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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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4장은 복 있는 사람의 삶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에 복 있는 사람은 이제는 왕 같은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분과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분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권세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과 완전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신분이었고 직접적으로 권세를 주신 것은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계속 왕 위를 이어갈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도 다윗도 두 가지가 다 있는 것이고 강조점이 다를 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신분의 강조점이 있다면 다윗에게는 권세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분에 맞게 권세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복 있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 안에서의 영적전쟁입니다. 이 두 가지가 권세를 누리고 있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편 만들기입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가지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전리품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해야지 전리품이 생기고 전쟁을 해야지 내가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지 않는 사람은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데 맨날 복을 팔아서 먹는 것입니다. 부인 팔아서 취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의 바로에게 부인을 팔아먹는 부끄러운 행위를 했는데 14장은 정확하게 전쟁을 해서 그 전쟁을 통해서 나타나는 전리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편 만들기는 318명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하나님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는 존재가치를 경험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존재가치를 실질적으로 내 삶으로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편 만들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 만들기라는 것이 무슨 파, 무슨 파, 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생명을 걸고 그 가치를 위해서 같이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권세를 누리고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이고 다윗도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혼자서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름 부음 받은 왕이었지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해서 만 명과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3인이 있고 6인, 9인, 12인 아주 분명한 자기 편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싸우고 전쟁을 해야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체덱’은 의라는 뜻이고 ‘멜기’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의라는 것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관계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전쟁을 해서 승리를 해야 되고 승리를 해야만 십의 일조,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내가 굳이 갚을 필요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올바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 먼저 give & take가 되어야 합니다. 장년의 신앙에서는 give & take가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방적으로 받은 take의 경험을 하고나면 이제는 give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자람입니다. 그렇다면 give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있어야 하는데 드릴 것이 없으면 바른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라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은 바라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너도 이만큼 줘야 돼.’ 라고 할 필요가 없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의 관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소통의 관계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돈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100억을 드린다고 한들 그 100억이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돈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십의 일조가 버는 것의 십일조냐 이익금의 십의 일이냐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자신이 2천만 원 건축헌금을 하려고 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못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나빠져서 하지 못한 것 때문에 늘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2천만 원 받으셨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돈의 많고 적음은 아니지만 드려지는 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의 일조는 단순한 물질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전쟁을 준비할 때는 먼저 편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싸울 때 끝까지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으십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내 편 들어줄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분은 내가 하나님 앞에 그냥 받은 것이지만 권세는 하나님의 100과 나의 100이 더해져서 100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의 100도 필요합니다. 100 더하기 100은 200이 되는 것이 아니라 100이 됩니다.

하나님의 99가 있지만 나의 1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1이 믿음인데 나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 믿음의 내용은 단순하게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위임하고 위탁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나의 헌신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정말 무궁무진합니다. 물이 99도에는 끓지 않고 1도가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99라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1퍼센트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분은 그냥 100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나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그냥 믿음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믿음의 삶인데 그 믿음의 삶 중에 하나가 편 만들기입니다. 가장 외로운 황야의 무법자처럼 혼자서 가는 것은 불교입니다. 기독교는 떼를 지어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자이지만 함께 더불어서 가는 데모꾼들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승리하리라.’ 노래를 하면서 같이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같이 가는 사람들입니다. 혼자서 100 발자국 가면 안 됩니다. 100 사람이 한 발자국 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 왜 힘드냐 하면 내가 볼 때는 100 발자국을 가야 하는데 그리고 갈 수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걷지도 못하니까 참고 견뎌서 가도록 기다려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14절)’

