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장 3

제가 서울대 앞에서 개척을 시작했는데 장모님 자녀들이 다 서울대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장모님께서 이런 교회에 서울대 애들이 오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모님께 서울대 애들이 제일 근심이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울증이 많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볼 때는 대단해 보이는데 자기네끼리도 경쟁하고 세계적으로도 별로 순위가 높지 않고 또 맨날 위만 보고 사니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없으니까 늘 평안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평안입니다. 한 달에 2천만 원을 생활비로 쓰다가 1천만 원으로 줄었다고 죽을 맛이라고 우는 사람이 있어서 제가 위로해 주었습니다. 제가 더 부자입니다. 그리고 3천 만 원을 생활비로 쓰다가 천만 원밖에 못쓴다고 우시는 분이 있어서 제가 예수를 전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돈이 아닙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평안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평안조차도 우리는 까먹습니다. 우리는 너무 없다고 가난하다고 슬퍼서 근심하고 울고 갑니다. 부자도 근심하고 가고 가난한 자도 근심하고 가는데 부자가 때깔이 낫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억울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못 살고 천국에 가서도 못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게 살아야 하는데 평안조차도 못 지킵니다. 더 기분 나쁜 것은 부자가 더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살아야 하는데 너무 평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부자청년처럼 재물을 가난한 사람한테 주고 따르라고 하니까 ‘네’하고 잘 따라갑니다. 정말 열 받습니다. 부자이기도 하고 믿음도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도 없고 믿음도 없습니다. 최악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버려’ 라고 하시면 근심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네’하고 버려야 합니다. 근심하고 간 사람들 많습니다. 

네 번째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갔는데 제자들이 궁금해 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23절)’ 

이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24절)’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절)’ 

부자가 천국에 못 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부자든 누구든 다 들어가기 힘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신정정치이기 때문에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부자는 당연히 신앙도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하나님이 축복해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축복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천국 가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부자는 당연히 축복 받았으니까 천국에 들어가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늘구멍을 크게 만드시든지 낙타를 작게 만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다섯 번째 하나님과 단일을 이루는 큰 자, 다스리는 자가 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절)’ 

우리가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단일을 이루는 것이고 다스리는 자가 큰 자고 큰 자가 섬기는 자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9절)’ 

부모, 형제, 자식, 전토가 나에게 근심거리입니다. 이 말씀이 이단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다 버리고 부모와의 인연도 끊으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고 부모에게 아들에게 또 어떤 관계를 하는데 피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부모를 버리라는 것이 부모를 무시하고 부모도 없다고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관계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 

여섯 번째 영생을 상속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역설입니다. 신앙은 상징과 신비와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설은 완전히 거꾸로 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버리는 것입니다. 버림의 끝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다 버리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 버립니다. 그래서 다 얻지 못합니다. 

전에 어떤 집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무엇인가 주시겠다고 하는데 주먹을 꼭 쥐고 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못 받습니다. 주먹 쥐고 있으니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놓으면 더 큰 것, 더 온전한 것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놓지 못하니까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 아들이 옛날에 500원짜리하고 1000원짜리하고 구별을 못했습니다. 500원을 주면 천원을 주겠다고 했더니 싫다고 합니다. 제 아들한테는 동전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500원을 못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상속 받았는데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면 죽을 것 같아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이는 탯줄이 생명의 공급선입니다. 탯줄이 생명줄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 세상에 나오려면 생명줄을 끊어야 합니다.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가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줄을 끊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 진짜 죽는 것입니다. 버리면 얻어지는 것인데 사람들은 버리는 것을 못합니다. 청년처럼 근심하고 갑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삽니다.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무소유를 얘기하고 벽보고 도를 닦으면서 버리자고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인들은 버리면 영생을 얻는다고 얘기하는데 버리지 못하고 맨날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가야 된다고 하고 먼저 된 자가 되었는데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속에서는 생명관계를 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고,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신비가 있는 세상이고 다스리는 자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상속해 주셨습니다. 

2014. 6. 27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