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건축하라 1 (학개서 1장~2장)

다리오 왕 제2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다시 돌아온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학개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1장4절)’

판벽한 집은 지붕이 있는 집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지붕이 없습니다. 지금 성전을 짓다가 16년 동안 성전건축이 멈춰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전건축을 멈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16년 동안 성전건축이 멈춘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장11절)’

한재는 재난의 한 가지입니다.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해도, 어떤 일을 해도 되는 일이 없다는 의미의 한재입니다.

‘여섯째 달 곧 그달 초하루(1장1절)’

날짜로 얘기하면 6월 1일에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에게 임했습니다.

‘일곱째 달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2장1절)’

7월 21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다리오 왕 제 이년 아홉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2장10절)’

9월 2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2장 20절)’

9월 24일, 같은 날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6월, 7월, 8월, 9월 4개월 동안 학개서가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짧은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1장1절)’

보통은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직접 말씀하셔서 말씀하신 것을 전하는 것이 선지자들의 역할인데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말씀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임했습니다. ‘학개로 말미암아’ 학개를 통해서 스룹바벨과 그 당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선지자 학개, 그 당시의 행정책임자 스룹바벨 그리고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제사장 그룹의 여호수아와 선지자그룹의 학개와 그 당시에 총독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왕에게 말씀을 전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성전을 지으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라고 계속 나옵니다. 만군은 모든 군대를 의미합니다. 모든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계속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전쟁에서 이기시는,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끄시는 ‘만군의 여호와’는, 학개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상징, 자기표현입니다. 선지자, 왕, 제사장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끌고 가시는 주인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선지자, 왕, 제사장인 하나님나라 백성 공동체에 있는 리더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학개 전체의 주제는 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만군의 하나님이 백성중의 지도자들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성전을 재건축하라는 뜻입니다. 16년 동안 그들이 멈췄던 성전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1장 2절)’

첫 번째 시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생존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70년간 포로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며칠 전에 한국분이신데 일본에서 강의하는 교수님을 만났는데 한국사회의 공동체가 깨진 이유가 40년 동안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외부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일제강점기를 경험했기 때문에 스스로 작동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외부의 강압이나 억압을 통해서만 움직이는 체질이 된 것입니다.

40년 살았던 우리 민족도 그런데 이스라엘은 7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노예체질만 남았습니다. 노예는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세상에 너무나 순종을 잘 하는 체질이 된 것입니다.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방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의 조상 2천 년의 역사 동안에 하나님을 믿고 쫓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종자가 면면히 피를 타고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70년의 경험이 자극을 줬을 때 반응이 노예의 체질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리고 노예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려면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있어야 합니다. 건물을 짓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단체의 사장이든 회장이든 대표든 장을 해봐야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니면서 회장을 너무 많이 해서 다시는 짱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대학원 학생회장을 하는데 모든 사람이 100% 공감하고 수업거부를 하고 함께 철야농성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철야농성하는 장소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철야농성을 혼자서 했습니다. 애 봐야 된다고 하고, 장가 가야된다고 하고, 교회수련회 가야된다고 하고 온갖 이유를 다 댑니다. 이유는 다 있는데 다 타당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했고, 갑자기 페르시아의 정권이 확 바뀌어서 성전 짓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만약에 성전을 계속 짓는다면 전쟁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당한 이유 속에서 누구도 다시 손을 들고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책임지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노예의 근성이 세월호 사건이 있게 한 것입니다. 선장도 책임지지 않고, 항해사도 책임지지 않고, 다 각자 알아서 책임져야 합니다. 살아남을 놈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책임지지 않는 것이 노예의 근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시간이 없다고 탓을 합니다. 사람 탓, 상황 탓, 물질 탓, 부모 탓, 매일 탓만 합니다. 그리고 계속 미룹니다. 게으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2장3절)’

성전의 이전 영광, 처음 성전을 본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처음 성전은 솔로몬이 만들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누가 제일 부자였냐고 물었을 때 솔로몬이 제일 부자였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일 부자였던 사람이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해서 어마어마하게 성전을 크고 멋있게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된 것입니다. 70년 80년 전에 파괴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3절 말씀은 지금 짓는 성전이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없어도 너무 없는 것입니다. 뭔가 대단한 역사를 이루려고 하면 그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자기가 한 것이 그만큼 크게 보이니까 정말 신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네들이 열심히 해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이 안 납니다. 힘이 안 나니까 짓기 싫은 것입니다.

‘이 성전이 황페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1장 4절)’

그들이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하나님은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면서 자기 집 지붕은 다 올렸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뚤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1장6절)’

먹어도 배가 안 차고 뭘 해도 시원치 않습니다. 늘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밑 빠진 독입니다. 다 했습니다. 자기생존이상으로 다 했다는 의미입니다. 다 했는데 결국에는 구멍이라는 얘기입니다. 한 마디로 한재라는 얘기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초라하다는 말에 대한 답이 ‘굳세어라 금순아.’입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 보다 크리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외형을 보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안에서 영광을 보고 계십니다. 솔로몬의 영광 보다 더 큰 영광이 너희들의 보잘것없고 초라한 성전에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저 아무것도 없어도, 초라해요.’ 그랬더니 ‘아니야, 이전의 영광 보다 클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보다 두 번째 지었던 스룹바벨의 성전이 그 영광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으로 얘기하면 2장 2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룹바벨의 인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스룹바벨입니다. 솔로몬이나 역사적인물인 스룹바벨 보다 다시 오실 스룹바벨 그 분의 영광이 큰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있고 스룹바벨의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 3의 성전이 헤롯의 성전이었는데 주님이 이 성전을 3일 만에 무너뜨리고 다시 성전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의 성전과 예수님의 성전을 보면 솔로몬의 성전은 어마어마하고 스룹바레의 성전은 보기에 초라하고 예수님의 성전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전 영광 보다 나중 영광이 더 클 것이고 보이지 않는 성전의 영광이 더 클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이 점점 커지는데 크기는 점점 작아집니다.

