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6장 25절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925절)’
오늘 욥에게 충고하고 책망하고 있는 엘리바스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충고하고 있는 것은 결국에는 엘리바스의 지식으로 욥의 고난은 죄를 응징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옳은 말과 책망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럽게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고 욥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통해서 선과 악이 분명하게 분별이 되고 구별이 되어서 옳은 말과 책망을 통해 사람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소원과 목적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갚아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화목제물이 되어 peace maker로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은 분명하게 분별해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별과 구별은 죄와 죄인을 구별해서 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죄와 죄인이 동일시해서 옳은 말과 책망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오히려 욥을 공격합니다. 죄가 아닌 죄인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옳은 말과 책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를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충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고 책망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나의 의를 드러내고 사람의 영혼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옳은 말이 사단의 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욕쟁이 할머니가 아무리 욕을 해도 사람들이 그 말에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을 느끼는 것처럼 죄에 대해 옳은 말과 책망을 하지만 결국 그것이 사랑의 말이고 생명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죄와 죄인을 구별해서 죄인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기를 때도 똑같습니다. 어떤 때는 매를 들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옳은 말과 책망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죄를 보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와 죄인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책망할 것도 없고 옳은 말을 할 것도 없다고 하면서서 죄를 또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죄인에 대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살리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봐야할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신랄하게 비판하셨고 세리와 창녀들의 죄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보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책망으로 어떤 때는 환대함으로 그들을 대우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엘리바스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루를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가 생명을 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말하고 살아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에 선악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 생명나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묻지만
그 속에서도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고 말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분명하게 분별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지만
또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맡깁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살게 하여 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와 공의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함께하여 주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2014.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