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997
12장에서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절)’
여호와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렀습니다.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는 신으로 이해했다가 이제는 여호와라는 신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였습니다. 여호와는 현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I am who I am. am이 존재동사입니다. am이라는 것이 현재형으로 나는 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는 현재 존재하는 살아있는 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 신앙은 현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지금 살아있지만 아브라함이 죽어서 없다면 또 다시 이삭에게 또 야곱에게 하나님은 현재성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하나님이 여호와신앙인데 그 여호와의 신앙이 약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 약속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받고 있는 복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늘 현재성으로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복의 근원을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는 약속을 갖고 있지만 여호와의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여호와의 신앙이 없는 것이고 또 나는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하는 것도 여호와의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앙은 늘 현재성으로 있는 것인데 지금 나에게 계신 그 하나님이 약속 가운데 언약 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살아서 우리에게 늘 인격적으로 관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복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이 현재성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2절)’
돈 많은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구약의 삶의 자리와 신약의 삶의 자리가 조금 다릅니다. 구약의 삶의 자리는 분명하게 보이는 것으로 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건강해지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부, 보이지 않는 건강, 이것이 신약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누셨을까요?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신약은 성장하고 성숙해진 신앙입니다.
사람이 관념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13세 이상이라고 합니다. 13세 이하의 아이들한테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보이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13세 이하의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산타클로스할아버지와 같은 것입니다. 선물이 곧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13세를 넘어가면 관념의 세계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념의 세계 안에서도 영적인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40이 넘어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교육은 엄밀히 따지면 40세 이후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난 것은 처음 믿을 때 주시는 특심 때문입니다. 특심은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실 때의 마음입니다. 부어진 것이 기적입니다. 저도 제 몸으로 기적을 경험했는데 그 단계를 넘어가면 하나님이 나에게 고난을 주시는데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특심은 사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을 사용하는 때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브라함한테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현재가 풍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로 가면 이제는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쫓아가는 것을 소망이라고 얘기합니다. 보이는 것을 쫓아가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신약의 이 차원이 왜 생겼느냐 하면 사실은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의 모든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없어 보이십니다.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없는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시고 잘생긴 사람으로 오시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없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보이는 것의 핵심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비밀로 오셨습니다. 신비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이 땅의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증인들이 천국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사람들인데 그것이 사실 구약의 개념입니다. 구약은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를 무찔러서 권력을 잡고 이스라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그것이 아니라고 얘기하시고 그 삶도 아니라고 얘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구약을 뛰어넘는 또 다른 약속, 새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부자와 신약의 부자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부자인 경우 그것이 축복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부하든 빈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자족이라는 것 자체가 내 마음의 보이지 않는 소망,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복입니다.
13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약속과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이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13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약속과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이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롯입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생명관계입니다. 8절에 보면 친족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13장의 핵심인 친족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롯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약속에 기반해서 아브라함의 친족, 생명관계라고 하는 것 때문에 롯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소위 빌붙어 사는 은혜입니다.
달란트 비유로 얘기하면 이자놀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도 그렇고 생명의 원리도 그런데 로마서로 얘기하면 이것을 접붙임이라고 합니다.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가 있는데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 붙이면 참감람나무로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돌감람나무가 생명력이 더 있기 때문에 거꾸로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붙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돌감람나무는 야생나무입니다. 야생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면 참감람나무로 자라난다는 것인데 성경은 거꾸로 얘기합니다. 생명력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생명인데 소위 생존력만 있는 것이지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존력이 있는 것을 진리에 접붙여야 생명력이 있게 되는 것이지 실제로 생존력만 있는 것에 진리를 접붙이면 생명력은 있지만 진리를 비진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늘 타협하고 살아남는 원리만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단에도 족보가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돌아보면 신앙에도 다 줄기가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믿어야지 해서 믿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가르쳐주는 성경공부도 사실은 다 줄기가 있습니다. 족보를 다 깔 수가 있습니다. 족보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원줄기냐 가지로 뻗은 것이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그래서 롯은 아브라함하고 붙어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와서 아브라함과 따로 사는데 사실 그 때 빨리 아브라함 곁으로 갔어야 합니다. 