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 (로마서 12:3-13, 열왕기상 6:1-13절)
로마서 12장부터는 ‘행동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단계와 구원의 신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삶으로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가 되는 것이 순리인데 사단은 우리에게 와서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르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연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늘 우리에게 핑계가 되고 누군가의 탓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의 삶을 살아내라고 얘기합니다. 가인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죄를 다스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내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단계와 구원의 신비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사랑하는 것에 때와 시기를 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행동하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혼자 사랑하고 혼자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한 몸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오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보고 싶을 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 그것이 계시입니다. 구원의 단계와 구원의 신비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를 추구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셔서 원죄에 꽉 잡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계시하여 주셔서 구원의 단계와 구원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함입니다. 마음을 정함으로 실제로 하는 것은 한 몸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일까? 한 몸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인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사랑하는 몸의 믿음, 몸의 신앙입니다. 그것이 한 몸의 공동체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중에 상급을 받을 것인데 구원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얼마만큼 몸으로 지켜냈느냐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3절)’
행동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결단하고 어떤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6절)’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몸으로 지키면서 살아낼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없습니다. 내가 늘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용서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어도 누구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은혜대로, 은혜로 말미암아 행동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것을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12:3)’
사람들은 은혜도 자기 마음대로 망상을 하고 무엇인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욕심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은혜의 계시를 조금 보여준 사람이 있고 더 많이 보여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분량만큼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몸을 움직이기 전에, 내가 한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깨닫는 것에 대해서 믿음의 분량만큼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사생활을 15년 정도 했었는데 15년 동안 제가 만났던 모든 담임목사님들은 다 불의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보니까 다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 보니까 또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서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내가 품을 수 있는 것이 있고 품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자리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트롯트를 부르거나 어른들이 부르는 가요를 부르면 처음에는 예뻐 보이다가 나중에는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분량이 있는데 그것을 뛰어넘어서 생각하는 것 때문에 죽을 맛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하도 저를 공격하면 그 사람이 담임목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기도합니다. 저도 예전에 담임목사님이 정말 이해가 안됐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속에서 제가 강자고 다른 사람이 약자였습니다. 목사님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공의와 정의가 무너져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띠만 두르지 않았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불의할 수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내가 내 수준만큼 지혜롭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믿음도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도 수준이 있고 기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도 색깔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믿음은 어린 아이수준입니다.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은 가장 좋은 믿음인데 뭐든지 ‘예’입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가 말하면 ‘네’ 하는 순진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오’를 해야 되는데 ‘네’하고 있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을 보면 지적해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또 청년의 믿음이 있습니다. 청년의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또 옆에 있는 지체들을 통해서 자라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성장하는 믿음을 통해서 청년의 믿음이 되면 어린 아이 같은 믿음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낼 수 있습니다.
청년이 자라면 장년이 됩니다. 장년의 믿음은 고난을 감수하고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애매한 고난조차도 견뎌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고난이 옵니다. 예수 믿을 때 마다 고난이 온 것입니다. 의를 지킬 때 마다 내가 공의를 지킬 때 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다워질 때 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삶 가운데 처해지는데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 고난 가운데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장년의 믿음입니다.
마지막에 노년의 믿음이 되면 나눠주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생명을 나눠줄 수 있는 노년의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수준의 차이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헬라인과 유대인과 이방인들 정말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80년을 믿은 사람, 10년을 믿은 사람, 여러 가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질의 차이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꽃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자연주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빛과 소리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는 감각주의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의식과 상징의 정통주의의 영성도 있습니다. 고독과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금욕주의의 영성, 참여와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행동주의의 영성이 있습니다. 또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을 위해서 이웃사랑을 하는 박애주의의 영성도 있고 열정주의의 영성은 신비와 축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독의 자리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묵상주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과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주의의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믿음의 색깔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하나로 전체를 평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수준의 차이, 믿음의 기질의 차이에 따라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받은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에 보면 일곱 가지의 은사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입니다.
