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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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라고 하는 두 아들이 있는데 이스마엘은 이방인이고 이삭은 이스라엘사람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인데 원래 이스라엘이 작지만 열방의 대제사장의 나라로써 또 이방인들을 섬겨줍니다.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예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국가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싫어합니다. 페션 오브 크라이스트라고 하는 영화를 만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이 아직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하는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님이 나오셨지만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인들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지만 그 선민이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살인이라고 해야 할지 살신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민이 신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데 그 믿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앙의 믿음인데 선민이 하나님을 죽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아이러니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장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장자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은 점점 가르시는데 가른다는 것은 분별하는 것이고 쪼개는 것이고 키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키질을 하면 할수록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은 떨어집니다. 쭉정이의 본질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선민은 예수그리스도를 죽였는데 이방인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안에서도 영적인 이스라엘, 이방인 안에서도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구약의 역사는 피의 가름이 있다면 신약의 역사는 영의 가름이 있습니다. 신라의 골품제도를 보면 성골, 진골, 가문을 가르는 것처럼 피가름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약은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피가름이라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피가름의 반대가 영의 가름입니다. 피라는 것은 육신의 것이라면 영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밭에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심을 당하고 한 사람은 데려가지 않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엄마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가 됩니다. 작가 공지영은 아빠가 다른 세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작가의 아버지가 그래도 배는 같아서 다행이라고 했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가 있는데 엄마가 같고 아버지도 같고 에서를 첫째로 세우고 야곱을 둘째로 세우셨는데도 에서는 버리고 야곱은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마음입니다.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피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영의 가름이라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사실은 다 가짜입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EBS에서 공자와 노자에 대한 인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공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개념, 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틀이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를 빨리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념이 없는 사람이 있고 예의가 출장 나간 사람이 있고 게다가 자기 자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용히 해야 할 자리에서는 떠들고 떠들어야 할 자리에서는 조용히 있습니다. 청개구리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에서는 말이 중요합니다. 말이 정확하지 않으면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자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과 끝이 동시에 있고 아름다움과 추함이 동시에 있고 각각의 모서리가 동시에 있다고 합니다. 완전히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기다림 속에 있는 것입니다. 중용입니다. 중용은 자기 자리가 있지만 자기 자리를 100% 믿는 것이 아니라 반대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쪽에 서서 저 쪽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리가 모호합니다. 모호하니까 말이 아니라 ‘무위’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공자와 노자를 섞은 것입니다. 공자와 노자가 말씀입니다. 야구의 베이스에 1루, 2루, 3루가 있습니다. 1루에서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입니다. 그런데 2루에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3루는 산이 산이면서 물이고 물이 물이면서 산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1루에 있는 사람은 맨날 ‘있음’만 찾습니다. 나는 있어야 되는 사람이고 내가 무엇인가 차지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선거를 했다면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진 것입니다. 그런데 1루에 있는 사람은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면 없는 것이 참 많아집니다. 제가 정말 노래만 잘했어도 이렇게 안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는 노래를 잘 하면 교회오빠가 됩니다. 교회 오빠들은 다 회장님이 됐는데 저는 노래를 못 해서 회장을 한 번도 못했습니다. 1루에 있는 사람은 다 있을 수 없으니까 맨날 슬픈 것입니다.
2루에 있는 사람은 없는 것도 알게 된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알게 된 것입니다. 1루까지는 다 갑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긍정하고 사는 것은 2루까지 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3루는 부정과 긍정이 같이 있습니다. 2루만 있는 사람은 고행주의자,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구름 타고 붕붕 떠다니듯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사는 것, 산이 산이 될 수도 있고 산이 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3루입니다. 소위 무위입니다. 있는데 무위로 사는 것입니다. 무위가 원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갑자기 2루로 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안타를 치고 2루로 바로 뛰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2루에 가 있는데 1루가 안 된 사람이 있습니다. 강사가 말하기를 공자는 귀공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면 노자는 짐승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짐승의 눈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이지만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압니다.
