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1절 1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창 11:27)’

성경학자들은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같이 갔는데 아브라함이 장자가 아니라 하란이 가장 큰 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는데 하난이 롯을 낳았고 롯이 아브람과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창 11:28)’

이들은 우르에 있었습니다. 우르는 지금의 이라크쪽지역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 11:31)’

우르에서 하란으로 갔습니다.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2)’

그리고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2장 1절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12장 1절 말씀이 사실은 우르에서 떠날 때 들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르에서는 아버지 데라와 같이 떠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하란에서 죽은 것인데 12장 1절은 우르에서 시작하는 말씀을 아브람에게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아버지한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르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말씀을 순서를 바꿨습니다. 11장 32절 뒤에 12장 1절이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라의 죽음 뒤에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명령의 말씀을 하십니다. 데라가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을 늘 아버지를 통해서 봐야했습니다. 족장들 안에서는 족보나 위계질서 또는 권위,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서 떠나셔서 다윗에게 갔을 때에 사울 왕이 하나님이 원래 축복했던 사람인데도 떠나셔서 다윗에게 가신 것입니다. 다윗은 만만이고 사울은 천천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이 있어도 둘 중에 영적 권위자가 있습니다. 그 권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사실 아브람이 말씀을 들으려면 데라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가면 웃시야 왕이 죽고 나서 이사야가 환상을 봅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짐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옛날에는 반드시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나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제사장을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치를 받으려면 왕을 봐야했습니다. 또 선지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있어서 사람들한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은 누구든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든, 제사장이든, 왕이든 내 위에 있는 그가 죽어야 합니다. 안 죽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맨날 그 사람만 보고 있게 됩니다. 죽어야 되는 존재가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구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빛을 보고 있어야 되는데 다 구름을 봅니다. 어떤 구름은 먹구름이고 어떤 구름은 흰 구름이고 어떤 구름은 뭉게구름인데 그 구름들을 보면서 슬프다고 하고 예쁘다고 하고 기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름은 진리를 가리고 있는 실체입니다. 진리를 가리고 있는 실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매개로 만났던 것들이 다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예배도 친교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도가 목적이 됩니다. 예배가 목적이 되고 친교가 목적이 됩니다. 목적이 모두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통로인데 그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면서 태양을 보라고 하는데 자꾸 손가락을 보는 것입니다. 손가락 보면서 떼 꼈다고 하고 손가락이 예쁘다고 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봐야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전부 영적으로 미개하니까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려면 ‘누군가’가 다 죽어야 합니다.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이야기가 12장 1절 보다 앞선 이야기이지만 성경은 왜 죽고 나서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김어준이 강의 중에 한 이야기인데 자기가 아버지가 아버지로 느껴진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아버지가 남자로 보일 때 아버지가 사람으로 보일 때였다고 합니다. 축 처진 인간의 어깨를 보면서 ‘우리 아버지도 사람이구나.’생각하게 되고 아버지의 삶이 다 이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죽는 것입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떠나’ 가 죽음입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면 초인이 첫 번째 한 것이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옛날에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모든 권리와 자신의 안전과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이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집을 떠나는 것이 초인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람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기가 살았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말씀을 받을 때 데라는 살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시작하는 떠나는 이 과정이 아브람이 말씀을 말씀으로 듣게 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웃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감기는 것을 경험합니다. 눈이 감기는 것이 떠나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교제가 구름일 수도 있지만 내 아들일 수도 있고 내 남편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내 욕망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아들을 통해서 보고 있다면 아들이 아프면 나쁜 하나님, 아들이 나으면 좋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편이 좋아지면 좋은 하나님이고 아들의 형편이 나빠지면 나쁜 하나님이고 구름의 상태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구름을 거둬야 합니다. 아들이 죽어야 합니다. 아들하고 상관없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살아있는 아들, 부모, 욕망, 자존심, 생각으로 계속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령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기도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안 됩니다. 어떤 분이 물으시기를 40일 작정기도를 하다가 35일 째 되는 새벽에 못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날짜를 중요시하는 것이 기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조차도 기도를 통해서 바꿔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40일 작정기도를 해낸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 수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014.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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