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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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종교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도 아브라함이고 기독교도 아브라함이고 이스람교도 아브라함입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을 통해서 이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3대 종교의 시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믿음의 내용들이 사실은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는 인류가 시작되는 것이지만 아담에게 주신 약속은 암묵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렇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해서는 무지개라고 하는 어떤 현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에게는 말씀으로 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기독교를 말씀종교라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그 삶 속에서 약속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모든 이행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목적 가운데 하나를 그렇게 세우신 것인데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과하면 믿음의 체계들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는 이론이지만 아브라함은 실제의 삶으로 믿음의 실제들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과정도 있고 또 결국에는 아브라함이 대적의 문이 열리는 이 과정까지 신앙의 단계들로 얘기하면 최고의 단계까지 간 사람이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굉장히 중요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는 아주 실제적인 하나님과 믿는 자들의 믿음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출애굽, 애굽을 탈출하는 이 사건이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출애굽에서 만난 것입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근거였고 모든 것의 근거였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헌법의 정신은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근대국가의 가장 기본의 정신이 3.1운동의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서는 출애굽의 사건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하기 위해서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애굽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창세기입니다. 창세기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출애굽이 먼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공동체로 발전하는 이 과정이 실제적으로 하나의 과정이지만 아브라함의 전 생애가 믿음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입니다.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2)’
11장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나이가 75세였다면 그 시간에 실제적으로 아버지도 살아있었습니다.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11:31)’
하란에서 거류할 때 다 살아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32절에 보면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란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떠나기 전에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르에서부터 시작한 것이고 우르에서 출발해서 하란에서 거하다가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이미 하나님의 말씀, 언약은 있었습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한테 데라가 죽으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다시 편집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한테 역사를 가르쳐주는 것이지만 역사를 역사대로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해석해서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편들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다릅니다. 다르게 한 이유는 하나는 라인이 다른 것인데 그것도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언약이 가지고 있는 한 가지는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약간은 일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선물을 주시는 이 과정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사람을 왜 하나님이 선택했을까? 아무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선택받았고 믿음의 조상이 됐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유를 따지면 여러 가지를 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12장에서 뜬금없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라고 하는 정말로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아브라함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아브라함에게 오신 하나님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그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율법도 언약인데 지키면 복이 있고 안 지키면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라랏산과 헐몬산에서 말씀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인데 하나는 복이고 하나는 저주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언약은 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저주가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복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은혜가 아니라 조건적인 것입니다.
은혜는 공짜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냥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로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고 하는 뜻은 뜬금없이 찾아온 하나님을 내가 받아들이고 산다는 뜻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 앞에 저주 가운데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말을 사람들은 너무나 조건적인 것으로 듣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해야 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닌데 그냥 데라가 죽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오는 무엇인가 가려지는 것들이 이제는 걷혔다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커텐, 막이 스스로 걷혀진 것을 말합니다. 막이 걷혀지니까 그냥 보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작가가 작곡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곡을 쓴다고 해서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더니 곡이 떠다닌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말씀이 그렇게 이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계시가 누군가가 거둬주는 것입니다. 물론 눈은 뜨고 있어야 합니다. 보여주시는데 눈을 감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가 믿음입니다. 내가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만 뜨고 있으면, 그냥 보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봐도 안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영어 강의를 들어도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말로 하는 강의도 한 시간 집중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졸수도 있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단어 하나에 꽂혀서 한참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 8년 사는 동안 늘은 것은 눈치 밖에 없습니다. 대충 알아듣고 내가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것도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셔야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계시를 받기 위해서 청계산에 간다든지 40일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합니다. 40일 금식을 해도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굉장히 빠른 사람입니다. 세 번 기도했는데 안 된다고 하시니까 안 되는 것이구나 하고 바로 포기했습니다. 자기 몸의 병을 평생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고 동남아를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병을 못 고쳤습니다. 그러니까 겸손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계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도 엄밀히 따지면 자기를 바꾸는 과정이지 하나님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약속을 지키시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