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3

제가 기독교인들이 더 의리가 없는 것 같아서 사람들에게 의리 있게 살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능력을 보고 시작하니까 존재가 아닌 능력을 자꾸 쫓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보통 사람들이 은사를 얘기합니다. 그것 보다 조금 더한 것이 성품입니다. 그리고 은사와 성품을 뛰어넘는 것이 존재입니다. 제가 설교부탁을 받고 가서 설교를 했는데 다 끝나고 나서 담당자게 앉아있는 분들 중에 제 설교를 알아들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앉아계신 분들이 신체장애만 있으신 분들인 줄 알았는데 정신지체이신 분들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지체아들도 성품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사실 은사도 아니고 성품도 아닙니다. 존재라는 것은 은사와 성품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통해서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늘 종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할아버지들이 여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자들이 앉아있으면 할아버지들이 열 받아하십니다. 이것이 도덕입니다. 미국의 도덕과 한국의 도덕이 다릅니다. 도덕은 그 시대를 반영하고 그 문화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미국 신학교에 갔더니 흑인들이 담배를 피우고 돌아다녔습니다. 아무리 날라리 전도사였지만 뒤에서 몰래 피우는 것은 몰라도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울 수 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들인데 그 나라에서는 7세 때 부터 담배를 피운다고 얘기했습니다. 담배가 그들의 문화의 하나인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따지는 것이 도덕이고 윤리는 조금 더 앞으로 나갑니다. 보다 본질적인 것을 얘기합니다. 할아버지가 일어나서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이유는 약자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윤리는 정신입니다. 미국에서는 약자가 여자이고 우리나라는 약자가 노인입니다.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반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도덕과 윤리를 초월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나라에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우리는 그 법을 실정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개인에게는 사상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자유를 통해서 내 양심상 그 법을 뛰어넘어서 살겠다고 하는 것이 양심법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양심수라고 부릅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도 똑같습니다. 종교는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지 않으면 생명을 살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맨날 착한 사람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를 지키는 옳은 사람입니다. 

반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이라는 말은 수단과 방법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은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Yes이지만 초월이라는 말은 Yes, No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의사가 병을 고치는데 좋은 것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독도 사용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내 몸에 너무나 나와 다른 생명체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들을 다 없애고 싶은데 만약 다 없앤다면 나도 죽을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 보다 진리가 더 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도덕과 윤리가 더 큽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도덕과 윤리상 노예는 당연히 있는 계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노예제도를 폐지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KKK라는 백인주의자들이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흑인이나 노예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빌레몬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네시모를 자기가 낳았다고 아들이라고 하고 그를 자신과 같은 사역자로 부릅니다. 노예를 목사로 부릅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옛날에 오네시모가 했던 행동을 대신 다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예제도를 철폐하라는 것 보다 훨씬 더 진보적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생명을 보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늘 도덕과 윤리를 따져서 노예는 노예, 주인은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도 똑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사는 순간에 진리하고 상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뛰어넘어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착하게 살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이 안에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다말의 믿음입니다. 
유다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다말과 결혼 하자마자 죽었습니다. 그래서 법에 따라 둘째아들을 다말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셋째가 너무 어려서 더 자라면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친정에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려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말에게는 자신의 생존권이 있습니다. 친정에서 보면 입이 하나 더 늘어난 것입니다. 다말은 친정에 가봤자 대접 받지 못하는 생명인 것입니다. 늘 눈치보고 사는데 시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시아버지 입장에서는 자꾸 아들이 죽으니까 셋째는 안 주고 싶은 것입니다. 옛날 버전으로 얘기하면 남편 잡아먹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다말이 꾀를 씁니다. 변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잠을 자고 아이를 갖습니다. 유다가 친정에 보냈더니 바람을 피운다고 죽이려고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죽이려는 순간에 다말이 시아버지에게 받은 증표 도장과 지팡이를 보여줍니다. 그랬더니 유다가 ‘네가 옳도다. 네가 정당하다.’ 라고 말합니다. 다말은 자기가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보고 있는데 유다의 집안에서 자기가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증표가 유다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도덕과 윤리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은 유다와 다말이 둘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말이 옳다고 인정하면서 진리의 법을 이야기합니다. 그 진리는 다말이 가지고 있는 생존권이 유다한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처소,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분의 관이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있다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양의 삶으로 그 음성을 듣고 쫓아갑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인데 생명관계입니다. 그러면 목자의 음성을 들은 양은 산 넘어, 물 넘어서 목자의 음성을 쫓아가야지만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양의 신분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처소관입니다. 이것이 깨져버리면 염소가 됩니다. 염소는 자기가 옳은 대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삽니다. 나도 모르는데 하나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고 나니까 제 인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살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생존권, 사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 결단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결단이 도덕과 윤리를 떠나있어야 합니다. 

저희 집이 불교집안이었는데 제사지낼 때 제가 축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진짜로 믿고 나니까 조상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마음이 있고 조상을 위해서 기념하는 예배는 드릴 수 있어도 내가 조상신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저를 배제시켰습니다. 그리고 형님이 믿기 시작하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막내라서 집안에서 결정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님하고 스물네 살 차이가 나고 제일 막내여서 제가 말발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나서 말발이 섰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를 제가 하니까 저 혼자 떠들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상황입니다. 