첫 번째는 길리운 자이고 두 번째는 훈련된 자입니다. 편 만들기를 할 때 첫 번째로 중요한 원리가 길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길리운 자는 그 집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세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팔리운 종인데 돈을 주고 산 종을 말합니다. 백만 원 주고 산 종이 있고 천만 원 주고 산 종이 있다면 아마도 천만 원 주고 산 종이 더 충성스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더 대우해 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팔리운 종은 그 돈의 가치만큼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팔리운 종이 어느 순간에 안식년이 되거나 희년이 되면 해방을 시켜야 하는데 해방시킬 때 나는 죽어도 주인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 종이 있는데 이런 종을 귀뚫린 종이라고 합니다. 귀 뚫린 종은 귀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평생 자기 주인을 섬기고 살겠다는 의미로 귀를 뚫는 것입니다. 귀 뚫린 종의 장점이 자원함입니다. 은혜 보다 더 큰 것이 자원함입니다. 내가 기꺼이 주인으로 섬기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종이 있습니다. 그 종이 길리운 종입니다. 길리운 종은 그 집에서 태어난 종이고 그 집에서 주인의 아들과 같이 자라났습니다. 같이 먹고 자고 살다보니까 주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잘 알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이 아들이 없을 때 자기의 모든 상속권을 엘리에셀에게 줄 정도로 단일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길리운 종은 주인과 같이 동고동락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318명은 그 집에서 태어나서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최초의 고아원 원장이 아브라함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318명에 그 가족들과 아브라함의 가족까지 아마도 천 명은 넘었을 것 같은데 그들을 다 먹여 살린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최초의 밤 전쟁이 나오는데 밤에 전쟁을 할 정도면 그만큼 친밀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남들은 다 대낮에 싸우는데 이들은 창조적인 전쟁을 한 것입니다. 부부가 20년을 함께 살아도 눈빛만 가지고는 서로의 마음을 잘 모르는데 그들은 눈빛만 보고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정도로 친밀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목소리만 듣고도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관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OOO집사님을 만난 지 이제 6년 정도 되니까 이제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은 보입니다. 그럴 정도로 친밀감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길리웠다는 것은 시간의 공유가 있었고 물질의 공유가 있었고 생각의 공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모이는 것에 힘쓰라는 것이 편 만들기, 생명관계의 가장 기본입니다.

아가서의 기본이 함께 시간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모여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사실은 허비하는 시간 같아 보이는데 생명관계를 만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진짜 단일을 이루면 시간의 영원성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생각하면 늘 언제 관계를 끊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선택권이 없고 원수와 영원히 같이 거해야 한다면 처음에는 괴로워만 하다가 점점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까 방법을 찾으려고 애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히 함께할 것을 전제하지 않고 늘 관계를 끊을 것을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명관계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장 타락한 말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입니다. 그 말 때문에 예전에는 술을 한 잔 더 마시곤 했는데 성경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이 말이 얼마나 악한 말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것, 영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악함입니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관계로 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평생 미워하지 못하는 이유가 천륜이기 때문인데 하나님이 하늘에서 맺어주신 관계, 천륜은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가 없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너무 미워도 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신뢰를 먼저 줘야하는데 신뢰를 준다는 말은 영원성으로 가려고 하는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뢰를 주지 못합니다. 상대가 하는 것에 따라서 영원성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도 똑같이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말을 안 해도 압니다. 영원성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어느 순간 관계를 끊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압니다. 눈빛을 보니까 신뢰를 못하겠으니까 상처 받지 않으려고 미리 관계를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보호합니다. 언젠가는 관계를 끊을 사람이니까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배신은 약함에서 오는 것이고 배반은 강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배신과 배반을 당할까봐 미리 배신하고 배반합니다. 사실은 영원성으로 간다는 것은, 집에서 길리우고 동고동락하고 친밀감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간과 물질과 생각의 공유와 희생과 헌신도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이 배신과 배반을 각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편을 못 만드는 이유는 배신과 배반을 너무 많이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너무 큰 상처로 오기 때문이 미리 길리움 당하지 못합니다. 잠깐 맡을 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과 주안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좋았다 싫어지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안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주’가 영원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한다고 해서 밋밋한 사랑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역동성이 있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힘들어 하는 그런 과정이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길리우고’를 해야 합니다. 나에게 길리우는 사람도 있고 길리움을 당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편 만들기의 가장 기본입니다. 이 마음이 없으면 편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훈련된 자입니다.
훈련의 기본이 절제입니다.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한 것인데 너무 솔직해도 문제가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는 진리는 율법주의로 빠질 수 있는 것이고 또 진리가 빠진 사랑은 헤프기 때문에 질퍽거리면서 결국 너 죽고 나죽자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살인 사건의 원인은 두 가지, 관계와 물질 때문인데 같은 편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절제입니다. 절제가 빠지면 공동체는 우후죽순이 되어버리고 공동체 자체가 오히려 다른 공동체를 헤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술의 가장 고수는 거의 안 움직입니다. 신앙에서도 같은 편이라면 절제의 훈련이 있어야 되는데 절제가 바로 자기 자리 찾기입니다. 자리 찾기는 은사 찾기입니다.