삼촌 집에 빨리 가서 작은 아버지 집에서 종노릇을 하더라도 살겠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야합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 잘났다고 살다보니까 딸들이 이상한 짓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원줄기이고 롯은 그것에 접붙임을 하고 살아야 되는 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생명의 원리는 1:1의 생명 생명관계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1이고 상대방도 1이면 영적으로 분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을 받으면 괜찮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또 다릅니다. 신약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다 1:1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1:1의 관계 속에서도 나에게 맡겨진 자녀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라나면 다시 1:1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은 또 다릅니다. 구약은 아주 철저하게 줄기냐 줄기가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나오는데 그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족보가 왜 그들에게 중요하느냐 하면 줄기가 있느냐 없느냐 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딱 두 사람의 줄기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존재까지 가는 줄기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붙어있지 않으면 안 되니까 붙어 있으려고 애썼던 사람들이 마태복음 족보에 나오는 다섯 명의 여자들입니다. 라합과 다말과 밧세바와 마리아와 룻, 이 다섯 명의 여자들이 다 약속 때문에 그 줄기에 붙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다 스캔들이 있었던 사람들인데 다 붙어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어리니까 이스마엘이 구박을 해서 사라가 아브라함한테 얘기해서 하갈을 빨리 내보내라고 해서 내보냈습니다. 눈치를 보더라도 거기서 살았어야 하는데 주인처럼 행세하려다가 쫓겨났습니다. 눈치도 빨라야 되고 빌붙어 살줄도 알아야 합니다. 수치도 있고 모욕이 있을 수도 있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데 그걸 다 내려놓고 붙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스러기 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통닭을 통째로 줘도 안 먹은 것이고 그 여인은 부스러기라도 먹겠다고 해서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개라고 얘기했는데 그 소리를 듣고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빌붙어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빌붙어 살아가는 신앙이 없으면 우리는 맨날 자기 멋대로 살다가 소돔과 고모라를 만나서 멸망의 자리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다 왕 같은 제사장, 1:1입니다. 목사는 아브라함이고 목사 아닌 사람이 롯이 아닙니다. 다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아브라함으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1이라고 하는 독립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의존의 관계로 가야합니다. 의존으로 가서 독립이 되어야지 상호의존이 되는 것입니다. 연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흡수는 연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연합이 되려면 1:1, 서로 독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독립을 하기 전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어야 합니다.
권위자가 되기 위해서는 또는 은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 안에서 권위 아래 있는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권위 아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권위 아래 있어 봐야지 권위자가 되고 그 권위자가 진정한 권위로 섬김을 할 수 있는 관계로 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권위자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생명의 원리입니다.
인간이 동물 중에 가장 늦게까지 부모의 보호를 받는 존재입니다. 20세 이전까지는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못한다고 규정지어 놓은 것입니다. 19세 까지는 부모가 그 아이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세가 넘어서 20세가 되면 스스로 원하는 방식대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30세까지 또 어떤 사람은 60세까지 평생 부모 밑에서 삽니다. 독립으로 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의존해야할 때 의존하지 못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생명의 원리 안에서도 내가 어떤 줄기에 누구에게 의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내가 보기에 다 불의합니다. 전도사시절에 내 위에 있는 목사님은 다 불의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목사가 되고나니까 진짜 불의한 사람과 한계를 가진 사람이 구별이 됩니다. 오류는 정말 잘못한 것이지만 한계는 자신이 가진 것 속에서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불의한 것입니다. 원줄기는 다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성입니다. 선도 악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선이셨습니다. 그런데 악인도 그런 악인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 당시에 최고의 악인을 죽일 때 사용한 사형제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형 제도를 받을 만큼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극악하고 가장 말도 안 되는 악인을 하나님 앞에 선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다른 것입니다.
내 위의 권위자가 다 불의하다는 말은 다 율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권위자들의 불의함을 내가 보면서도 견디고 버텨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백전백패입니다. 내가 권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뛰쳐나가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 두겠다고 하면 좋은 것입니다. 죽었다 개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권위자라고 해서 뛰쳐나가면 그 당시에는 시원합니다. 롯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않느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이 물이 넉넉하니 .(8-9절)’
물은 그 당시에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이 넉넉하다는 것은 그 지역이 아주 비옥한 목축의 최적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11절)’
만약에 롯이 정상적으로 견디고 버티는 믿음이 있었다면 아브라함에게 먼저 택하라고 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내어줬어야 합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롯이 볼 때는 정말 좋은 땅이었는데 그 땅이 멸망의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간 곳은 황무지였는데 하나님은 그 땅을 진짜 비옥한 땅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이 축복의 땅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갔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고 아브라함이 밟는 땅 마다 다 아브라함의 땅이고 하나님이 축복한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방지역에 들어갔을 때 그 땅에는 하나님이 없는 땅이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들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이 계시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내가 내 아이를 볼 때 부모는 눈을 떼지 않습니다. 아이가 걷는 걸음 가운데 늘 부모가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눈이 늘 아브라함한테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원래 풍족해서 멸망하게 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멸망의 땅이 된 것이고 그 곳이 심판의 땅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권리를 권위자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리를 내어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권위자가 다 불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사람한테 내 권리를 내어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인이라면, 그 권위자가 선택하는 것이 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내 권리를 내어줘야지만 견디고 버티는 것을 통해서 권위를 위임받습니다. 권위를 위임 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줄기는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줄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줄기를 통해서 내가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부어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수련회 강사로 간 적이 있는데 부흥회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어떤 청년이 자기에게 말씀에 대한 기도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원리를 알기가 쉽지 않은데 자신에게 말씀에 대한 권위가 생길 것 같다고 했습니다. 다운로드 받는 것입니다. 물론 다운로드를 받으려면 버전이 같아야 합니다. 윈도우가 깔려있어야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00페이지의 문서가 있는데 일일이 손으로 워드작업을 하려면 며칠이 걸릴 텐데 다운로드 받는 것은 1초도 안 걸립니다.