미국에서 교회를 할 때 새로 오신 분들한테 어느 교회에 다니셨느냐고 물으면 ‘광림교회 다녔어요.’ ‘순복음 교회 다녔어요.’ 라고 대답을 하는데 이름이 없는 교회는 ‘이름이 없어요.’ 라고 대답합니다. 얘기해도 모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은 사람이 크고 건물이 크면 자신의 믿음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노예의 근성이 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기는 없고 주인만 있습니다. 그래서 광림교회든 순복음교회든 와서 섬겨달라고 하면 섬기지를 못합니다. 평가회만 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만들지는 못하고 먹어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를 하는 사람들은 죽으나 사나 직접 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씩 안고서 기도했던 경험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뭐든 시키면 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 보이는 것, 경험되어지는 것, 자기 영광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이 생각하는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장 10절부터 나오는 성전을 건축하라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11절)’

지금 성전을 건축하라고 얘기하는데 율법의 비유를 통해서 성전 건축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12절)’

내용이냐 포장이냐입니다. 옷자락은 거룩한 것인데 그 옷자락에 고기를 쌌습니다. 고기는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룩한 것에 거룩한 내용을 담아야 되는데 거룩한 내용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12절)’

‘아니니라’ 거룩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13절)’

부정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14절)’

왜 성전을 건축해야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습니다. 그 거룩함을 지켜내는 방법이 구약에서는 성전 가운데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동태입니다. 내가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감으로 거룩해집니다.

그들에게는 거룩함이 성전이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몸으로 오셨습니다. 내 몸의 마음 안에 오셔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지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주님 앞에 드림으로 인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몸을 말씀으로 지켜야지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불교는 내가 거룩함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지켜내고 살아가는 거룩하게 되는 삶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전을 짓지 않고 자기 집을 짓고 있습니다. 자기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거룩함을 지켜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거룩함이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조금은 다르고 조금은 더 멋지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거룩함입니다. 자기 거룩함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의 평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평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거룩함은 동시에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평가를 받기 위해 내가 하나님으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좋은 뜻으로는 능력이고 나쁘게는 조종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쉽습니다.

점쟁이가 40대 50대 아줌마들이 점을 보러 오면 ‘아들이…’라고 말만 꺼내도 그 사람한테는 아들이 그 사람을 움직이는 키라는 것을 압니다. 20대에 가장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배우자와 취업문제입니다. 배우자를 소개시켜 주고 취업에 대해 질문을 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연령대에 따라서 뛰어나게 살아가지 않는 한 살아가는 것이 다 비슷합니다. 40대 중반 넘어 50을 바라보니까 뭔가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인생을 정리해야 될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불안감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미 겪으신 70대 80대 분들이 있고 그 분들은 또 그 나이에 하는 고민들이 있으신 것입니다.

평가가 중요하고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면 자기의 세계관이 만들어집니다. 자기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을 짓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을 짓기를 원하고 자기 집에 대한 평가와 자기 집의 조종, 자기 집의 세계관을 가지고 자기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의 터를 가지고 자기의 기둥과 자기의 지붕을 만들어서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거룩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벼랑 끝에 서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8절)’

날마다 새로워지는 세상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변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움베르토 에코(Umberoto Eco) 볼로냐 대학교수는 노벨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재미있는 연구를 한 사람인데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원리를 그 사람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다시 정립하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은 늘 진보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보수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맑스가 틀렸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날 그 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변하면 그 날 그 날 근근이 사는 것조차 힘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심리를 조사해 보니까 그날 그날 먹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꽤 괜찮게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먹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겨우겨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보수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자신의 평가가 어떻게 됐든 또는 자기가 조종하지 않고 내어주기를 원하고 자기가 만든 세계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관으로 살려고 한다면 날마다 나를 벼랑 끝에 서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고센 땅에서 살았습니다. 고센 땅은 다른 지역 보다 10대에서 20배 정도로 수확량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100만 원을 투자를 하면 100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얻는다면 다 투자할 것입니다. 고센 땅이 그런 땅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너무나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가뭄이 들어도 그 땅에는 가뭄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센 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70명이 들어갔는데 460년 만에 장정만 60만 명이 됐습니다. 애를 너무 많이 낳으니까 산하제한을 하고 갖다 버렸습니다. 그 때 버려진 아이가 모세입니다. 그런 고센 땅에서 배부르게 먹고 살았는데 노예였습니다.

그러다가 광야에 갔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노숙자가 된 것입니다. 노숙자인데 자유인입니다. 내 몸, 내 마음에 성전을 짓기 위해서 벼랑 끝에 서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뛰어 넘는 용기가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숨 걸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짓기 전에 다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자기 집을 잘 짓고 나서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몸을 지키기 전에 내가 뭔가 다른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에 마음 다치고 몸 다쳐서 죽을 때쯤 되니까 ~~할 걸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다 까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 보다 먼저, 첫 번째로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 싸우고 있습니다. 계속 조종하고 싶어서 울고 있습니다. 자기 세계를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묻고 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학개서를 통해서 ‘너 이거 맞아? 이것이 부정한 거야? 이것이 거룩한 거야?’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왜 꿈을 갖고 있나요? 물어야 합니다. 부정한 것인지 거룩한 것인지 주님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물음표 안에 내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나에게 1980년대 그 시절 그 역사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주님이 물으실 때에 ‘이것이 거룩한 것입니다.’아니면 ‘이것이 부정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할 답이 있어야 합니다.
벼랑 끝에 선 용기, 우선순위, 물을 것에 대한 이 세 가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201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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