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욥기 15:1-16, 고린도전서 2:6-16)
욥기 14장까지는 욥의 세 친구가 욥에게 와서 이야기하고 욥이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읽은 욥기 15장부터 21장까지는 두 번째로 욥의 친구가 질문하고 그것에 대해서 욥이 대답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욥이 친구들의 의견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박을 했습니다. 반박의 근거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친구들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이 이럴 것이라고 정확하게 자기의 입장을 이야기합니다. 욥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괴롭고 슬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그것조차도 내려놓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욥이 가지고 있는 지혜가 결국 지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아닌 이유는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은밀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모르느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
이 말씀은 여전히 회개를 촉구하고 가지고 있는 문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돌아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는 말은 쓸모없는 말이었고 무익한 말이었고 간사한 말이었고 또 스스로를 정죄하는 말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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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부터 10절에 있는 말씀에 보면 지혜가 너의 것만 되는 것이냐? 아니 더 정확히 하면 10절 말씀처럼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아버지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아직도 젊기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혜롭지 않고 지혜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는 어떻게 지혜로운 자가 분노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대들 수 있느냐?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로하시고 은밀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분노하고 대들고 살아갈 수 있느냐고 신랄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16절에서 말씀한 지혜의 내용이 사실은 ‘말’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에게 지혜였고 또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든 사람 앞에 말하든 그 모습이 참된 지혜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과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이 말로 시작하고 기독교의 은사 중에는 말의 은사가 있고 또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말씀이 생명이라고 말씀이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는 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주제로 목회자들 앞에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레크레이션 하시는 목사님이 말은 그냥 말이고 말씀은 말을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의 본질이 말씀사건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이 뱉어지면 공기의 진동과 같이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내용이 그 사람 자체이고 말이 그의 삶의 방향이고 말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인생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헬라철학이 들어와서 말과 행동이 분리되었습니다. 원래 말이 행동과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분석하다보니까 말과 행동이 따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창세기 1장에 있는 사건은 말씀이 실재가 됐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도 마찬가지로 말씀이 실재가 됐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했을 때의 그 세계가 사실은 언약의 세계이고 말씀이 실재가 되는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의 밀고자가 사실은 말인데 말을 잘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본질이고 인생의 방향이고 삶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에 말과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지방에서 선거할 때 분명히 찍겠다고 했던 사람이 약속을 어기고 찍지 않았습니다. 찍겠다고 했던 사람들만 다 찍었어도 우리가 이기는 것이었는데 안 찍었기에 정말 치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서 지키지 않을까? 말은 그렇게 해 놓고 행동은 다르게 하는 이 상황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에 대해서 제가 분노하니까 사람들이 다 그런 거지 뭐? 라고 얘기들을 했습니다. 우리는 순리를 역리로 살아가다 보니까 역리가 순리인 것처럼 바뀐 것이 당연한 것처럼 또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살아갑니다.
미국에 있을 때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종교다원주의를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교회 안에서 실재로 종교다원주의 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보아서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정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백그라운드가 실재모습으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것은 배운 것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인정하면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진보인 것처럼 얘기하면서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신앙인조차도 그리스도인조차도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듣고 행하고 누리는 그 본질이 말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누리는 것도 행하는 것도 하나이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진실로 믿어지기 시작하니까 그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누리게 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들은 것과 내가 누리는 것이 다릅니다. 30년 40년 80년을 믿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기적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요즘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설교를 좀 쉽게 해야 되는데.’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렇게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변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또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저는 신앙의 람보를 꿈꿉니다. 