영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씨가 썩어서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이 있습니다. 내가 줄기에 가서 붙으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권위는 나를 보호해 줍니다. 그리고 권위를 통해서 1부터 10까지 다 해야 하는 그 자체를 단축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통해서 더 큰 권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10을 얻을 수 있는 경우인데 줄기에 붙는다면 100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에 생명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 차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권위에 붙어있어야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장인어른한테 머리 대고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들이댈 때가 있습니다. 부흥회에 가서 어떤 목사님이 저와 제 아내에게 기도해 주겠다고 하기에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가장 인격적인 관계에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야말로 가장 친밀한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목사 보다 원래는 부모가 기도해 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 안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인정한다면 기꺼이 머리 들이대고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롯은 그런 신앙의 세계, 영적인 세계를 몰랐기 때문에 늘 보이는 것만 쫓아다녔던 것입니다. 맨날 농담만 하고 살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다는 심각한 얘기를 했는데도 사위들이 농담으로 듣습니다. 롯이 가지고 있던 신앙이 겨우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남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롯이 살아있는 것은 사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친족이라고 하는 골육지친이라고 하는 관계성이 있기 때문에 겨우겨우 생명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권위를 롯이 몰랐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보이는 것을 선택하고 살아갔습니다.
선택을 할 때 권위자에게 권리를 내어주었어야 합니다. 내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자에게 선택권을 내어줄 때 그 권위가 나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권위는 시기와 장소와 일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가 은퇴를 했는데 새로 오신 목사님 보다 은퇴하신 목사님과 더 친하다고 해서 교회의 일을 처리할 때 마다 은퇴하신 목사님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시기에 따라 권위자가 달라지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잘 아는 목사냐 아니냐가 아니라 담임 목사님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 문제에 대해 의논할 때는 집안의 권위자에게 순종해야 하고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 세계의 권위자가 있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다가 안 나오겠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유를 물어보니까 엄마가 다니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문제인데 왜 엄마와 상의를 하느냐고 했습니다. 물론 핑계일 수는 있지만 내가 어느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서 권위자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에 있어서도 자신이 만약에 유치부담당 교사라면 유치부 담당 교역자와 얘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담임목사님과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기와 장소와 일에 따라 자신의 권위자가 다 다른 것입니다. 권위자는 바뀔 수가 있습니다.
밥 먹을 때 줄 서 있는 사람이 다 약한 자이고 주걱을 들고 있는 사람이 강한 자입니다. 주걱을 들고 있는 사람이 권위자이고 줄 서 있는 사람은 다 권위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계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자기 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3장은 롯을 통해서 줄기신앙, 원줄기의 신앙에 어떻게 반응하고 살 것인가를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이런 사람처럼 믿으라고 또 이런, 이런 사람처럼 믿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약속을 믿으면서 현재성으로 살아가라는 것이고 롯처럼 원줄기를 잡지 않고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권위아래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신앙과 롯의 신앙을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관계 안에 있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1:1의 관계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1:1인 사람은 없고 다 줄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자마자 모든 결정을 자신이 하겠다고 하는 생명이 없고 모든 생명은 서로 사랑하는 Gall로 가는 것이지만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흡수의 단계에는 독립하여 서로 사랑할 수 있을 때 까지 빌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독립을 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30대 40대가 되어도 우리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다 봐줘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의존해야 할 중학교 때부터 독립해서 살겠다고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다 문제입니다. 스무 살에 정확하게 독립시켜야 합니다. 스무 살은 신체적인 이유에서 독립의 때로 정해진 나이이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과 뇌가 다 자라야 합니다. 평생 비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뇌가 자라도 7세 이상 자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1:1의 독립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1:1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에게 평생 자기 것만 이어받아서 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1:1의 관계로 가야 협력할 수 있고 함께 무엇인가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권위자가 되려고 하면 거역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세 왕 이야기」에 보면 권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의한 권위자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거역의 사람을 무자비하게 찍어 누릅니다. 그래서 평생 거역의 사람을 쫓아다니다가 인생이 끝납니다. 불의한 권위자를 잘 통과하면 거역의 사람이 내게 와도 기다리며 잘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저도 제 위의 사람들은 다 불의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영적권위」라는 워치만 니의 책을 읽으면서 권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알고 어떤 공동체에 들어갈 때에는 적어도 권위자를 통과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들어갑니다. 딱 3개월이면 권위자의 불의함이 다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권위자를 통과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기다립니다. 한 교회에서는 6개월 만에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나가든지 아니면 3년을 더 있든지 하라고 해서 바로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3개월 됐을 때 설교시간에 사람들을 협박하고 조종하는 것이 보이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그 양반이 두꺼비로 보이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먹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이미는 시늉을 하니까 제 마음에 안정이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3개월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편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 경험이 반드시 누구에게든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척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경험을 세 가지를 했습니다.
