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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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꿈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종교는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인데 신앙은 그 복의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종교의 복은 자기중심의 복이라고 한다면 신앙의 복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나라는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내가 소유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신앙은 자기를 내어줌으로 인해서 그 속에 누구와 함께 있느냐 라고 하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공동체에 관심이 있으신데 하나님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그리스도가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루시고 성령께서 그 이루신 것을 영원성으로 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이면서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자체가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은 혼합도 아니고 각각 독립되어 있지만 또 단일을 이루고 있는 신비가 삼위일체입니다.
그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하나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이루시려고 하는데 나라에는 법이 있고 통치 받는 공간이 있고 통치하는 주체가 있습니다. 헌법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와 국민, 이렇게 세 가지의 요소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생명의 법이 어떤 때는 율법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그것이 복음으로 오기도합니다. 공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곳, 제단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법궤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성전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것인데 신약에서는 몸이 됐습니다. 사람의 몸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통치 받는 객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 세 가지의 요소들을 다 갖추었습니다. 제사법에 대한 언약을 합니다. 제사법은 모세 때부터 생긴 것인데 사실은 그 이전으로 가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있습니다. 제사가 생긴 이유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만났던 존재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만나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죄를 없애는 방법이 제사법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오면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한 번의 제사, 예수그리스도의 제사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
의인이 죄가 없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직접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첫 번째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고 로마서가 그 얘기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셔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법은 의의 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 나오는 가나안 땅의 10부족이 가나안 땅의 시작과 끝입니다. 6부족이 살고 있는 공간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 공동체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로 만드시겠다고 하는 가나안 땅의 공간입니다. 그리고나서 주체인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서 2절에 보니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 주인과 단일을 이룬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한 종을 상속자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온 자녀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5장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의의 법, 가나안, 하나님나라 백성, 이 세 가지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의인이 있었습니다. 에녹도 있었고 셋도 있었고 노아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의 법은 나중에 하나님의 통치자, 후사로 나가는 것입니다. 후사는 다윗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두 가지 언약이고 그 사이에 모세의 언약이 있습니다. 모세의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후사로 가는 과정에 있는 율법입니다. 로마서로 얘기하면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인데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이 마음이 동해서 죄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가 됐다고 하는 것을 빼앗기고 어느 순간에 자기 거룩함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룩함을 지켜내는 것 자체가 종교입니다. 종교는 맨날 자기만 보는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진다는 순간부터 종교성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한 것입니다. 내가 깨끗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깨끗해지는 것에 내 시선이 가 있고 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맨날 그것을 가지고 씨름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비교하고 경쟁하고 정과 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떠나려면 내 거룩함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거룩하게 할 것인가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종교와 신앙은 기본은 의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통치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통치자는 좀 다릅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열심이 100%, 사람이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담성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될 수 없는 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을 살아내는 것이 다윗으로 얘기하면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정복하고 다스리라.’ 는 말씀이 있는데 정복의 원어를 찾아보면 섬김입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열심 100%와 사람의 열심 100%가 만나서 100%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믿음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부담감과 나의 부담감이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부담감과 나의 부담감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헷갈리면 사람들이 거꾸로 갑니다. 나의 부담인데 하나님의 부담으로 넘기고 하나님의 부담을 나의 부담으로 느낍니다.
카톨릭에서는 사람의 열심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에 예식을 지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열심도 사실은 믿음입니다. 이신칭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해진 것이지만 이신성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믿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본을 보여준 것이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이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줬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의의법과 가나안 땅과 하나님 나라 백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언약인데 언약이라는 것이 내용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나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귀신이나 다른 영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보좌싸움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을 이루는 것은 나입니다. 언약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라고 하는 존재의 신뢰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약의 관계를 상징하는 관계가 바로 신랑과 신부의 결혼식입니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도 맞먹는 관계가 되는 것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이 부부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인데 하나님과 내가 단일을 이루는데 하나님도 있고 나도 있습니다. 창조주 안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들어갈 수가 없는데, 흡수 되어서 없어질 존재인데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철저하게 1:1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언약의 관계를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내어주시고 나를 들어 올리십니다. 