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1

마태복음은 독자가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이룰 것이냐 하는 것이 그들의 질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다른 복음서하고 다르게 굉장히 높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복음을 더 높은 차원으로 생각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요한복음 보다 마태복음이 더 차원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기준에 의해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겉으로 드러난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충분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미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몸에 할례의 흔적이 있고 날마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고 또 누구보다도 십계명을 또 십계명에서 파생된 613가지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의 그룹이 그냥 호락호락한 집단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종교적이고 정치와 경제와 종교가 다 연결되어 있는 그런 종교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이냐 라고 하는 차원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소위 장로교와 감리교의 차이를 말할 때 장로교는 이미 하나님이 구원하신 예정하심을 얘기하는 것이고 감리교는 이루는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장로교가 감리교를 이단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감리교도 장로교를 이단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구원의 양쪽의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감리교신학대학을 다녔지만 미국에서는 고신 쪽이나 총신 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있는 탈봇이라는 아주 보수적인 신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학교는 성경적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인데 칼빈을 기반으로 해서 웨슬리라고 하는 구원관의 두 가지 차원을 얘기합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 두 가지 차원 또는 이미 구원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예정하심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그 예정함을 통해서 자라나는 성숙한 영화, 성화를 이루는 그 삶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원관을 칼빈과 웨슬리가 만나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성경적 구원관이라고 말합니다. 

예정을 너무 강조하면 구원파가 됩니다.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 다 해결하셨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정의 끝까지 가면 구원파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이 장로교가 가장 많은 나라인데 미국은 1%도 안 됩니다. 대부분이 침례교와 감리교입니다. 다 구원 받았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 믿으면 끝이라고 하는 것이 장로교입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는 것, 이루는 구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구원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통해서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의 주제가 힘들고 어려운 교회 공동체가 분열 속에서 자꾸 틀리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을 통해서 어린아이 같이 말하고 어린아이 같이 깨닫고 어린아이 같이 생각했던 것들이 자라나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성장과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입니다. 독자가 유대인,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이루고 살 것인가? 어떻게 성화를 이루고 살 것인가? 이것이 고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예정론을 기반으로 읽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거의 행위에 대해 말씀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마태복음이고 열 처녀의 비유도 그렇고 달란트 비유 등 여러 가지 비유가 다 행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믿고 구원받는다는 이 차원으로 생각하면 마태복음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1장을 공부할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이 쓰셨다는 이방여인들의 이야기를 봤습니다. 두 번째는 더 충격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충격인데 소위 일반과학을 하는 사람, 동방박사들, 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내가 믿고 있고 내가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를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일반계시라는 이성과 특별계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은 은혜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보는 것이지만 이성은 합리성, 적합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이성 보다 말씀이 더 큰 것입니다. 이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말씀 안에서 이성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 가운데 이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성만 갖고 있으면 사실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적합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계시 보다 특별계시가 더 중요한 것이고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 일반계시를 연구하는 사람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철학이라는 것이 인문과학인데 사고 자체도 논리성과 합리성과 적합성을 따지고 시작하면 그것이 철학이 되는데 그 철학이 가지고 있는 논리가 쭉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원리가 됩니다. 원리화 되는 것입니다. 철학과 신학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철학은 원리화 시키는 것이고 신학은 그것이 관계성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첫 번째 운동의 원인자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에서는 그 원인자가 나와 같이 인격적으로 관계하고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과 신학의 차이입니다. 철학은 어떤 원리를 따지고 논리를 따지는 것이지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하늘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았다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특별계시,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 아버지, 나의 주님, 또는 메시야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억울한 일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읽었을 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세계인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누가 뭐래도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오셔서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 친구가 저한테 저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친구랑 친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 친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받은 상처가 정말 컸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잘 쫓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유대인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 네가 누구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신다면 정말 충격이 클 것입니다. 중학교 때 휴거라는 소설책을 읽었는데 휴거의 첫 장면이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까 사람들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주인공만 빼고 다들 휴거가 된 것입니다. 그런 충격인 것입니다. 

주님이 또 그런 얘기도 하셨습니다. 똑같은 공간,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심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내버려두신다고 했습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성전에 가면, 법궤 앞에 가면 다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공간이 아니라고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가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똑같은 공간에 있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내버려두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동방박사들이 뭘 했기에 무슨 이유로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사실 별을 보고 온 사람들은 정확하게 몰랐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별은 대단한 인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고 적어도 왕족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메시야, 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을 찾아보니까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되어있어서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갔는데 유대인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헤롯이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였는데 그것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찾아오는데 적어도 2년은 걸린 것입니다. 2년을 여행한다면 여행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먹고 자고, 낙타도 한 마리씩 탔는데 지금으로 치면 자동차 한 대씩 끌고 온 것입니다. 거기다가 황금, 유향, 몰약이라고 하는 그 당시의 가장 귀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대가지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적인 진리를 쫓아가다 보니까 정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메시야를 보고 그에게 선물을 주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 사는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니냐고 하기도 합니다. 위치상 이스라엘 옆이 페르시아이고 그 옆이 인도이고 그 동쪽에 우리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 아기 예수님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사람을 기다릴 때 어떻게 기다릴까요? 

첫 번째 내어주심입니다. 
내어주심이란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가장 도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서울과 지방의 차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과 그 안에 법궤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1년에 최소한 한 번, 기본적으로 세 번, 삼대절기에 예루살렘에 갑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 공간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라는 말도 맞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성전이라고 얘기하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지순례는 공간을 정확하게 찍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서 첫 번째 했던 설교가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건물 안에 들어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보이는 공간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서울, 그냥 도시가 아닌 것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가장 작지 않다고 했는데 이 말은 가장 작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도시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그 곳에는 아기예수의 부모밖에 없고 헤롯은 예루살렘의 왕궁에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두 공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 속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왕궁으로 가야 맞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아들은 예루살렘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헤롯은 어른이고 정치력, 경제력을 다 가지고 있는데 예수는 아기입니다. 아기는 응애응애 밖에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 왕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헤롯대제라고 말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옹알이 밖에 못하시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가 아기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좀 더 멋있게, 왕궁에서, 힘 있는 분으로 오시기를 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부족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로 오셨습니다. 메시야라면 머리 휘날리면서 백마 타고 오셔야 맞습니다. 잘생긴 얼굴에 천사들을 6천 명 정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셔야 맞는 것입니다. 

201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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