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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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하나님이 세 가지 복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될찌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이 시작되는 것인데 그 복의 근원의 내용이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큰 민족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룰 것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고 신약으로 넘어가면 이것이 교회가 됩니다. 합비루, 히브리라는 말이 그 당시에는 계층적 언어였습니다. 애굽에서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노예라는 이름이 공동체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히브라라는 사람들의 계층이 공동체가 되어서 나중에는 이스라엘이 되었고 이스라엘이 교회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복이 공동체, 교회입니다.

‘이름을 창대케 하고’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케 된 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보이는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믿음의 세계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나중에 영과 육의 합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영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이름을 주셨고 육신의 것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썩지 않을 몸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삶으로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될지라’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그 믿음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나’가 아브라함입니다. 사람들은 말씀 공부를 다 역사로 알고 합니다. Information으로 공부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 말씀공부는 formation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안 되면 B.C 2500년, B.C 4000년 전의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나’입니다.

세 번째 ‘나’는 개인 단독자입니다.
복을 받으려면 그 당시에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야했습니다. 또 누구를 만나야 합니다. 또 날짜도 봐야 하고 공간도 봐야합니다. 몇 월 며칠에 동쪽으로 가야 귀인을 만납니다. 이것이 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내가 가는 곳이,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내가 그 때 한 일이 하나님 앞에서 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공동체 속에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개념 자체를 계속 복을 쫓아가는 사람들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복의 사람입니다. 나를 만나서 사람들이 복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그 사람을 만나서 복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데라가 우상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일도 복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의 종류만큼 우상이 있었습니다. 다산의 신, 풍요의 신, 바다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복의 주체가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이고 그리스도가 복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복입니다. 복과 축복은 다릅니다. 복을 비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것이고 내가 복을 받은 사람이고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축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은 다 내가 복의 주체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소유냐 존재냐 라고 묻습니다. 소유는 주체가 아니고 다 객체입니다. 자기가 뭘 받아야지만 내가 복을 받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늘 복을 쫓아가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언약은 정말 획기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고 복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2장에 보면 애굽에 간 아브라함이 무서워서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고 팔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복의 내용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어땠든 아내를 팔아먹은 것은 아브라함의 죄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받았습니다. 바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했다고 자신은 모른다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상참작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실은 죄를 따진다면 아브라함의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니까 맨날 내가 무슨 죄가 있나 없나를 계속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옆에서 나를 저주하거나 내 것을 빼앗아가거나 하면 다 바로처럼 저주 받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의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한테 아브라함처럼 살라고 하시고 솔로몬처럼, 다윗처럼 살라고 하시는 것이지 솔로몬을 닮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과 예수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를 믿어야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먼저냐 믿는 것이 먼저냐 라고 했을 때 믿으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사는 것을 자꾸 분리시키니까 살지도 못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몸으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다 가짜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는데 믿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는데 다 자기 욕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면 왜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는지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 가지를 준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려면 법이 있어야 하고 영토가 있어야 하고 나라의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법은 아브라함과 했던 언약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약법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생명의 법, 살리는 법입니다.

영토는 가나안 땅이라고 얘기했는데 사실 가나안 땅은 상징의 의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하고 팔레스틴이 싸우고 있는 이유가 2천 년 동안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스라엘이 와서 하나님이 주신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70년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계속 나라가 없이 쫓겨 다니다가 1948년에 와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제가 팔레스틴 사람과 인터뷰한 내용을 들었는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 땅에서 장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 땅이라고 나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몰랐다고 그 땅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웃기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자기의 공간으로 생각하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내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오셔서 마음과 생각 가운데 들어오셔서 내 몸을 주님이 통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인처럼 살았는데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입니다. ‘엘’이 원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지극히 작은 자의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몸으로 오시는 것, 생명으로 사는 것, 이 세 가지 법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의 근원이 되려면 이 사람이 실제적으로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 말씀이 보이게끔 하기 위해서는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오죽하면 자기가 아들을 못 낳으니까 엘리에셀을 아들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큰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믿음의 세계의 실제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것입니다. 이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믿음의 세계의 실제는 여러 가지 사건들입니다. 롯하고 땅을 나눌 때에도 롯이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해서 롯이 굉장히 좋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황무지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케 하시고 황무지는 부흥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물론 신약으로 넘어오면 구약의 부자와 신약의 부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 속의 부자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부자는 로마시대의 부자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부자는 매국노이고 구약의 부자는 정상적으로 축복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자의 개념도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또 바뀌었습니다. 신약의 부자는 부자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아닙니다. 부자면 부자로 살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눠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옛날 개념의 부자는 다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말미암아 내어주심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우리한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그것이 복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십자가로 내어주는 삶이 진정한 복이고 부라는 것입니다. 존귀와 부유함이라는 말이 실제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념이 달라지는 것처럼 지금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사건들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큰 민족이 아들이 되는 것처럼 이 아들이 나중에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이 예수그리스도가 되고 그 예수그리스도가 예수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생명이 생명을 낳아서 이제는 육의 아들을 충만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을 낳아서 제자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민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됐다는 말은 이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이름, 사명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명을 깨닫는 것이 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꿔서 되는 것이 아니고 부르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함’이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괄하는 이름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내 이름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사명입니다. 제가 성경공부를 사명으로 알고 사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것이 내 삶의 이유가 되고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명이 있어야지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내가 서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의 복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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