람보는 총에 맞아도 총알을 스스로 뽑고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혼자서 큰 군대와 싸워서 이기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은 120명의 성도를 통해서 변화되었고 세상은 12명의 제자를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들어와서 그 말씀대로 행하는 능력이 있을 때 그 말씀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6절부터 16절에 있는 말씀과 욥기 15장 1절에서 16절에 똑같은 어휘가 나오는데 그것이 ‘은밀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서 이해를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들리는 말씀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보이는 말씀이 아니고 누구나 행하고 누릴 수 있는 말씀이 아니고 은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그것을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욥은 또 그것을 다르게 고백하고 있고 사도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또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물을 먹고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하나는 그것을 먹고 힘을 얻어서 내어주는 삶을 살고 하나는 그것을 먹고 남을 죽이는 도구로 씁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나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음성을 듣고서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정죄하는 것으로 쓰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의 말씀으로 씁니다. 그래서 복음이 있고 예수가 있고 영이 있는데 복음이긴 한데 다른 복음이 있고 예수인데 다른 예수가 있고 영인데 다른 영이 있습니다. 말은 말인데, 똑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을 듣고 있는 내 마음이 내 생각이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다른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얼마나 비겁한 사람이냐 하면 미디안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포도주 틀에 밀을 까고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은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연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강한 용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용사라고 하는 이 말씀이 기드온에게는 여전히 미덥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이 기드온의 삼백용사인데 삼백 명의 의미는 용감한 삼백 명이 아니라 최소한 전쟁에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수가 삼백 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여전히 육신의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 싶은데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마음 깊숙히 있는데 겸손한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서 늘 노력하다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의미는 ‘아버지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겸손하고 자기는 온유하고 하나님 앞에 뭔가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것들이 중요하고 여전히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예수와 영과 다른 복음과 다른 예수와 다른 영이 왜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하늘의 말과 땅의 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땅의 말을 하고 살아갑니다. 땅의 말은 ‘사랑합니다.’ 도 사실은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목적이 있어서 수단으로 쓰는 사랑이고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그 말조차도 여전히 인간적인 육신의 말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씀을 소화하는 그 몸이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으니까 나오는 것이 독입니다. 구정물을 먹든 어떤 물을 먹든 소화시켜서 샘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깨끗한 물을 먹고도 하나님의 은밀한 음성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육신의 것에 걸려있습니다.
엘리바스는 경건주의자이고 정적주의자인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들이대고 얘기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맞는 말인 것처럼 보입니다. 말로는 계속 하나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야망을 꿈꾸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단을 쫓아가는 사람들은 굉장히 영적입니다. 그런데 교주는 굉장히 육적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영적인 음성을 듣고 나서도 여전히 내가 땅의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거짓과 분열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하나님조차도 거짓으로 하나님조차도 분열로 하나님조차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가 하나님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분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분열의 교회공동체를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 하늘의 말씀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인격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좌싸움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최대한 인격적인 말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무례하게 행합니다. 페이스북에 동성연애자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것이 죄라고 얘기하셨지만 그들이 행사하는 곳 옆에서 굳이 ‘마귀들아 싸울지라.’ 라는 찬양을 하는 것이 신앙인 것처럼 가르치는 교회가 문제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정죄하고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으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올 수 없습니다. 절제할 수도 있고 인내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견디고 버티게 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없는 것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망해도 실패해도 없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늘에 소망이 있습니다.
지혜는 미래를 바라보는 힘입니다. 교훈은 과거적이고 명철은 현재적이고 지혜는 미래적입니다. 그런데 미래는 하나님이 닫아놓으셨습니다. 미래의 마지막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막아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미래를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계시와 같은데 계시는 하나님이 드러내어 주셔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말하는 자입니다. 지혜자는 주님께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인격적인 말을 할 수도 없고, 선과 덕을 이루는 말을 할 수도 없고, 소망과 생명을 묵상하는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아들, 딸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까 하나, 둘, 셋, 하고 수를 세는 소리였습니다. 열 셀 동안 안 하면 혼난다고 할 때 수를 세는 소리입니다. 비인격적입니다. 그리고 가끔 하는 말이 내가 아빠라는 말이고 또 내가 어른이라는 말입니다. 가끔씩 툭툭 튀어나오는 말 중에 하나는 내가 목사라는 말입니다. 논리를 얘기하다가 논리가 안 통하면 마지막으로 내미는 카드가 내가 목사라는 말입니다. 참 비인격적인 말들입니다.
