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1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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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신령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기도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안 됩니다. 어떤 분이 물으시기를 40일 작정기도를 하다가 35일 째 되는 새벽에 못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날짜를 중요시하는 것은 기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조차도 기도를 통해서 바꿔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40일 작정기도를 해낸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고 수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나 예배를 하는 사람들의 자기 거룩함이 있습니다. 자기 거룩함 때문에 그것을 내가 이루고 나면 나머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웃기는 사람들이고 수준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승리한 경험을 간증했더니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자기가 무너진 것입니다. 무너지니까 간증했던 것이 다 도로 아미타불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척해야 합니다. 또 무너졌다는 것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내가 이루고 내가 했다고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멘토를 죽이기 않으면 계속 그 사람을 통해서 만들어진 하나님만 보게 됩니다. 그런데 최고의 고수가 되려면 스승이 하산하라고 할 때까지는 있어야 합니다. 하산 하라고 하면 스승을 죽이는 것이지 먼저 죽이면 안 됩니다. 그러면 파렴치한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데라를 끝까지 공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데라가 그냥 육신의 아버지로 이해가 되니까 아버지가 죽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기독교는 정말 대단한 수준의 종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화가 나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먹으면서 안 먹는 사람에게 ‘야, 네가 목사냐?’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듣는 목사 열 받게 하는 말입니다.
제 딸이 15세가 됐는데 수련회를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20세가 될 때 까지는 엄마 아빠에게 배워야 하고 부모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도 부모에게 있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그리고 20세가 되면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한테 자기는 20세가 되면 집에서 쫓겨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서 살아도 되지만 돈은 내라고 했습니다.
무술을 연마하고 스승이 하산하라고 하는 것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스승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고 이제는 알아서 스스로 앞서 가라는 의미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은사가 있습니다. 목사의 은사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목양입니다. 그렇게 공동체의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봉사의 은사, 행정의 은사, 치유의 은사 등 여러 가지의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들이 각각 독립되어야지만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봉사도 안 되고 행정도 못 하고 치유의 은사도 없고 어린아이 같이 맨날 달라고만 하면 연합이 아닌 흡수가 되는 것입니다. 맨날 목사만 보고 삽니다. 같이 일을 하려면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미더워야 합니다. 봉사 하다가 삐지고 행정 하라고 하면 딴 짓 하고 있고 치유하라는데 때리기나 하면 도대체 아무것도 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독립이 되면 하산하는 것입니다.
목사 보다 더 잘 가르치고 더 지도력이 있다면 본인이 목사 하면 됩니다. 그런데 봉사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자신이 목사 하겠다고 하면 교회가 봉사단체가 되고, 치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목사 하겠다고 하면 교회가 기도원이 됩니다. 이런 은사들이 다 모여서 함께 어울려져 있는 것이 교회인데 맨날 가르치는 것만 배우고 그 밑에만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죽이면 부모와 더불어서 함께 뭔가 할 수 있습니다.
열다섯 살에 독립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서른 넘어서 독립을 시키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산을 해야 되는데 스승이 제자가 밥해 주는 것이 너무 편하다고 하산을 안 시키면 나쁜 스승입니다. 제자를 정진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도 약속을 하셨고 노아에게도 약속을 하셨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말씀으로 정확하게 쌍방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쌍방의 약속을 하려면 1:1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에게서 독립이 안 되어서 2:1로 계약을 하자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들 이삭과 함께 2:1로 하자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1:1은 철저한 독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독립적인 것입니다.
기독교가 굉장히 재미있는 종교인데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독립자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독립된 나와 독립된 사람들의 연합체 안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과 약속을 하셨는데 수많은 아브라함이 있어서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존재가 하나님과 같이 계약을 맺는데 이 이스라엘은 나이면서 동시에 우리입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 속에서 계약을 맺으려면 독립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되려면 독립과 독립이 되어서 연합이 된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러려면 데라가 죽어야 합니다. 약간 살인집단 같은 말로 들리겠지만 데라를 죽이는 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데라도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이실 것입니다.
실제로는 데라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데라가 죽었다고 표현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믿음의 역사, 믿음의 눈을 통해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데라가 살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편집하면서 죽은 것으로 쳤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이미 그 때부터 독립된 자아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의 언어로 데라가 죽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똑같습니다. 아들을 통해서 맨날 하나님을 보면 안 됩니다. 아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면 아들이 아들다워지고 나는 나다워집니다. 그런데 내가 진드기처럼 빌붙어있으면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아들 때문에 슬퍼합니다. 아닙니다. 아들은 아들입니다. 독립하지 않으면 며느리에게 구박받습니다. 분명하게 독립해서 서 있지 않으면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들이 있는데 내가 그 아들을 모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내 자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도 하고 자식을 위해서 애쓰고 있지만 그 자식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하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하나님을 안 만났다고 해서 맨날 속 썩이다가 내가 죽으면 안 됩니다. 독립이 되어야 진정한 관계가 시작됩니다. 독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하는 것은 다 흡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