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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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복인데 나한테 복을 주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아브라함한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복과 저주가 달라집니다. 이 원리를 알면 우리가 축복 받으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축복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저주하고 싶지 않아도 나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복과 저주를 주십니다. 아내를 팔았던 장소가 다 이방의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복을 받고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결혼을 하려면 지참금을 줘야 했습니다. 바로가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가정파괴범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행동이 아브라함에게 저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로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시 돌려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원리인데 이 원리를 모르고 사람들은 계속 복을 쫓아가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으려면 나한테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건방지게 보일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은 무례하고 조금은 건방져야 합니다.
반대로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저주를 했다면 예를 들어 차범근하고 박주영하고 축구를 했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들까?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랬더니 누군가는 하나님이 그런 것에 관심이 있겠느냐고 공은 지들끼리 차는 거고 실력 있는 놈이 이기겠지 뭐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기는 것이 과연 복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독사가 같이 놀고 사자와 어린 양이 뛰놉니다. 독사는 독을 쏘는 존재이고 사자는 양을 잡아먹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같이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고 이것이 교회입니다. 독사가 저주를 쏴도 아이는 죽지 않습니다. 저주를 해도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저주 가운데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해도 됩니다. 장성한 분량이 되면 저주가 없습니다. 원래는 독사가 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돌로 치는 사람들과 방조했던 사람들을 다 저주했다면 사도바울도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하지 않고 축복합니다. 똑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저주하지 않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고 용서에 대한 기도를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를 했다는 말은 어린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돌을 던졌다고 죽으면 안 됩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주인공 제제가 야한 노래를 부르는데 아이는 생각 없이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들으면 화가 나서 때릴 수밖에 없습니다. 욕하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그냥 욕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의미를 알게 되면 다른 것입니다. 저주도 어린아이 같은 수준에서 저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보면 그것이 신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신원하는 기도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섭섭한 마음 때문에 ‘보복하러 오세요.’ 라고 하는 그 보복의 마음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라는 것은 그 보복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보복의 마음이라든지 ‘너 죽었어.’ 라고 하는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죽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주는 없습니다. 저주를 하더라도 안 죽습니다. 우진이가 돌을 던지면 혼내야지 그 돌에 맞고 죽으면 안 됩니다. 말하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든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이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나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할 것이고 나를 축복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특권입니다. 내가 함부로 안 죽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온갖 욕을 다 했는데 결국에는 그 친구들이 와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시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망했는데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면 망함이 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는 저주가 아닙니다. 바로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도 똑같이 얘기했지만 남자에게 주고 있는 여자에게 주고 있는 뱀에게 주고 있는 모든 저주가 사실은 하나님을 기억나게 하는 저주들입니다. 그러니까 저주가 아닙니다.
사람은 흙과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되었는데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저주였습니다. 바로는 죽었다 깨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저주인데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저주가 벼락 맞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망해도 잘 망하면 됩니다. 못살아도 잘 못살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을 자꾸 버는 것, 갖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다보니까 이 복의 개념이 계속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직장을 그만 둔 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을 하고 잘 나가야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은 원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자도’입니다. 옛날에는 부자는 자동으로 천국에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형이나 능력으로는 죽었다 깨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자도 힘들다고 하는 숙어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부자도 갈 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것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부자냐 가난하냐에 초점을 둡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면의 평안, 자족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도 신약도 다 예수라고 하는 것을 통과해야지만 진리가 됩니다. 구약을 구약대로 두면 이스라엘의 종교, 유대교가 됩니다. 그런데 구약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약은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프레임을 가지고 구약을 봐야지 구약 자체로만 보면 안 됩니다. 신약 자체도 예수, 십자가가 빠져있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의결권도 안 주고 투표권도 안 주겠다고 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법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만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의무를 안 지켰다고 국민으로서의 투표를 못하게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런 법 취지로 따지면 앞으로는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만 투표를 하라고 하는 법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세금 안 낸 사람은 투표를 못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그런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다 유대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이 빛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어느 순간 빛이 들어왔습니다. 여기가 빛의 공간입니다. 그러면 빛의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같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미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둠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이라고 하는 이 죄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내가 어둠이라고 하는 죄를 늘 일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꼭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같습니다. 늘 죄를 묵상할 수밖에 없는 내가 있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을 보면 이미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의 세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늘 그 속에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왜 힘들고 어려우냐 하면 죄는 일상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빛 가운데 오셔서 우리는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빛의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너희들이 승리자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미 오셨습니다. 이 땅에 인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미 우리 가운데 그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말세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세는 The Last Day, 세상의 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세기 마다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말세신앙은 빨리 접어서 빨리 다른 세상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미선교회에 들어가야 됩니다. 또 일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종말의 신앙은 다릅니다. 종말의 신앙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누구나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늘 주님 안에서 끝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날짜와 시기가 아닙니다. 말세신앙이 너무 지나치다보니까 맨날 세상의 끝만 생각하는데 기독교인들에게는 종말론적 신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끝에서 안 믿는 것, 어둠은 심판이고 믿는 것은 승리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종말론적 신앙을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최선을 다해서 내가 빛으로 살아내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 하고 사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고 말세신앙은 빨리 정리하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