내가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내 것에 대해 계산하고 있습니다. 나한테 도움이 되느냐 도움이 되지 않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로 교회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떤 것이든 쓰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든 쓰지 않겠다고 합니다. 늘 인간적인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는 것처럼 보이면 힘이 납니다. 내 통장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면 힘이 나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힘이 없습니다. 소망도 여전히 물질에 대한 소망입니다. 늘 물질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하늘의 지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인격적인 말을 하고 싶지만 어느 순간 인격적인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선과 덕을 세우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그리고 뭔가 있어야지만 소망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늘 눈도 귀도 마음도 막혀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2:10)’
오직 성령으로만 보이고 들리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늘의 생각으로만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우리는 인격적인 말을 할 수 있고 선과 덕을 세우고 소망을 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에게는 너무나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도 공부하고 이것저것 다 공부해서 인격적인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기독교가 어리석어보이고 유치원수준으로 보입니다. 그냥 예수면 다 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복잡하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한 가지로 풀 수 있느냐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과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참된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받고 있는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내가 성령께 주도권을 드리지 않으면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내 믿음의 반응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서 그것이 더 큰 독이 되고 정죄가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들, 말씀공부 하지 않는 것들, 예배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있는 말씀처럼 똑같이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은밀한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밀한 음성을 듣고 있는 내가 성령 앞에 내 몸을 드리지 않고 내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내 눈과 귀를 드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선과 덕과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소망은 반드시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 보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영적인 믿음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오늘 우리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이 모든 행위가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말씀 듣고 말씀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그것을 어리석게 봅니다. 내가 얼마나 바쁜데 라고 말합니다. 바빠서 평안하셨나요? 바쁜 만큼 돈 많이 버셨나요? 바빠서 행복하셨나요? 어리석다고 할 정도로 자기 시간을 내어주고 그 시간을 통해 은밀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은밀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일상을 뛰어넘는 말씀과 예배와 기도와 교제와 섬김을 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것이 지혜입니다.
시간에 쫓기고 공간에 매이고 우왕좌왕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사람은 기꺼이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 안 되는 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는 그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너무나 긴박한 일이 많은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말합니다. 급하고 중요한 일을 하면서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어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80넘으신 시어머니가 60넘은 며느리한테 ‘길 가다 보면 중도 보고 장사하는 사람도 본다. 삶이라는 것이 그런 거야. 힘들고 어렵더라도 걸어가야지.’ 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살다보면 내가 모르는 이상한 사람도 만나고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것도 다 보고 삽니다. 그런데 그 인생 속에서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게 보이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성령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고 삽니다.
진리이고 하나이고 생명입니다. 판단을 유보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 분별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은 정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열매를 먹은 사람들답게 모든 것을 생명으로 판단합니다. 살리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마음에 안 들고 화가 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 당시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하나님 앞에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셔야 됩니다. 오늘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영에 속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들로 살아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육신의 기준을 아무리 우리한테 들이댄다고 할지라도 아닌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세상의 말로 정죄하고 있다면 듣는 순간 반사하는 것입니다. 연회 체육대회에서 어떤 사람하고 싸웠는데 정말 심하게 욕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속으로 반사, 반사, 반사 하면서 들었습니다. 내꺼 아닙니다. 그랬더니 화도 안 나고 그 사람이 밉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람 말에 내가 판단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우면서 목사가 욕을 심하게 먹으니까 조금 부끄럽기는 했습니다.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이 욕을 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성령의 지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자유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매인바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에 매이지 않고 하늘에 매인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하면서 계속 땅의 이야기를 해도 거기에 매이지 않습니다. 판단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늘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다시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함을 제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가끔은 칠랄레팔랄레하고 사는 것입니다. 너무 정신 차리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에 가보면 아이가 바짝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집은 율법주의로 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른 집에 가보니까 아이가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입니다. 그 집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은혜의 각성>이라는 책에 보면 은혜 받은 공동체는 버릇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버릇이 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엘리바스가 지금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아버지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대들고 얘기하느냐고 합니다.
두 번째가 평안함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참된 평강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려면 자유한지 평안한지 이 두 가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살리는 영이고 내 마음과 눈과 귀를 주님 앞에 내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밀한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성령께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하나님의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결단의 기도>
세상은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과 사건과 나의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볼 때 마다
세상의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내 중심의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었습니다.
우리의 머리를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맡기는 그 기도가 맡기는 그 행위가
성령이 내 마음 가운데 오셔서
영원한 복을 허락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소리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머리를
영원하신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숙이고
하늘에서 주는 하늘의 복을 경험하고
하늘의 지혜로 살겠노라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내어주는 기도를
함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볼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은 늘 판단 받고 정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참된 자유와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이 시간 나의 마음과 몸을 주님 앞에 드리는
기도를 함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