자꾸 공자는 자기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노자는 자연이나 상황이나 사건이나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의 눈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열심히 한 이유는 아브라함의 피 자체가 산은 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가서 영의 세계로 가면 2루와 3루로 가야합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1루로 살 수가 없습니다. 1루도 필요하긴 합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씨를 가지고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로마서로 얘기하면 믿음의 라인으로서의 피의 아브라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육신의 아브라함입니다. 육신의 아브라함은 피의 가름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에 점프해서 2루와 3루 쪽으로 가서 이제는 영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래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16장은 이스마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갈이라고 하는 사람은 공자의 개념으로 얘기하면 사라의 종입니다. 종이기 때문에 사라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생명을 갖는 순간에 거역했습니다.
하갈과 사라는 공자의 개념으로 보면 운명처럼 자기 자리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는 종이고 하나는 주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택하신 주인과 종이라고 하는 이 관계 속에서 종이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 얘기하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쫓겨났습니다. B.C 2500년 전에 한 집안의 여자가 둘인데 한 여자는 아들을 낳고 한 여자는 낳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자기 자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갑자기 역전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 후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도 그렇지만 영적으로도 이스마엘은 사실 장자입니다. 그래서 하갈이 갑자기 주인행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생명은 시작도 끝도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임에도 불구하고 하갈이 거역을 하니까 하나님은 그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사라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성경은 1:1의 관계입니다. 1:2나 1:3이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간음이 되고 우상숭배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1에 사라 1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 언약, 계약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관계가 왜 중요하냐하면 신약, 구약의 약이 약속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계약서를 가지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말과 말, 인격적으로 함께 계약에 대해서 인정하고 동의하고 합의해서 존재와 존재로서의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도 1:1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가려면 주님과 이혼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지 돌아올 명분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뒤 돌아 갈 때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명분이 말씀입니다. 말씀이 있어야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있는 말씀을 보면 말씀가지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길이고 말씀이 명분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미지근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세상 잘 믿는 것 같고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요리조리 잘 빠져나갑니다.
아브라함이 그 짓을 한 것입니다. 사라를 두고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한 번 낳아볼까? 생각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사라를 내쫓고 하갈과 관계를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하게 이상한 집안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살아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이상한 애와 관계에서 생명을 낳고서 거기에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면 둘 만의 관계가 깨지는 순간에 이 자체가 합법적이지도 않고 생명은 생명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16장에서 첫 번째로 언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면 내가 받은 말씀을 돌에 맞아 죽을지언정 지키고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생명을 낳을 때 까지,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맨날 갈아타기 하고 맨날 우상을 쫓아다닙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아멘’의 신앙이었고 요셉의 신앙은 ‘인내’의 신앙이었습니다. 아멘신앙과 인내의 신앙으로 인해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예수가 말씀의 실재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멘 했습니다. 그런데 인내하지 못하니까 하갈을 통해서 애를 낳아서 이스마엘이 나왔습니다. 예수가 나와야하는데 예수가 안 나온 것입니다. 이삭이 없으면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 조상이 고려의 정호걸씨라고 합니다. 그 분이 없었다면 저도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이 예수입니다. 이삭이 예수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인내를 통해서 이삭을 낳아야 되는데 ‘아멘’하고 나서 참지 못하고 덥석 잡았습니다. 1루, 2루, 3루 순서가 있는데 갑자기 2루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2루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다려야 합니다. 이삭을 낳을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이 언약다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 계약의 관계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인격의 관계는 복종과 순종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거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는 인내가 말씀에 복종하는 태도와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라고 하는 복종의 태도를 가지고 몸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복종과 순종으로 이루어져야 되는 것인데 2루로 바로 가려고 하갈과 관계하니까 거역으로 가서 하갈도 자기가 생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해서 뒤엎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갈이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인내의 태도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복종과 순종의 관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갈은 배가 불러서 너무 힘든 상태인데 만약에 사라가 몸으로 해야 하는 심부름을 시켰다면 복종의 태도는 가지고 있지만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복종이라는 말을 잘 못 이해하니까 사람들이 복종과 순종을 동시에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이 힘들어도 합니다. 내가 아무리 종이지만 주인이 시키는 것에 대해서 다 따라야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님’ 이라고 복종의 태도를 가지고 말하지만 ‘지금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종과 순종을 오해하다보니까 종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조건 주인의 말을 다 따라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종에게도 인권이 있습니다. 주인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하다가 권위주의가 되고 종이 종살이를 하면서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하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 아버지의 직업이 웨이터입니다. 웨이터 일을 시작하면서 인사하는 연습을 하는데 90도로 인사를 하니까 지배인이 비굴할 필요 없다고 15도로만 인사하라고 얘기합니다. 관계 안에서 주인과 종도 변화무쌍합니다. 내가 영란 자매한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배우고 있는데 배우는 순간에는 영란자매가 주인입니다. 그런데 물 떠 오라고 한다고 해서 떠 오는 관계는 아닌 것입니다.
