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1절 3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1:24)’

아담의 부모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야지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입니다. 맨날 하나님 얘기하고 하나님이 어떻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잘 보면 다른 것이 있습니다. 떠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과 합하여 한 몸이 되었습니다.

제자는 하산하라고 할 때 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하산하라고 해도 하산하지 않고 바짓가랑이 잡는 제자는 스승이 그 제자를 정말 사랑한다면 발로 차서 뿌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무 살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동물 중에 제일 늦게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독립시킨다는 것이 공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부모는 한국에 있고 자식은 미국에 있어도 자식을 떼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맨날 전화해서 간섭하니까 그것이 싫어서 한국에 안 들어오고 미국에서 사는 자식들도 많이 있습니다. 독립한다고 할 때 물론 공간도 약간 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른다섯 살짜리 자매가 교회에 오면 너무 행복해하는데 집에만 들어가면 엄마가 욕을 해서 불행했습니다. 도저히 살 수가 없는데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뭐가 아쉬워서 서른다섯 먹은 사람이 부모님한테 그런 소리 듣고 사느냐고 나오라고 해서 지금 집 나온 지 9년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오고 나서 엄마와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엄마를 만나는데 엄마가 달라지셨다고 합니다.

물리적인 공간의 독립도 필요하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물리적인 것만으로는 완전히 독립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하나님 자체로 받으려면 그 안에 무엇인가 끼어들어 있으면 안 됩니다. 성공도 자존심도 편견도 어떤 사람도 끼어있으면 안 됩니다. 그냥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지 잘 들립니다. 전류가 흐를 때 저항이 있습니다. 저항이 심해서 100으로 시작한 전기가 걸리고 걸려서 0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네’해야 되는데 주시면 ‘네, 아니오, 네, 아니오.’ 하다가 ‘아닌가 봐.’ 하는 것입니다. 데라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이 약간은 버릇없다고 할 정도로 자유로운 모습들을 보다가 1년 정도 지나면 저를 가르칩니다. ‘목사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열 받아서 나갑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 중에 하나가 칠랄레 팔랄레를 하는 경험을 해 보게끔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계속 책임과 의무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0세부터 3세 까지 아기들은 뭘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0세부터 3세 까지가 없습니다. 갑자기 20세로 시작합니다. 뭘 해야 되고 뭘 해야 된다고 계속 얘기해 줍니다. 그러면 교회가 굉장히 잘 되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그 경험이 다 무너져있는 것입니다. 절대자존감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저는 교회에 누가 오든 와서 어떤 행동을 하든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전도사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구름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렸을 때 사탕 때문에 교회에 갔습니다. 사탕이 구름입니다. 그리고 나의 멘토도 굉장히 중요한 존재입니다. 멘토 없이 사람이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멘토도 만나면 죽여야 또 다른 멘토가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면 새로운 협력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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