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건축하라 3 (학개서 1장~2장)

3일 동안 학개서 전체를 함께 공부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이 성전을 세우라고 하시는 이유는 거룩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는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내 몸을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은 성전을 건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끊기 위해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보기 위해서는, 진리 안에 살기 위해서는 늘 벼랑 끝에 서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는 용기라고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벼랑 끝에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우리에게 세속의 정신을 통해서 날마다 벼랑 끝에 서게 하는 것이었고 사단과 마귀는 오늘 우리에게 늘 벼랑 끝이라고 하는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상의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영원한 세상,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그 소망과 그 용기를 가지고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벼랑 끝에 서는 용기를 통해서 우선순위,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마다 어떤 근거로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를 보는 자신의 삶 가운데 우선순위가 있어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서는 ‘부정하냐? 거룩하냐?’ 라고 하는 주님의 물음 가운데에 있을 때에 ‘그것이 거룩합니다.’ ‘그것이 부정합니다.’ 라고 하는 하나님 앞에 묻고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둘째 날은 내가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려고 할 때에 내가 늘 벼랑 끝에 서는 용기를 가지고 살려고 할 때에 내가 주님 앞에 거룩하고 부정하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 마다 그것이 단순한, 일반적인 원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내가 처한 그 상황 속에 나에게 주어진 가정과 교회와 민족과 열방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부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개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들은 것인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라고 얘기합니다. 또 1장 13절에 있는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라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위임 받은 자와 같은 부르심의 자리, 부르심의 확신, 부르심의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그 시대 속에서 내 한계가 무엇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오류가 무엇인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둘 것인지 내가 어느 벼랑 끝에 서야 되는 것인지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때 마다 그것이 부정한 것인지 거룩한 것인지에 대한 분별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은 내적체험이고 이것은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또는 반드시 부르심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경험한 사람만이 늘 벼랑 끝에 서서 죽으면 죽으리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고 하는 결단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학개서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그 부르심으로 가기 위해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2:3)’ 

그 가운데에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2: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2:23)’ 

인장,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야.’ 라고 하는 사인을 표적을 반드시 그 사람을 통해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스룹바벨서가 아니라 학개서입니다. 학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성전을 건축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데 학개는 자기 인생 혼자 산 것이 아니라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여호수아와 그리고 남은 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만한 사람들과 함께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살아야 되는데 그 부르심의 응답은 부르심의 공동체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나의 거룩함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 함께 공동체 가운데에서 함께 이루어야 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왕의 역할을 하고 있는 스룹바벨,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여호수아, 예언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학개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 세 사람, 이 지도자들을 통해서 남은 자,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진리에 갈급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남아있는 자들이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 몸 가운데 주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성전을 새롭게 우리가 건축하는데 있어서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은 단순하게 학개의 말씀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라고 하는 세 사람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정하고 선택하셔서 예수그리스도가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심을 통해서 대속하심을 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 오셔서 날마다 그 구원하심에 대해서 다시 깨닫게 하시고 보증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아들 되신 그리고 성령의 함께하심을 통해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신령한 것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은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와 남은자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있는 말씀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양과 같이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백성에게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양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면 똑같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라고 하는 이 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함께 만들어갈 것을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으로 살 때 마다 공동체 가운데 그것을 이루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왕은 행정책임자입니다. 제사장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중보하고 있는 중보기도자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스룹바벨은 누구이고 여러분들에게 대제사장은 누구입니까? 또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는 학개는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에게 학개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혼자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스룹바벨과 학개라고 하는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함께 만들라고 얘기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중보기도자가 누구인지 찾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자가 누구인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남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또 그들은 70년의 포로생활을 겪고도 똑같이 생고생하는 요즘말로 개고생하고 돌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또 분별하시고 또 구별하셔서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만한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왕이 누구인지 제사장이 누구인지 예언자가 누구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영적권위라고 하는 워치만니의 책에 보면 두 사람이 만나도 그 안에 영적 권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권위자 또는 행정권위자 또는 중보기도자, 한 사람 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 보다는 세 사람이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그 삼의 숫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건축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집을 지어보지는 않았지만 혼자 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셋이 지으면 열 배로 빨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공동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표현을 우리의 형상대로 그리고 하나님은 혼자 가만히 천상에 계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괴롭고 힘들지만 사람을 만드셔서 사람과 함께 더불어서 단일을 이루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가지고 있는 기질도 다르고 살아왔던 삶의 흔적도 다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협력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왕이 누구인지 나에게 제사장이 누구인지 예언자가 누구인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거역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팍합니다. 또 불순종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에게 통치 받는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거역의 마음이 있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강팍합니다. 나쁜 남자 신드롬 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에게 무엇인가 바라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쁜 남자가 더 매력이 있습니다.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것에 대해서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마다 불순종하고 그 인도하심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서부터 거역과 강팍함과 불순종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나는 사람 얘기 안 듣고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있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학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스룹바벨에게 인장을 줍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권위를 자기 혼자 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나를 위한 것이, 내 욕망과 욕구를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기를 간구하는 마음 때문에 함께 협력하고 함께 감당하겠노라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세계관을 만들려고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추구하려고할 때 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 거역하고 강팍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청개구리 같은 마음입니다. 누가 시키면 안합니다. 그리고 시키면 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리라고 할 때 드렸는데 야고보서는 그것을 행하는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test를 해석합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아들을 드리라고 하신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거역의 마음이 올라와서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얘기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아들을 죽이는 순간에 ‘그만 됐어.’ 라고 하셨는데도 무슨 소리냐고 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이 아들을 드려야겠다고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채우는 자신의 아들조차도 하찮케 여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할 때 마다 사람들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이 생명의 길이고 사는 길이라고 얘기하는데 사람들은 그 생명의 길과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또 그것을 아주 뻔뻔하게 얘기합니다. 너무나 강팍한 마음으로 얘기합니다. ‘목사님 말씀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세상을 잘 모르십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 아시나요?’ 라고 말합니다. 

성경 보다 더 세상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얘기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늘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인정, 사정,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에 틈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똑같이 그들처럼 강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순종하고 복종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서로 협력하고 서로 내어주고 그래서 함께 나누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생명의 길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주가 더 센 것 같습니다. 소주 먹으면 다 용서가 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 용서함이 없습니다. 잔인합니다. 오히려 더 강팍합니다. 아니 진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생명을 우습게 여깁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가치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 생명 보다 더 높지 않습니다. 선악과에 매여서 생명나무로 가지 못합니다. 

이 시간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을 하나님 안에서 왕으로 제사장으로 예언자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누군가의 통치를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람을 통해 위로를 받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에게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과 세우심과 보내심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왕인지 누가 제사장인지 누가 예언자인지 시기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일에 따라서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왕인 것도 아닙니다. 어떤 때는 그 사람이 왕일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이 왕일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누구와 협력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것인지를 알아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참된 권위가 이 공동체 가운데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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