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1

저하고 성경공부를 하신 어떤 목사님께서 도대체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푸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을 푸는 데는 중요한 key가 있습니다. 성경은 상징과 신비와 역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진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잘못 오해가 되어버리면 신비는 신비주의로 가는 것이고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기호에서 철학으로 가는 것이고 역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 못 하는 또 다른 불가지론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많은 상징과 수많은 신비와 수많은 역설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어떤 한 구절 때문에 전체를 다 왜곡시킬 수도 있고 또 아무리 좋은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 해석을 통해서 사람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구원파하면 일반적인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김세윤 박사라고 아주 유명한 바울연구가가 계시는데 그 분이 구원파는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형태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미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파라고 하는 교주를 만들고 어떤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서 종교가 사회적 기능도 떨어질 뿐만 아니라 종교의 신앙의 관점조차도 까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라고 하는 이 종교가 특별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기능이 무엇일까? 통합의 기능도 있고 인생의 의미의 기능도 있고 그렇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별히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의 기능, 본질의 진리가 무엇일까? 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단일수록 풀리지 않는 것을 풀리게 만듭니다. 신비인데 거기 갔더니 신비롭게 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30년 동안 병원에서 한 사람씩 상담을 해 주신 목사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하시는 얘기가 어떤 심리적인 이론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들이댔더니 안 통하더라는 것입니다. 5만 명을 만나면 5만 개의 text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5만 명이 정말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다르고 너무나 다른 이론들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원리로 자꾸 들어가서 원리주의자가 되면 원리는 시원합니다. 그런데 그 원리가 어떻게 드러나느냐 라고 하는 이 삶의 모호함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상처를 얘기하면 아마도 밤을 새야 될 것입니다. 진리가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 진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정말 다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고 했을 때 주제가 생명입니다.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생명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정말로 다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전체를 끌고 가는 원리는 있습니다. 그 원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삶의 역사는 너무나 다양합니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마녀사냥 하고 종교전쟁 하고 십자군 전쟁을 하면서 어마어마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종교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풀어야 될지 모릅니다. 또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2차 세계 대전 때 6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리가 분명하다 할지라도 우리들의 각자의 삶 속에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여러 가지 단어로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존재들이 영원한 생명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생명 속에 사랑의 요소도 있지만 철저한 공동체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벗어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생명 자체가 생명으로 보존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엄청난 진리의 깨달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공동체 안에서 풀어내지 않으면 사실은 그것은 다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이 했던 것입니다. spiritual knowledge라고 하는 영적 지식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지식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단으로 찍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라고 하는 것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쾌락주의로 가든지 아니면 철저한 금욕주의로 가버렸습니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는 모양이 다를 뿐이지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로 가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기쁨이 있지만 쾌락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경건을 추구하지만 금욕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땅을 딛고 살고 있는 것이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히 타협적이고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생명입니다. 아이를 너무 깨끗하게 키우면 아이가 정말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 알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코 열심히 먹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 가슴에 손수건 달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깨끗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너무 타협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태백산맥이라고 하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 김범우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닙니다. 굉장히 애매모호한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삶이 진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너무 거룩하고 너무 깨끗하면 이단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단으로 가지 않으려면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삶의 모호함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야 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말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두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척하고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IBM, 이왕 버린 몸이라고 막 사는 것입니다. 창녀와 세리는 이왕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척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먹기를 탐하시고 세리와 창녀들과 같이 지내십니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보면 거룩하지 않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의 삶을 따라가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와 창녀 사이에서 늘 중간인 처럼 보인 것이고 그 당시에 제롯당이라는 혁명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사막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치의 극단주의였고 하나는 사막으로 가는 종교의 극단주의가 있었습니다. 종교의 극단주의인 에세네파는 아예 삶을 등지고 사막에 들어가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제롯당은 정치적 혁명을 부르짖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롯유다가 혁명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혁명을 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늘 쫓아다녔는데 주님은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으시고 매일 먹기를 탐하시고 놀기만 하셨습니다. 게다가 또 세례요한처럼 광야에 가서 약대 옷을 입고 석청을 먹어야 하는데 너무 잘 드셨습니다. 

저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면 진리는 포기하지 말자 그렇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자리는 너무나 치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함께 품고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것도 이 땅에서 꿈꾸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다윗의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는 말입니다. 현실은 땅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영성이라고 하는 하늘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꿈을 꾸는 것, 영성을 갖고 있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합니다. 진리를 갖고 있지만, 진리는 분명하지만 그 진리를 살아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너그러워져야 되고 내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땅과 법과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땅은 공간, 법은 그 공간을 다스리는 시스템, 그리고 주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간이 어디이고 법이 무엇이고 주체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이 마태복음의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천국인데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첫 번째로 족보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약속과 다윗이 가지고 있던 약속을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의 성취라고 하는 계보는 약속이라고 하는 족보인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말씀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갈 때 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14, 14, 14 이 14라고 하는 숫자는 다윗의 숫자입니다. 누가복음에 가면 예수님의 족보가 또 나옵니다. 그런데 족보를 왜 14대 씩 나눴을 까? 히브리의 글자는 알파벳 하나하나가 다 자음인데 하나하나가 다 숫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수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수가 없고 알파벳 하나하나가 숫자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라는 히브리어 글자가 14라는 숫자와 같은 것입니다. 가공된 것입니다. 언약의 족보가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족보, 왕의 족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하는 주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과 국민은 다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백성이 아니라 국민입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주체는 국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주체는 하나님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을 보면 철학자들이 꿈꿨던 나라들은 선인정치를 꿈꾸는 나라였습니다. 니체가 말한 철인, 슈퍼맨이라는 개념도 우리를 뛰어넘는 초월자가 나와서 우리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악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균형과 견제를 위해 삼권분립을 합니다. 권력을 잡는 순간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견제할 장치를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균형을 잡아서 독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도 소수가 독식하지 못하게 하는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예수라고 하는 것을 마태복음은 시작부터 족보를 나열하며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어져 내려오는 왕의 족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14라는 수를 사용하여 왕의 족보, 다윗의 족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 안에선 ‘낳고’가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족보 안에 스캔들 있는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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