복종과 순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종살이를 해도 비굴해지고 주인노릇을 하는데 권위주의가 되어서 교만해집니다. 교만과 비굴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약해지면 비굴해지고 비굴한 사람이 올라가면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복종하면서도 순종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내 입장은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하갈이 종으로서 아이를 가졌다 해도 종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거역을 했습니다.
세 번째 하갈이 주인노릇을 하다보니까 사라가 여호와의 판단을 바랍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든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절-6절)’
관계는 인간과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그 관계를 판단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은 개념적인 것이고 복종은 그 개념에 따라서 자기의 위치,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공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공자의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예의를 지키고 질서를 지키고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역동이고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뒤로 돌아가라고 하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모른다는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신비의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도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생각을 통해서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바지를 벗고 3년 동안 돌아다녔습니다. 예레미야는 원수의 나라에 자기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합니다. 매국노입니다. 매국노이고 정신 나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떠나있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저는 사라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라면 하갈하고 죽었다 깨도 더 이상은 같이 못 산다고 내보내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판단하시라고 합니다. 자기의 판단을 내어줬습니다. 그리고 하갈을 욕하지 않고 남편을 욕합니다. 남편책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판단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1:1의 관계인데 하나님은 권위를 남편에게 주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얘기를 했더니 감신대 후배들한테 제가 꼴통이 돼서 왔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에 있는 말씀인데 내가 왜 꼴통이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성신학을 한 후배들이나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애들은 복종이라는 말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왜 옛날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사고를 하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남편에게 권위를 주시고 그 아내에게 남편을 따르라고 얘기하십니다. 옛날에 청년들하고 제 아내하고 함께 에베소서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 아내는 존경할만한 점이 있어야 복종을 하지 않느냐고 하고 저는 눈빛만 봐도 복종의 태도가 안 되는 걸 알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한 시간 넘게 싸우니까 청년들이 성경공부 언제 끝나느냐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남편이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만들어진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예수의 피가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교회의 머리로서의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인 것입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도록 한 것이 사라입니다. 그런데 최종적인 결정은 아브라함이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책임도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빌라도는 정말 억울한 사람입니다. 2천 년이 넘는 동안 우리는 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하고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것은 별거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기도합니다. 최종적인 싸인은 빌라도가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중에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죽이라고 외쳤지만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죽으신 것이지만 결국 마지막 사인은 빌라도가 한 것입니다. 권위자는 책임자입니다. 책임지지 않는 권위자는 없습니다. 사라가 아무리 얘기했다고 하더라도 아니라고 기다리라고 아브라함이 했어야 하는데 덥석 잡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판단이라는 것은 그 판단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실 것에 대해서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도 있지만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손해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복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내가 어느 순간에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사라를 찍어 누르면 권위주의가 됩니다. 권위는 사실 섬기는 것입니다. 권위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복종이 먼저가 아니고 사랑이 먼저입니다. 맨날 복종하라고 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주면 복종이 흘러나오는 것이지 복종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런 복종은 남편이 무서워서 하는 것입니다. 복종은 마음입니다.