하나는 권위자를 통과하는 시험이었고 하나는 한 자매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저한테 아비의 마음이 왔습니다. 그 자매의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자매였는데 저보고 제 딸이라고 하시면서 안아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4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자매였기 때문에 안아주지는 않고 옆에 있는 자매에게 안아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자매가 제가 기도할 때 아버지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도 저와 똑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분필로 허공에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을 도표로 그려서 보여주셨습니다. 이 도표는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숭의교회 목사님께 이 도표를 설명했더니 어디서 봤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어딘가에서 본 것이 아니라 저에게 그냥 온 것입니다.
내가 밥을 푸는 사람 앞에서 순종하면 내가 주걱을 든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권위가 그렇습니다. 은사도 네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네 가지의 형태를 다 경험한 사람은 네 가지의 은사가 다 터집니다. 그 때 그 권위를 통과했을 때입니다. 저에게도 지금 권위자가 있습니다. 내가 그 권위 앞에서 어떻게 순종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권위에 내가 복종하기 위해서는 그 권위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인격적이지 않은 권위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것은 거역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존중 받고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종과 순종이 다릅니다. 복종은 태도이고 순종은 행위입니다. 내가 권위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 있다면 복종의 태도는 가지고 있으면서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한다면 부모로써 공경하는 태도는 가지고 부모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태도가 망가져서 부모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최고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하는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나에게 맺어준 관계이기 때문에 늘 나에게 권위자입니다. 그 권위자가 정당하게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니라고 따르지 않겠다고 말은 하지만 부모는 부모입니다. 대통령을 내가 뽑지 않았어도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지켜주는 태도는 무너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정책이나 어떤 결정을 원하지 않을 때는 아니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데모를 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을 부인하거나 대통령 자체의 권위를 까먹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한테 굉장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실은 복종하면 순종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정상적인 권위는 복종하는 태도와 순종입니다. 우리에게는 권위자가 있고 또 내가 다 위임 받은 권위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권위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태도는 권위자로 인정하되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여자 교인들이 자기의 교인인지 아닌지를 확인 하는 방법이 치마를 올려보라고 했을 때 올리는 사람은 자기 교인이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남자 교인들한테는 집문서를 가지고 와보라고 했을 때 가지고 오면 자기 교인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해 천 명 정도 되는 다른 목사님들이 다 아멘 했습니다. 복종과 순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인격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사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그게 목사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 목사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아무리 비리가 있고 죄가 있어도 목사입니다. 하지만 목사다운 일을 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이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무너지면 안 되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위에 더 큰 원권위자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는 Yes, No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종은 무조건 Yes입니다.
만약에 내가 No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면 권위자가 Yes를 할 때 까지 기다리고 또 내가 권위자를 끌어내리면 안 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무너져있거나 또는 하나님이 쓰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권위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권위자를 죽이는 순간에 아무리 옳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거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린다면 신고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버지입니다. 이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 거역으로 풀려고 합니다. 목사를 내쫓은 교회에 가면 그 곳은 무덤입니다. 거역의 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거기서 십자가로 죽어야 거역의 영이 순종의 영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곳에서 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늘 거역하는 자 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의인 다섯 명이 없다면 나오는 게 맞습니다. 도망치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영웅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연걸이 주인공이었는데 진시황제를 죽이려고 몇 사람이 뭉쳤습니다. 진시황제를 죽이려면 가까이 가야하니까 나라의 공을 세울 때 마다 황제 앞으로 몇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공을 세워 황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갑니다. 공을 많이 세우면 세울수록 진시황제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네들끼리 서로 죽입니다. 마지막에 이연걸이 진시황제 앞에 섰는데 진시황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이연걸이 불의한 권위자였는데 그 불의한 권위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중국의 통일이 그가 죽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혼란 보다 훨씬 더 안정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시황제를 살려둡니다. 진시황제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중화사상을 알리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영화 안에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서 나중에 중국이 사분오열 돼서 더 큰 희생이 더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웅이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영웅이 있고 새롭게 무엇인가 만들려고 하는 영웅이 있는 것인데 중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고 살려주는 영웅이 된 것이 이연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