편, 공동체를 깨는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다보면 공동체가 깨집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은사도 다 다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행정 처리를 하는 사람이 있고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고 기도를 하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기도 자체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정체성,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맨날 우왕좌왕 하고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공동체를 깹니다.

아브라함과 318명의 용사들은 밤 전쟁을 했지만 가서 우왕좌왕 하면서 싸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조직적으로 굉장히 치밀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싸웠기 때문에 적군인지 아군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편 만들기라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자리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은사를 찾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만 보면 부담감을 갖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은사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너무 기쁘다면 그것이 또한 은사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시간을 기도했는데 너무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5분을 기도해도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기도가 은사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상처가 은사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고난 가운데 들어가시고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자가 되었고 우리도 위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받은 고난이, 상처가 다른 사람을 감싸주고 품어줄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가 잘 한다고 칭찬해 주는 것이 편 만들기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권면이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은사를 발견하고 찾아주고 은사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편 만들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공동체에서 직접 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을 공동체 안에서 직접 해 보는 것입니다. 해 보니까 잘 된다면 밖에 나가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 된다고 멀었다고 한다면 될 때 까지 계속 공동체 안에서 해 보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지쳐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월요일 마다 목사님들이 모여서 찬양을 배웁니다. 요즘은 계명 읽기를 하고 있는데 박종진 목사님이 아주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기본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잘 하시는 분들이 스스로 지쳐주고 계십니다.

은사를 찾도록 도와주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시간을 내어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편 만들기입니다. 편 만들기가 가치만 두고서 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318명에게 ‘우리 모두 예수 믿자.’ 하고 관계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 집에 살다 보니까 하나님을 당연하게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냐고 존재에 대해서 묻지 않고 하나님 자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에게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관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뢰이고 그것이 편 만들기입니다. 그리고 편을 만들어서 전쟁을 해야 합니다. 전쟁을 하는 이유는 생명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가지고 318명을 거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물질의 세계를 통해서 자꾸 영적인 세계로 가려고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총리를 꿈 꿔야 되고 나라를 세우는 꿈을 꿔야 되고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꿈을 꿔야지만 하나님이 쓰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성경은 영적인 꿈을 꾸기 시작해서 물질의 세계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논리는 다 물질의 세계를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전쟁은 다 영적전쟁이고 영적전쟁은 곧 생명싸움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했던 이유는 골육지친, 자기 조카를 살리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다 먹을 것을 위해서 싸우는 전쟁이었는데 성경에서 첫 번째 전쟁인 아브라함의 전쟁은 생명을 찾는 전쟁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싸워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고 그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 대해서 싸우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내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골육지친, 생명 관계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한테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라는 것을 알게 하실 때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후사로 살 때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릴 때만 기적이 일어나고 나한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리품은 내가 전쟁을 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 앞에서 얻어지는 것인데 나를 위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바울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자기 몸의 가시 때문에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것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맨날 나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예요?’라고 묻는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를 보면 사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소대원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전쟁을 하려면 살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편 만들기를 할 때도 배신과 배반을 각오해야하는 것처럼 내가 그 전쟁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생명을 구할 수 없습니다. 편 만들기가 십자가의 삶입니다.

