서 실패자의 모습으로 왔지만 주님이 나에게 대장부라고 영광과 영화의 입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다시 힘을 얻는 것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절망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시기를 그리고 영광의 자리에서는 온유하고 겸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시인해야 합니다. 믿음의 행위가 시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도 하나님의 것이고 실패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건강한 것도 하나님의 것이고 건강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죽음도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가 살아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상처도 하나님의 것이고 그 상처를 꿰매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나는 그저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으로 내가 시인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 믿음의 행위를 할 때 마다 우리는 저주 아래서 축복을 말하고 축복 아래에서 저주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죄를 묵상하지 않는 것이고 축복의 자리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축복의 자리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오늘도 온유와 겸손으로 주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하고 상처 받은 그 자리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믿음을 인정하는 신앙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정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구원의 행위가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권리포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괜찮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의 권리포기, 내가 가진 의에 대한 포기, 내 죄에 대한 포기로 겸손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인정하라는 말은 인정받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눈치, 코치, 재치, 염치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받아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나님 앞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마음 예수가 주인입니다. 어떤 편견, 내 아픔, 내 욕망 세상의 것으로부터 다 떠나서 우리 마음에 예수가 살아계시다는 그 믿음, 그 행위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내가 왜 슬퍼하고 왜 절망합니까?
내가 왜 기뻐하고 왜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주님이 계십니까?

나 때문에 울고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나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 안에 예수 그 분이 계셔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중심에
예수 그 분이 계시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왜 화가 났습니까?
왜 기뻐합니까?
그 안에 정말 예수님이 계십니까?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성공 속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오셔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따라
복종과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실패도 성공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실패 속에서 부활하셔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얘기하고 계시고
성공 속에서도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실 수밖에 없는
그래서 오늘도 내가 온유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내 입술로 주님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살겠습니다.

2016.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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