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절 1

성경을 믿음으로 볼 때는 ‘아멘’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전의 문학적 형식에 따라 성경읽기에 있어서 다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글입니다. 말은 시간예술이고 한 번 뱉으면 끝나는 것이지만 글은 시간이 지나도 남아있는 공간예술입니다. 그래서 말 보다는 더 심사숙고 하고 사고력을 요구하는 것이 글인데 경전은 글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의 text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예를 들면 말 그대로의 의미 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상징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해될 수 있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로서의 상징과 기호가 있는 것이 경전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단순한 상징과 기호만 있으면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학이 아닌 종교는 그 안에 또 다른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신비라는 얘기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르는데 있는 것입니다.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학을 공부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연구할 수 있느냐? 말이 안 된다고 얘기합니다. 인간이라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무한한 창조주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설명할 수 있는 적합성과 개연성을 생각하면서 계속 설명해 내려고 하는 것이 신학적인 작업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설명 못 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이 신비성을 배제해 버리면 계속 윤리나 도덕 또는 철학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와 철학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한한 상상력을 없애버리거나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들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분 중에 주기도문파가 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이 몸이 좀 아픈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으면 주기도문을 몇 번 쓰라고 모든 처방을 주기도문으로 하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경험의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기도문을 외웠더니 어떤 병이 나았고 힘들고 어려워서 불안하고 염려했을 때 주기도문을 외워서 힘이 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기도문으로 모든 처방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있다고 하는 신비적인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순간에 비진리가 되고 그런데 그 비진리가 또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역설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하나의 개념을 얘기했는데 그 개념이 완전히 거꾸로 되는 개념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역설이 성경 안에 숨겨져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까지는 공부를 별로 못했는데 신학교에 가서는 공부를 잘하기 시작했고 대학원에 가서는 더 잘했습니다. 미국에 가서는 정말 제 체질이 신학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말이 안 되는 것을 열심히 주장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1+1=2가 되는데 저는 2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5가 되고 7이 될 수도 있는데 왜 2가 되어야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그랬으면 아마도 맞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예를 들어 ‘하나님을 증명하시오.’ 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두 장은 거뜬히 썼습니다. 쓸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는 딱 떨어지는 정답을 얘기해야 되니까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허무맹랑하면 안 되는 것이고 적합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이라고 하는 것에는 역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라.’ 라고 하는데 사실은 ‘가지 말라.’ 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역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이 한 권의 책입니다. 66권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져서 ‘성경’ 이라고 말하는데 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만 권의 책을 읽어야 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책 내용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믿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0대에 해야 될 50가지라는 책을 읽고서는 그 내용만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 한 권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사실은 이 경전이라고 하는 책일 읽기 위해서는 만 권의 책이라고 하는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적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굉장히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석이 중요한 것인데 해석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는 수준도 있고 여러 가지 정말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답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좋은 해석은 생명을 살리는 해석입니다. 

생명 자체가 변화무쌍합니다. 어떤 원리를 하나 집어넣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워 보면 알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어떤 때는 기쁜 마음으로 대하고 어떤 때는 기분 나쁘게 대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상대를 위해 못 본 것처럼 할 수도 있고 또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생명에 대해 어떤 적용을 하며 살 것인가?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인 중에 하나님을 믿어볼까? 라고 생각하는 단계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특수목회를 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여기가 교회인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가끔 나오는데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저한테 목사라고 부르기 보다는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합니다. 저한테 왜 굳이 ‘하나님, 예수’ 얘기를 해야 되느냐고 그것 좀 빼고 얘기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페이스북 댓글에 ‘기독교 목사한테 예수 빼고 얘기하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썼습니다. 

성경 자체는 사실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니면 죽었다 깨도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동국대전이라는 경전의 한 부분을 읽을 때 믿음의 경험이 있든 내용 자체를 신뢰를 하던 밑바탕이 있어야 그 경전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것이지만 믿음의 체계들을 잘 배우다 보면 믿음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믿음도 또 다른 신비의 경험이 있지 않으면 하나의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읽기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80세가 넘으신 권사님이 성경공부를 하러 오셔서 하시는 얘기가 자기는 늘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인가? 를 묻는 그런 성경공부를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씩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헷갈려 하는데 어떻게 말씀을 저렇게 다르게 볼 수 있을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상징과 신비와 역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의 관점에서 생명을 보지 않으면 다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다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공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망의 말씀이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정죄하든 다른 사람을 정죄하든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양이 있고 염소가 있다고 얘기하면 어떤 사람은 매일 자신이 염소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늘 자기가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긍정적이거나 너무나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은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정말 성인이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딸을 키우면서 열 받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제 아내도 자신이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사는데 딸 눈치는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생명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어떤 논리나 원리나 어떤 원칙이 반드시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201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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