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2

장모님이 사모님이신데 딸이랑 아버지가 동침해서 애를 낳았다고 하니까 그런 내용은 성경에서 뺏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너무 남사스러운 것입니다. 가끔 성경을 차에서 오디오로 들을 때가 있는데 하필 어머니랑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그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사스러운 이야기가 예수님의 족보에 다섯 편이나 나옵니다. 저희 정씨 집안에 정호걸이라는 시조가 있는데 제 이름을 족보에 넣으라고 형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십만 원을 내면 족보에 이름이 인쇄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씨 집안 사람이라고 그 족보에는 이름을 넣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족보는 특별히 유대인들의 족보는 남자 중심입니다. 남자가 생명을 낳은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은 남성성입니다. 남자가 낳은 것이고 여자는 보호하고 기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족보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더구나 2천 년 전에 쓴 마태복음이 거의 초창기 때 쓴 말씀인데 그 말씀 자체가 남성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여자들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에게서, ~~에게서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는데 유다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배레스와 세라를 낳고(3절)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5절)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절)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동침도 하지 않았는데 애를 낳았습니다.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눈맞아서 애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직업이 창녀인데 유대인을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룻은 결혼을 두 번 했습니다. 과부가 재혼을 한 것입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다윗은 엄청난 죄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간통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처녀가 애를 낳았습니다. 정말 아침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 나라의 족보를 쓰는데 왜 하필 이런 사람들에 대해 쓰게 되었을까? 저자가 이런 사람들은 빼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아는 목사님이 자서전을 쓸 수 있는 툴을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툴 안에 내용을 채우면 자서전이 정리되는 것입니다. 보통 역경이 있다가 성공하게 되는 것이 자서전의 form이라고 한다면 이름만 바꿔서 자서전을 완성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빼고 싶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족보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만 빼고 네 여자가 다 이방인입니다. 사실 밧세바는 이방인이 아닌데 우리야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고 하나님 앞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고 또 다르게 얘기하면 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은 동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전멸전쟁은 어린아이까지 다 죽입니다. 지금은 전쟁이 나면 민간인은 죽이면 안 되는 법이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다 죽였다면 국제법상 전범으로 다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데 안 믿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영이 없어서 못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물과 같은 것입니다. 

첫 번째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이들은 여자입니다. 
여자는 증인도 될 수 없고 상속권도 없고 그들은 족보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남자에 속한 사람이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여자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진짜로 봤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가공했으면 여자를 증인으로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기도 그럴듯하게 사기를 쳐야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사회적 개념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세 번째 이들은 도덕과 윤리를 떠나 있습니다. 
도덕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 세 가지 특징을 보면 도대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네 번째 이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다섯 사람이 다 다릅니다. 그렇지 만 궁극적으로 이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혈이 아닙니다. 목사 딸이다, 삼대가 믿는다, 사대가 믿는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피와 상관없습니다. 물보다 진한 것이 피이고 피 보다 더 진한 것이 영입니다. 영적인 생명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이단들은 부모를 떠나서 영적인 관계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영만 생각하면 영지주의자가 됩니다. 사도바울이 영적인 이스라엘을 얘기하는데 육적인 이스라엘도 보니까 상관없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물도 피도 다 중요한데 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다 사망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관계가 있고 사망의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도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망 관계가 됩니다. 부모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속에서 잘못하면 사망의 메카니즘에 빠지게 됩니다. 메카니즘이라는 것은 내가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시스템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에 빠져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집사님께 제발 좋게 생각하라고 얘기했더니 생각 안하려고 해도 계속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말로는 생각하지 마시라고 얘기하고 싶은데 그 분이 하는 얘기가 그냥 머리에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것이 메카니즘입니다.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들어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스템대로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법이 있고 생명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으로 가면 내가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관계를 하지 않고 사망의 관계를 합니다. 부모와 자식관계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관계를 하라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와 자식 관계도 생명의 관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관계를 합니다. 그래서 원수가 됩니다. 가족이 원수가 됩니다. 

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피의 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것은 경제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제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반드시 남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라는 법이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여자를 보호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연약한 자,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족보에 들어가려면 큰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는 철저하게 잘됨교, 땅의 종교입니다. 유교를 종교로 봐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까지 얘기하는 이유가 유교는 내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제대로 잘 살아야지만 조상신이 됩니다. 제대로 살지 못하면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어나는 것에서부터 해당 됩니다. 서자는 아무리 잘 살아도 조상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조상신이 되기 위해서 지금 잘 살아야 되고 지금 성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교입니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는 이미 조상신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세계는 다른 것입니다. 

족보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대단한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작은 자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연약함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강함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만이 가장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진짜 부자가 진짜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자를 들어서 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내가 무엇인가 있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은 교인이 백 명 정도 되면 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백 명 있는 교회는 이백 명 되기를 기다립니다. 이백 명 되는 교회는 오백 명, 오백 명 되는 교회는 천 명 정도 있으면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교인이 천 명 되는 교회 목사님을 아는데 그 분은 이천 명만 되면 자기네 교회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항상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것은 소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로 살아야 된다고 얘기하면서 늘 소유를 얘기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능력을 쫓아가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보통 은사를 얘기합니다. 가르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 은사를 얘기하는데 그것 보다 조금 더한 것이 성품입니다. 그리고 은사와 성품을 뛰어넘는 것이 존재가치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통해서도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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