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마태복음 전반부에서는 기적을 베푸시다가 후반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죄에 대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죄가 육체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고 죄가 마음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육체 가운데 나타나니까 육체의 연약함으로 드러나고 마음은 두려워집니다. 죄는 우리 몸을 약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있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맨날 죄 가운데 빠져서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의 십자를 통해서 육체가 강건해지고 마음이 담대해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를 경험하지 않으면 강건함과 담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이 강건해지고 마음이 담대해질 수 있는 십자가의 용서의 길을 가야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용사로 살아갈 때 마다 이제는 죄를 다시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번은 죄에 사로잡혀있는 사람, 2번은 용서 받은 사람, 그런데 3번은 용서하는 자입니다. 용서받은 자는 강건해지고 담대해지는 것이지만 용서하는 자는 육체의 연약함이든 강건함이든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연약함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주는 내 마음이고 강건하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드러내 주는 것이고 또 어떤 때는 내가 그 두려움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매한 고난,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셨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연약하든 강건하든 두려움이든 담대함이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악의 삶이고 용서받은 것은 선의 삶이라면 용서하는 자는 선과 악을 동시에 경험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로 사는 것이 강건하고 담대한 것이지만 선과 악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용서하는 자로써 어떤 때는 악으로 일부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악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악의 소굴에 들어갔을 때 죽을 맛이지만 그 안에서도 강건해지고 또 그 안에서도 두려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자와 용서받는 자와 용서하는 자의 삶에서 용서 받는 자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몇 천억 되는 돈입니다. 그것을 어린아이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의 마음은 그 돈이 어떤 돈인지 모르기 때문에 받지 못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받은 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뭔가 대가지불을 하지도 않았는데 용서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갑자기 오더니 스마트폰을 하나 줬습니다. 이것을 선뜻 받는 마음은 어린아이 같음 마음인데 선뜻 받지 못하는 마음은 이게 얼마짜리인데 나한테 주지?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짜로 줄 리가 없는데? 혹시 이 사람이 이것을 나한테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라는 선물을 누가 줬을 때 사람들이 선뜻 못 받는 이유는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용서하겠어? 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지불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어른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마음은 늘 계산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4절)’ 

어린아이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 용서의 세계,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됩니다. 공짜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어로 E-mail이 왔습니다. 금고에 500억이 있는데 나한테 5만원만 내면 500억의 1/10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사기꾼 아니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입니다. 5만 원 떼어먹으려고 하는 것이로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지혜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만 믿고서 구원받아? 말이 안 돼지 그게 왜 공짜야? 말이 안 돼지, 뭐가 있겠지.’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기꾼들이 그렇게 사기를 칩니다. 그리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경험한 사람들은 인생에 공짜가 없다고 다 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용서해 줄게?’라고 하시면 ‘네 감사합니다.’ 라고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 받습니다. ‘용서 한다구요? 뭐가 있겠지.’ 하면서 뭔가를 계속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 편에서 대가지불을 하신 것입니다. 용서를 그냥 말로 한 것이 아니고 용서하시기 위해서 본인이 죽음에 대한 대가지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에 못 받습니다. 편견은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고 선입견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경험을 통해서 갖게 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용서 받은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용서 받은 것입니다.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구원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사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구원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용서 받은 것에서 끝나지 않고 용서하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데는 그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절)’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내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 죽는 게 나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한 적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려 깊은 바다에 빠뜨려질 사람입니다.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8절)’ 

우리는 다 좀비가 되는 것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절)’ 

그리고 나서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과정이 용서하는 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으면 눈도 발도 다 빼버리고 장기도 빼야 합니다. 온갖 해로운 것을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온 몸이 죄 덩어리입니다. 그러면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지극히 작은 자의 삶 속에서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데 그 모든 죄는 사실은 주님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의 삶을 살려면 지극히 작은 자를 용서하는 삶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작은 자를 품고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요? 

첫 번째 seek 찾으라. 
12절 말씀에 보면 길 잃은 양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용서하는 자의 삶입니다. 찾을 때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손해를 감수하고 찾는 것입니다. 연약함과 내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찾아야 됩니다. 그것이 용서하는 자의 삶입니다. 내가 연약하고 두렵다할지라도 찾아야 합니다. 실제로 연약함이 보이고 두려움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자의 용서를 통해서 나타나는 우리가 또 다른 용서하는 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재 speak 기도하라.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5-18절)’ 

내가 땅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그대로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 보면 권고하는 것이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는 것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9-20절)’ 

함께 모여서 구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모여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몇 번 용서할까요? 베드로가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세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면 490번인데 죄를 지은 사람이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똑같은 짓을 하면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죄와는 끝까지 싸우는데 사람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형제의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1:1로 가서 얘기하고 3:1로 가서 얘기하고 여럿이 가서 얘기하고 나서도 안 되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1:1, 3:1, 다:1 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는 경우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면 1:1 ‘내가 무슨 죄가 있어?’ 3:1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다:1 ‘나 죄 없어.’ 죄가 없다고 끝까지 우기는 것입니다. 그 때는 이방인처럼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할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용서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계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는 잘못한 것을 아는데 또 계속해서 잘못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미안해.’ 라는 말을 잘 해야 합니다. ‘미안해.’를 입에 달고 다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용서 하면 안 됩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선을 그으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갑입니다. 매고 푸는 것을 갑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니까 자신이 악이면서도 선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기준이 없는 것이니까 매면 매일 것이고 풀면 풀릴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절)’ 

그들은 ‘두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면 그 두 사람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선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교회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미안한 것을 모르는 모욕과 수치도 모르는 놈들은 기준을 세우고 교회가 징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도하라는 것은 기준을 세우라는 것이고 세 번째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찾는 것은 나의 열심, 성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실하게 기준을 세우고 생명을 찾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내가 용서해야할 사람들을 성실하게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세우면서 생명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8장 용서장입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34절)’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교만입니다. 용서는 겸손으로 오는 것이고 용서를 못 하거나 못 받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내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용서도 내가 받고 용서 받으려면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이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교만이고 나타나는 것은 오만함입니다. 내가 용서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교만한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말은 누군가가 대가지불을 하지 않았다면 내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용서받은 자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의 마음은 열심히 성실하게 구하고 살아야 하고 기준을 세워나가는 것이고 내가 생명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겸손의 표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맨날 자기 죄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것도 교만한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죄 값을 치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파는 여기까지이고 이제 우리는 하나를 더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맨날 강건해지고 맨날 담대해 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약하고 두려움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자의 삶은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되게 약해 보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생명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하면 안 되고 두려우면 안 된다고 하는 강건하고 담대함을 얘기하는 수준은 성공신학, 영광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연약함과 두려움을 얘기하는 것이 고난의 신학입니다. 고난의 신학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 구원파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원파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자는 고난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00억을 탕감 받은 종은 100만 원을 탕감해 주지 않고 꼭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100억을 까먹어서 아무것도 없으니까 100만 원이라 곧 받아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100억을 탕감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기억하지 않으면 내가 지금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100만원이라도 해먹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정도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탕감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성질대로 하면 100억 탕감 받은 종을 잘라버리고 싶은데 못 자릅니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깽판을 쳐도 아버지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2014.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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