저는 애를 낳아보지 않았지만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죽어도 셋째는 낳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를 낳으려다가 정말 죽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과정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 것처럼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을 해야 합니다. 생명을 낳으려면 내 자신의 죄와 세상과 잘 타협하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내 자신의 죄와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사단이 나에게 와서 하는 최고의 위협이 ‘너 그러다 죽는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최고의 보호는 ‘절대로 생명은 건드리지 말라.’입니다. 생명은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사단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리 무서운 귀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합니다. 문제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은 영원성을 갖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낳은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과 단일을 이룰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생명을 통해서 얻어지는 전리품인데 그 전리품이 하나님과 내가 단일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를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가 결혼반지 같은 것입니다. 반지를 끼는 순간에 동등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B.C 2천 년 전에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관계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남자 와 여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할수록 여자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증인이 될 수도 없었고 남자에 속한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원래 부부의 관계는 처음부터 동등했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과 사람이 동등하다는 의미입니다. 지아비는 하늘과 같은 존재라고 했었는데 요즘은 땅 값이 비싸져서 여자가 더 비싼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시작의 때에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라고 표현하는 이 자체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한 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해도 나를 지켜주고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 안에서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크리스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편에서 볼 때 상대를 내 몸으로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았을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나와 관계를 하고 있어야 하고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공유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공유는 신앙, 예수의 피입니다.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예수의 피가 없다면 내 편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DNA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몸으로 받겠다고 기다려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공유의 감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모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단순하게 예배에 참석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전 뜰과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느끼는 감정이 다 다릅니다. 성전 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성소에서의 경험을 모르고 또 지성소에서의 경험을 모릅니다. 물론 크게 봤을 때는 한 형제, 한 편이 될 수 있지만 한 편 안에서도 또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도 갈라졌고 그 중에서도 또 갈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요한이냐 베드로냐 얘기하기도 하지만 갈라지는 것이 관계입니다. 아가서로 가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 친밀감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다 가짜입니다.

편 만들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인가 영화를 보니까 여자들은 서로 비밀을 공유할 때 친하다고 느낀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둘 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비밀스럽고 신비한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하는 공식적인 만남만 갖는 것입니다. 드레스 입고 서로 멋있다고 인사하는 관계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과는 그런 관계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편 만들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그런 관계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친밀함이 없는 공식적인 관계는 힘이 없습니다. 적당히 관계하는 사이라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공격을 외치면 다 도망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상도동에서 살 때는 절친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존재를 다시 봐야합니다. OOO집사님은 부모님 아래서 19OO년에 태어난 OOO가 아니고 원래 하늘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자꾸 전라도 사람, 충청도 사람, 몇 년생, 정씨 집안, 이씨 집안 이런 것을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니까 단군할아버지를 조상으로 섬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육의 관계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씨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단군의 씨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씨라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OOO는 born again 거듭난 존재입니다.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에 관계를 해도 거듭난 사람의 편 만들기를 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 아들, 우리 딸을 따지는 관계로 살면 맨날 인간적으로 슬프고 괴롭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알게 되어야지만 그리고 실제로 내 삶 속에서 그런 관계가 일어나야지만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씨입니다. 육신의 형제 보다 더 가까운 예수의 피를 받고 태어난 형제입니다. A형, B형, O형 이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예수피입니다. 아닌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뢰하고 배신과 배반을 각오하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자꾸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육을 통해서 영을 봐서도 안 되지만 영을 영으로 풀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영에서 육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여기서 신뢰하면서 잘 살아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모두 다 사랑하리.’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이 천국의 그림자이고 모형인데 여기에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똑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육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이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나를 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는 그 집에서 아버지의 피를 받아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뜻과 소원과 목적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후사는 아버지가 원하는 가치를 알고 아버지의 뜻과 소원과 목적도 이루고 살아갑니다. 자녀는 아버지한테 받을 것만 생각하고 살고 후사는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아버지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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