제일 힘든 사람은 태도가 무너진 사람입니다. 제가 예전에 성경공부를 하는데 말끝 마다 삑삑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저를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공부를 그날 까지만 하고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태도가 좋아질 때 까지 기다리겠다고 듣는 태도가 되면 언제든지 다시 가르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알겠다고 해서 다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배우는 자의 복종의 태도는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 배움에 있어서의 복종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굳이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주님조차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지 않는 사람은 배울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복종의 태도가 안 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 줘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은 하갈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이후에 영적 가름에 이방인들이 들어갑니다. 이스마엘의 족속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마엘을 버렸다고 생각하는데 로마서로 얘기하면 버린 것들을 들어서 있는 자를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버림받은 것이 이스마엘인데 사실은 이스마엘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브엘라 헤로이(14절)’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이라는 것인데 그 당시의 우물은 생명줄, 탯줄이었습니다.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우물 그 공급함과 생명의 성장과 그 모든 것을 하게끔 만들어주시는 우물과 같은 존재로
하갈이 하나님을 그렇게 고백하고 동시에 하나님도 그를 그렇게 대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선으로 일하지 않으시고 늘 복선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밝음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둠으로도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이 축복이고 밝음도 축복입니다. 이번 선거에 졌다는 사실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을 통해서 건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둠을 통해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고 밝음을 통해서 너무 교만해지는 자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각각의 모서리를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너무 밝은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너무 어두운 것만 보지 말고 다 나한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삶과 이론적인 세상, 작은 일과 큰 일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마엘이 하나님 앞에 팽 당했다고 생각하고 이삭만 꿈꾸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이 종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언젠가는 부르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첩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못 부르는 홍길동이 되면 안 되고 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브엘라 헤로이’라고 고백하고 살아야 합니다.
없음이 있는 것입니다. 있는 것이 없음입니다. 맨날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우리는 이삭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이스마엘로 살아가는 내 인생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안 됩니다. 내가 사라가 아니라 하갈이고 내가 이스마엘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계속 이슬람교에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다 구약의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 가서 이스라엘사람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보고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쭉 올라가면 결국에는 이스라엘인이냐 이스라엘인이 아니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너무너무 철저하기 때문에 그냥 똑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고 반드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해야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도 꺼내면 안 되고 우리는 단군의 자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데 단군할아버지 상을 훼손하느냐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그들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이슬람 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들도 그들의 생명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이슬람교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입니다.
원래 구약과 신약이 같이 있어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구약만 믿고 또 어떤 사람은 신약만 믿습니다. 구약시대에 오실 예수와 다시 오신 예수 그리고 오신 예수가 다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여전히 육체적인 예수를 기다리고 있고 여전히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만 얘기하고 있는데 다시 오실 예수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세 가지 예수를 다 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카돌릭이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엄밀히 다지면 개신교입니다. 1000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졌는데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라 되었고 서방교회가 카톨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역사관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8개 교구 중에 로마교구만 뛰쳐나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카톨릭입니다. 그리고 나서 1500년에 또 거기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개신교 안에서 각 교단이 찢어진 것입니다.
동방정교회가 그린 그림을 보면 우리는 서울 구로동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 명동쯤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구로동 사는 사람들이 명동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못 사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조선에 카톨릭이 들어온 것이 200년이 되었고 개신교가 들어온 것은 130년이 좀 안 됩니다. 2천년의 역사 속에 130년은 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애가 아니라 할아버지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성경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2천 년의 역사를 공부하면 또 다릅니다. 날고뛰었던 이단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별것도 아닌 이유로 이단이라고 하고 카톨릭도 이단으로 만듭니다. 큰 집을 족보에서 빼버린 것입니다. 카톨릭에도 이단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십자가 자체도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귀신이 도망간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가 능력이 있다고 하는 상징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렇게 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도구화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황소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다 좋아했습니다. 종교는 원래 모호한데 이단은 확실합니다. 확실한 것이 이단입니다.
예를 들면 주기도문 100번 하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100번을 했는데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100번이라는 것 자체가 또 다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100번 해도 되는데 안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 자체가 신앙 자체가 모호한 것인데 사람들은 자꾸 모호한 것을 보호하지 않다고 계속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와 노자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파가 되면 안 됩니다. 귀신한테 십자가를 보여주면 믿음 좋은 귀신만 꿇어 앉지 귀신은 원래 믿음이 안 좋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웃는 것이 진짜 귀신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우리가 상징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카돌릭도 교회입니다. 카돌릭의 뜻이 하나교회입니다. one church라는 뜻입니다. 단일의 교회 하나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카돌릭입니다. ‘하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신앙의 gal, 하나님의 나라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존재들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를 빼앗기지 않고 독립적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이 1:1인데 한 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