하나님은 내리시고 사람은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1:1의 관계를 만드는 조건입니다. 1:1의 관계 안에서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이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로 보면 구약은 화면과 같고 신약은 자막과 같습니다. 구약은 역사 속에서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신약은 그것에 대해서 풀이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림을 통해서 나타내지는 것이 제사법이라든지 자손의 번창이라든지 의의 법을 얘기하시면서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땅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언약이라는 것 자체가 그냥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역사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역사가 되는 것이고 말씀이 사건이 되는 것이고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이고 기독교는 실재의 사건이고 기독교는 생명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뭔가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뜻을 찾고 그것에 대한 목적을 찾는다면 기독교인들은 말씀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이 있어야지 역사가 되는 것이고 사건이 되는 것이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쓰여진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세기에 아주 유명한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씀을 세 가지로 얘기했습니다. 쓰여진 말씀이 있고 나타난 말씀, 예수가 있고 선포된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선포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모인 것도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언약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나와 하나님이 관계를 합니다. 그 관계를 In Christ라고 얘기한다면 하나님과 내가 관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In Words, 이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는 비전이고 내가 살아야 될 목적이 되는 것이고 내가 그것에 대해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꿈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말씀을 믿으면 그 믿음을 가지고 Prayer,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말씀을 추적하는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골방에 앉아서 기도하는 것은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고 이제는 눈을 뜨고서 그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도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내는 기도를 통해서 response, 응답해주십니다. 응답에는 두 가지, 믿음의 응답과 현실의 응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현실로 나타나는 때는 또 다릅니다. 다니엘이 기도를 했는데 천사가 오는데 21일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데 3일이 걸렸습니다. 21일과 3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시간은 2000년에서 25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예수인데 복의 근원의 핵심이 예수인 것입니다. 믿음의 실재가 현실의 실재로 나타나는 것은 또 다른 것입니다. 현실의 실재로 나타나는 시간이 죽음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부재의 시간이고 자신의 죽음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통과해야지 response를 받으면 내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입니다. worship하는 자가 됩니다. 만약에 그것을 내 노력으로 했다면 하나님을 worship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끝났다고 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worship하는 것입니다.
In Christ가 1, In Words가 2, Prayer가 3, response가 4, worship이 5입니다. 창세기 12장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확신을 했는데 중간에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육신의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원래 육신으로는 낳을 수 있는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영의 아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이해도 되지 않고 설명도 안 되는 아들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것이 믿음으로 왔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정상적으로 낳았는데 육신의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1번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한과 욕심과 야망으로 기도합니다. 한은 과거에 풀지 못한 것, 욕심은 옆에 사람보다 좀 더 갖으려는 것, 야망은 내 뜻을 가지고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과 욕심과 야망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기도를 하는데 늘 채우지 못하니까 기도를 안 들어주신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을 달랩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어떤 가치로만 또는 내 삶의 지침정도로만 생각하는데 생명을 살리는 말씀은 좋은 가치나 지침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은 실재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떡입니다. 말씀이 떡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사람들은 떡만 보고 사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면 떡이 나오느냐고들 하는데 떡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또는 구약의 역사가 단순하게 좋은 교훈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성경에 나온 사람들이 가장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반도덕, 반윤리는 아닙니다. 도덕과 윤리를 초월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가치를 가지고 생명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거룩해지려면 빨리 이 속세를 떠나는 것이 방법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그냥 나에게 덤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고 지저분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숙제이고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빨리 도덕과 윤리를 떠나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제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기독교인들의 뇌를 없애버렸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질문을 하면 맞았습니다. 무조건 외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 그런 질문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소위 information의 성경공부를 주로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공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살아내지 않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내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는 절대자존감을 가지고 있어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춤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탱고는 박자가 갑자기 빨랐다가 느려졌다가 하면서 추는 춤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춤을 춰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멈추라,’, ‘가라.’ 하고 그 때 그 때 다릅니다. 그래서 그 때 그 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밤에 이삭을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다음 날 새벽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됐다고 그만하라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제 들은 말씀이 있으니까 무슨 말씀이냐고 사단이면 물러가라고 하고 찌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멈추라고 하실 때 멈추어야 합니다. 어제하신 말씀과 오늘 하시는 말씀이 다른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왈츠는 거의 일정한 박자로 춤을 춥니다. 탱고는 상대와 서로 떨어졌다 붙었다하는데 왈츠는 상대와 떨어지지 않고 우아하게 추는 춤입니다. 절기신앙은 1년 동안 절기를 지키는 신앙을 말하는데 계속 같은 왈츠처럼 패턴으로 돌아갑니다. 대강절부터 시작해서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에 이어 그 해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어린아이 때 세례를 받고 점점 자라서 성인이 되는 인생의 과정 중에 그 나이 때 마다 느껴지는 신앙의 경험들이 있습니다. 「20대에 해야 될 50가지」라는 책이나 「30대에 해야 될 50 가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죽기 살기로 사랑해 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돈 안 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이 자기의 인생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통과 점들이 있는데 그것을 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40대에 10대나 20대처럼 사춘기를 겪게 됩니다. 성인아이입니다.