예언은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은사이고, 섬기는 일은 생명을 살려내는 은사이고, 가르치는 것은 진리지식을 설명하는 은사, 위로하는 일은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은사, 구제하는 일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은사, 다스리는 일은 행정을 통해 생명의 열매를 맺는 은사, 궁휼을 베푸는 일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서른다섯 살 때 까지 저는 하나님이 왜 저한테는 아무것도 안주셨을까? 고민했습니다. 노래도 못하고, 얼굴도 좀 이상하고, 성격도 까칠해서 정말 제가 목회자가 되기에 적당한 사람인가 생각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박사를 받으려고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제 아내가 ‘공부할 타입은 아니잖아?’ 라고 말하는데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저희 집에서 중학교 1학년 아이들 일곱 명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청년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가끔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뒤를 돌아보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끌고 가셨는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고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훈련시키는 과정 속에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버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기억하면서 행동하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한 몸의 공동체 안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2장 3절부터 13절까지는 교회 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할 수 있는 지체들끼리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서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
지체가 되는 한 몸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성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전이라고 얘기할 때에 건물에 대한 상징성을 구약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열왕기상 6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몸이다 한 지체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의 하나의 돌이고 나무와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관점에서 보면 돌과 돌이 뭉쳐져서 지어지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나무와 나무가 함께 연결되어서 서로에게 서까래가 되고 지붕이 되어주는 것이 교회, 한 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6장을 잘 보면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두 가지의 아주 중요한 재료가 있습니다. 하나는 돌입니다.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7절)’
돌을 돌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정을 맞지 않은 돌을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랑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냐 하면 ‘뜨인 돌’처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뜨인 돌은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을 맞지 않은 돌이라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공중에 떠 있는 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다 성격이 있습니다. 한 성격들 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짓는데 뜨인 돌을 사용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어울려져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몸, 한 지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절대자존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은 소유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많이 가진 사람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얘기하지만 하나님은 소유가 아닌 존재로 사람을 보십니다. 존재가치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교회 안에서 존재가치로 서로를 대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말이 ‘김보성의 으리’입니다. ‘의리’라는 말이 그렇게 유행하는 이유는 의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리가 없는 이 시대 속에서 의리를 찾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기한 것입니다. 김보성씨가 세월호유족들을 위해서 5천만 원을 대출을 받아서 위로금으로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광고로 엄청나게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 분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의리를 지키고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의리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우리들의 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정을 때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방망이를 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것처럼 방망이나 정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성전에 있는 돌을 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하는 말은 주님 안에서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믿음의 수준이 낮아도 예뻐하고 귀여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나 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정으로 때리지 않고 방망이로 때리지 않고 어떤 것으로도 때리지 않겠다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뜨인 돌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채석장에서 돌을 가지고 오면 돌 그 자체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네모난 모양의 돌은 네모로 쓰이는 것이고 세모난 모양은 세모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모와 세모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네모와 세모가 같이 있으려면 그 사이를 작은 돌들이 메꿔주어야 합니다. 자기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네모로 만들라고 하시거나 더 세모로 만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전은 벽돌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벽돌은 가장 안정성 있는 돌입니다. 그런데 성전의 돌들은 정을 맞지 않고 방망이를 맞지 않은 돌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양대로 자리를 찾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적재적소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예언을 하는 자가 있고, 섬기는 자가 있고, 가르치는 자가 있고, 위로하는 자가 있고, 구제하는 자가 있고, 다스리는 자가 있고, 긍휼을 베푸는 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넌 왜 예언만 하고 다니느냐? 왜 입만 살았느냐?’ 라고 얘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입 만 산 사람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입이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 안에 입이 산 사람이 없으니까 예언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예언이 맞네 맞지 않네, 예언이 좀 이상하네 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예언도 어린 아이 같은 예언이 있습니다. 수준 높은 예언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수준은 어린이 인데 하나님 앞에 받은 은사가 예언이면 매일 어린 아이 같은 예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두는 것입니다. 입 다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한번은 교회 안에서 뭉쳐서 수군수군하기에 다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수군수군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데 가서 수군수군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저희 교회 일을 더 잘 아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입이 간지러운 사람은 말을 해야 합니다. 몸을 움직여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사람은 하게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자기 자리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자기 자리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처소관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교하고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또 정죄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저 사람은 왜 하지 않지? 나는 다 보고 있는데 왜 저 사람은 못 볼까? 정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하시는 하나님, 그 공동체가 바로 한 몸의 공동체입니다.
세 번째는 뜨인 돌이 공중에 떠 있다고 얘기하는데 다니엘서 2장 34절에 뜨인 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성전의 돌이라면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세상의 세속의 정신,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는 하나님의 짱돌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부서뜨리는 돌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모아서 세상의 잘못된 정신을 향해서 던졌는데 우리가 깨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똘똘 뭉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세상을 부서뜨리는 하나님의 짱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한 마디 할 때 마다 우리가 가서 열 마디 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잘못된 정신,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부서뜨리는 것, 혼자서는 못합니다. 세상이 강한 것처럼 보이고 골리앗 앞에서 누구도 나서서 싸울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 짱돌 하나 들고 있는 다윗이 자신이 싸우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견고하게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진리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쓰시는 나무는 백향목입니다.
‘그 성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백향목 들보로 성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9-10절)’
하나님이 쓰시는 성전의 나무는 백향목 입니다. 백향목은 고지대 모진 바람이 부는 곳에서 무지무지 크게 자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뿌리가 깊은 나무이고 40-50m까지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이 뿌리 깊은 나무는 그루터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그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맺혔던 그 백향목을 하나님의 성전의 성전목으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루터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려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근원이 무엇인지를 늘 추구하고 근원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행동할 수 있는 뿌리 깊은 나무, 백향목의 삶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향목은 향기가 나서 상쾌감을 준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세 가지의 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유쾌, 상쾌, 통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시름시름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거나, 성공 못해서 억울해 하고, 슬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향이 안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라고 얘기하는데 내가 peace 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를 만나면 정말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또한 이 백향목은 절대로 벌레가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결하고 거룩한 삶으로 살아내는 백향목의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종류의 돌이고 같은 종류의 나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안 맞는다고 삐죽삐죽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끼리끼리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 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악을 미워하고 형제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을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참고 함께 주님 앞에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해주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하나님은 우리를 한 몸, 한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구원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은
옆에 있는 내 몸을 주신 것은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죽음을 묵상하고
그래서 그 가운데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참고 즐거워하고 기도하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없는 자와 같이
언제까지 우리가 경쟁하고 비교하고
언제까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보잘 것 없는 공동체로 살아야합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서 세상을 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고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안에서 향기를 내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의 지체들 내 옆에 있는 내 몸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노라고
이 시간 주님 안에서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4. 6.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