이슬람 상황으로 들어가 보면 이슬람은 정치, 종교, 경제가 다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거기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정치적인 것, 먹고 사는 문제인 경제권도 포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지역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슬람의 어떤 여자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사형을 언도 받았는데 여론이 떠드니까 그 사람이 석방됐습니다. 이런 것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존권이 어디에 있느냐고 했을 때 그 사회를 뛰어넘거나 그 상황을 뛰어넘지 않으면 우리는 죽었다 깨도 그 상황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말이 주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라합의 믿음입니다. 
라합은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기생이었습니다. 소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스파이가 들어온 것입니다. 라합이 그 정탐꾼들을 살려줍니다. 사실은 살려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대, 하나님이 하신 거야,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고 있대.’ 라고 하는 말들을 소식으로 듣고 나서 자기 목숨을 정탐꾼과 바꾼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밑바닥에 살고 있어도 자기 고향이고 자기 민족입니다. 혈연을 배신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 있습니다.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가롯유다하고 베드로가 똑같이 죄를 지었는데 제가 보기에는 베드로가 더 나쁜 놈 같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끝까지 변명하고 있고 가롯유다는 멋있게 자살했습니다. 일본식 문화로 얘기하면 굉장히 멋있는 것입니다. 자기 죄에 대해 책임을 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를 다르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너무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면 엄밀히 따졌을 때 아무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벼락이 떨어진다면 전멸할 것입니다. 헌법적인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거스르는 죄가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간음이니까 우르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민족을 초월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민족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지만 대한민국을 미워해야 합니다. 독신의 은사를 가져야 결혼생활 진짜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멍청하다는 것을 깨달아야지 지식의 은사가 터집니다. 

세 번째 룻의 믿음입니다. 
룻은 천상과부가 되었습니다. 혼자만 아니라 삼대가 과부가 되었습니다.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고나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을 모아서 각자 친청으로 가서 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뛰어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룻은 떠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같이 못 먹고 못 살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삭줍기를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할아버지인 이세를 낳습니다. 룻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상황 속에서 최악의 경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말도 라합도 룻도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여인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자신들의 헌신이 있습니다.

네 번째 우리야의 믿음입니다. 
우리야는 헷족속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안 나가고 왕궁을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너무 예뻐서 여자를 데리고 오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남편 우리야는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들어오라고 해서 하룻밤 자게 하려고 했더니 우리야는 집에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전시에 어떻게 집에 가서 아내와 잠을 잘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번에는 술을 먹여봅니다. 그런데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전쟁터 가장 전방에 세우게 해서 우리야가 죽었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왕이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얘기했습니다. 우리야가 가지고 있던 자신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충성심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마리아의 믿음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만약 애인이 어느 날 갑자기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면 수녀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장이 물어보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과 의사들이 와서 진단을 하는 이야기가 이 연극의 내용입니다. 제가 물어보면 청년들은 가장 좋은 사람이 ‘가만히 끊고자 하여’ 하는 사람입니다. 미친 여자이거나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마리아는 어땠을까요? 천사가 와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당시의 법으로는 돌 맞아서 죽어야 합니다. 저라면 ‘사단아 물러가라.’ 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지 모르지만 마리아가 ‘아멘’합니다. 아멘은 ‘말씀대로 될지어다.’ 라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어주는 믿음이 마리아에게 있었습니다. 

다 스캔들인데 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족보 안에서는 그들을 믿음의 여인이라고 믿음의 대가들이라고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것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얘기가 안 됩니다. 그것은 여전히 도덕과 윤리 안에 갇혀 있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살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사라에게 천사가 와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했을 때 ‘아멘’ 했으면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의 이름이 ‘웃음’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비웃음입니다. 이삭을 부를 때 마다 자신들의 불신앙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두 가지입니다. 임마누엘과 예수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현존하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과거에 살았어, 미래의 살 거야, 가 아니라 현재성입니다. I am who I am. 나는 나야 라고 하는 것이 모세에게 밝히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am 은 현존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라는 것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다면 예수의 생명이 나한테 있다면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참 믿음이 좋았는데 지금은 안 좋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 자체가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나 죽으면 천국 가겠지?’ 그것은 미래의 하나님인데 지금은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에 보면 천국은 그림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림자는 실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실제라고 하는 자체를 살아내지 않으면 천국에 가도 그 실제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살지 않으면 천국에 가서도 모릅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피아노를 치지 않으면 천국에 가서 진짜 피아노를 만날텐데 내가 쳐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장식품이지 악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성으로 오셨는데 이 현재성의 생명을 가지려면 마리아의 신앙에 요셉의 신앙이 더해져야 합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말씀이 오면 ‘아멘’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것을 기다리는 인내하는 신앙입니다. 아멘에 인내를 더하니까 살아있는 생명이 됩니다. 진리가 오면 그것에 대해서 동의, 아멘하고 동의한 것 속에서 내 마음 속에서 생명력 있고 운동력 있는 그 말씀이 내 체질을 바꿉니다. 나타날 때 까지 인내하고 있으면 진짜 예수, 살아있는 생명이 우리한테 working,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요셉의 신앙과 마리아의 신앙 속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탄생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이 믿음의 족보입니다. 믿음의 족보는 결국 믿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죽음을 묵상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믿음의 족보가 없고 믿음의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내는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영이 없는 사람과 같은 느낌으로 살고 있지만 지극히 작은 자와 같은 삶으로 살고 있지만 그리고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사건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믿음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드러내야지만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사건과 상황과 사람에 대해서 너무 집요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내 삶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스캔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내기를 바랍니다. 

2014.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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