세 번째 춤은 이름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춤추는 모습을 설명하자면 강강수월래처럼 성부, 성자, 성령과 내가 같이 손을 잡고 뱅뱅 도는 것입니다. 그 춤은 공동체가 함께 추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빨리 나가도 안 되고 손이 떨어져도 안 되고 함께 동그랗게 서서 손을 잡고 추는 춤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는 이 세 가지의 춤을 동시에 춰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 생명은 단순하게 1+1=1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들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험문제에 문학작품‘감자’가 나왔는데 문학적으로 비평을 하라고 했는데 읽어본 적이 없어서 답안지에 온갖 감자요리법부터 시작해서 감자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서 A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창조적으로 답을 쓴 학생은 처음이라고 하시면서 좋은 점수를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국어의 세상이고 인문학의 세상입니다. 이과생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독일어시험을 봤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해서 도저히 쓸 말이 없으니까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민주주의여 만세’ 이렇게 써서 냈는데 D¯라는 점수를 주셨습니다. 패스만 된 것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 뒤로 독일어를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만난 어떤 목사님은 관계가 다 깨져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 사랑은 있는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그 사랑은 없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람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한테 배운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실재라는 것은 말씀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내가 잘 알겠는데 사랑은 모르겠다고 한다면 실재가 약한 것입니다. 실재는 변화무쌍합니다. 말씀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그냥 진리인 것인데 그 말씀을 그냥 사람한테 들이대면 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 죽여야 합니다. 말씀이 실재라는 것을 보기 이 전에 그 사이에 선악과가 있습니다. 선이냐 악이냐 구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 악합니다. 선악과의 문제는 다 악한 것입니다. 선도 악으로 봅니다. 이 선악과를 넘으려면 생명나무로 가야 되는데 사람이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호합니다. 그 모호함을 견디는 것이 신앙입니다. 진리는 분명한데 그 진리를 사람한테 들이댈 때는 모호하다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고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호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빨리 판단하는데 판단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 다 악입니다.
모호함의 견딤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모호하다는 것, 내가 75점이라는 모호함이 있습니다. 80점이 되면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80점으로 올라가면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또 모호한 것입니다. 그 모호함 때문에 견딜 수 없어서 빨리 죽고 싶습니다. 모호함 때문에 빨리 죽이고 싶습니다. 모호함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고 모호함이 생명입니다.
모호함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느냐고 사람들이 항상 질문합니다. ‘예’도 있고 ‘아니오’도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진리는 ‘예’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오’입니다. 그런데 판단은 모호해야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으니까 분별은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가지고 내가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해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될 때까지입니다. 평생 안 될 수도 있습니다. 2500년 뒤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호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1:1로 그렇게 대우하셨습니다. 우리를 완성품으로 보지 않으시면 1:1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언약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언약이 맺어졌다고 하는 순간에 이미 나와 하나님은 독립적으로 온전하다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온전하고 나도 온전합니다.
복음은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복음은 하나님과 내가 대등하다는 것입니다.
내 편인 사람들과는 모호함을 함께 경험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치면 318명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 롯을 둘러싸고 있는 악한 세력이 있습니다. 이 악한 세력은 신약으로 얘기하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라고 하는 혈과 육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라 가치입니다. 똘똘 뭉쳐서 자기들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 안에 나에게 맡겨진 살리는 영이 있기 때문에 영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구약으로 얘기하면 10부족과 싸워야 하는 것이고 신약으로 얘기하면 10부족이 가지고 있는 가나안의 신앙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단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318명과 같이 싸워야 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이 나를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역리를 순리라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할 때 ‘그게 아니야.’ 라고 얘기하는 내 편을 데리고 있어야 합니다. 롯을 살려내는 것이 순리의 가치로 변화시키는 것이지 단순히 누구와 싸우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자와 양이 함께 뛰놀고 있어야 합니다. 사자가 잡아먹으려고 해도 잡아먹히지 않고 독사가 독을 쏘았는데도 어린아이가 죽지 않습니다. 야망과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해도 나는 죽지 않고 같이 잘 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는 아닌데? 그 가치는 잘못된 가치인데?’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잘못 살고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순리의 가치를 가지고 잘 살고 있는 자기편들을 보여줘야 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그 사람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사자와 독사와 함께 놀고 있으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쉽게 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걔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면 안 됩니다. 왕이 되지 못한 불쌍한 사자와 독을 쏴도 죽지 않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독사를 보살피면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살이입니다. 그냥 그들과 같이 뛰놀며 잘 살면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가치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와 가장 가깝다고 하는 1차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나쁜 짓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과도 싸워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얘기하고 바로 주님의 발목을 잡고 가시면 안 된다고 하니까 주님이 ‘사단아, 물러가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광을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과 멀리 있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 이상의 구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