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3

거꾸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브라함 때부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고 동방박사들도 몇 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말씀,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릴 때 반드시 약속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면 이루어질 것이 없습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쌍방으로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각자에게, 공동체 가운데, 인류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똑같이 2장에서 우리가 읽은 것처럼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지키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잘 읽어보면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계속해서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릴 때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인내를 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계속 묻고 듣고 관찰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정란이 있고 유정란이 있습니다. 무정란은 약속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품고 있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말씀이 생명입니다. 생명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는 약속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것이 유정란입니다. 

닭이 알을 21일 동안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을 돌리며 품습니다. 인공부화를 할 때도 기계로 알을 계속 돌려줍니다. 알을 돌리는 과정이 적극적 인내의 과정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릴 때는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지나가버립니다. 그리스신화에 보면 기회의 신이 있는데 기회의 신은 머리카락이 앞에 있고 뒤는 대머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잡지 않으면 뒤에서는 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잡는다는 것이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극적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응답이고 하나는 현실의 응답입니다. 믿음의 응답은 하나님이 ‘줄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응답은 다니엘서에 보면 21일이 걸리거나 3일이 걸리는 것입니다. 21일과 3일 이라는 시간은 믿음의 응답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실제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이 때 깨어있는 것인데 깨어있다는 것은 두리번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두리번거리지 않으면 이루어졌을 때 우연히 된 것으로 해석합니다. 재수가 좋아서 됐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깨어있지 않으면, 두리번거리지 않으면 그것을 모릅니다. 줘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데도 불구하고 모릅니다. 모르고 또 달라고 합니다. 막달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제 아들한테는 뽑기를 할 수 있는 500원짜리 동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뽑기를 할 수 있게 해 줄게 하고 믿음의 응답을 줬는데도 계속 해달라고 조르면 화가 나서 안 해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응답이 있으면 그 후에는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빠.’ 한 마디 하고 눈 맞추면 됩니다. 둘 다 잊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 줘도 감사함이 없습니다. 또 옛날에 아들이 1000원을 줬는데 500원 짜리를 달라고 울었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덤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는 것입니다. 왜 기도한 것은 안 주고 다른 것을 주느냐고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것이 더 준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똑같습니다. 기도는 원리를, 하나님의 언약을 실제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말씀을 보면 안나선지자가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만약에 안나선지자가 화장실에 갔으면 잠깐 왔다 가신 예수님을 못 만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자연의 이치라고 말씀합니다. 구름을 보고 비가 오겠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다릴 때가 있고 편안하게 화장실에 가고 찜질방에 가고 다 해도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것이 아닌 그것에 집중해야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둑같이 이른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믿는 사람에게는 도둑같이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올 때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매일 줘도 못하는 것이고 역사적 예수를 만나는 가장 좋은 기회를 그 당시 헤롯대제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놓친 것입니다. ‘어 가네.’ 하고 간 것입니다. 나중에 성경에 그것을 놓친 사람들로 기록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서 혹시나 예루살렘인가? 하고서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아는 그들이 같이 가지 않았습니다. 깨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어딘가에 꽉 잡혀버리면 정말 필요하고 정말 중요한 것들을 우리가 보지 못합니다. 

지역 어린이도서관에 운동권분들이 오셔서 강의를 하시는데 어떤 강사분이 교회도 안 다니는데 도서관에 딱 들어서는 순간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 분이 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운동권도 영적인데 기독교인들이 더 영적이지 않습니다. 보는 것도 없고 뵈는 것도 없습니다. 

요즘 파동에 대해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사람이 6m반경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한테 느껴지는 파동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오래 사시면 얼굴만 봐도 그 사람 인생 다 보입니다. 저도 보입니다.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봤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패턴이 보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저건 바꾸면 되는데?’ 가끔 말해주고 싶을 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무당 끼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굴 자체가 심상치 않은 얼굴값 하는 사람 있습니다. 이런 것이 느껴져야 합니다. 

저는 누구를 만날 때 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환대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만난 사람 나를 통해서 축복 받고 온전히 환대해줄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랑 비슷한 꼴을 보면 싫어서 환대하지 못할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랑 똑같은 자식 미운 것 하고 똑같습니다. 그리고 뭔지는 모르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어떤 사람 얼굴을 보면 그 상처가 건드려질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부자가 정말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부자를 만나면 적개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내가 하나님 앞에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나가 그런 사람입니다. 민족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니느웨로 갈 수 없다고 하니까 주님이 죽음을 통과시키십니다. 죽음을 통과해야지 민족도 계급도 선입견도 다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와서 왕을 찾는다고 해서 뭐 있겠어? 라고 생각하는 부분 때문에 베들레헴에 못 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공동체에서는 약속이 생명,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제 가운데에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너 나 사랑해?’ 하나님이 사랑을 기다리십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생명을 낳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생명을 낳지 않으면 쾌락이 되는 것입니다. 쾌락은 나의 즐거움입니다. 사랑이 기쁨이 되어야지 기쁨을 통해서 스스로 대가지불을 하고 살아가야 되는데 쾌락이 되어버리면 나의 편리,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그 생명을 낳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고 자원함으로 있어야지 가능한 것입니다. 

자원함과 인내는 생명을 낳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내가 생명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어린 생명 앞에 가서, 진리 앞에 가서 무릎 꿇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진리가 헤롯입니다. 영원한 진리,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아기예수입니다. 

미국에서 목사들이 가장 많이 설교하는 것 중에 하나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믿음의 12가지 방법’ 이런 내용입니다. 그 때 그 때 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지만 결국에는 현존하는 진리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라는 것은 힘이 없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고난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망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망하는 것도 복입니다. 그런데 그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현존하는 진리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헤롯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있는 곳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았고 군사력도 있고 돈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짜 왕은 보잘 것 없고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존하는 진리가 아이를 죽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진리는 살리는 영입니다. 우리가 가장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살리는 것이 무엇일까? 사는 것이 무엇일까를 보지 않으면 늘 힘을 쫓아가고 권력을 쫓아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내하고 자원함으로 깨어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애굽으로 가시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면서 갈릴리로 가시고 갈릴리에서 나사렛으로 들어가십니다. 애굽에서는 이민생활을 하신 것인데 유학을 8년 동안 했는데 유학생활을 하면 늘 2등이고 3등입니다. 제가 외국에 나가서 돈 벌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한국에서 벌면 더 잘 벌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잘 하고 아무리 미국 사람들처럼 행동을 해도 우리는 늘 외국인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예수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영화중에 하나가 <방가방가>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고 울었습니다. 그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외국인이 아닌데 외국인처럼 사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외국인 노동자의 마음을 공감하게 됩니다. 자기의 삶 때문에 외국인 노릇을 했는데 외국인 노릇을 하다보니까 외국인들이 느끼는 핍박을 경험하게 되고 그들도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편이 되어줍니다. 그 영화 보고 은혜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부탄 사람으로 오셨고 우리를 체휼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애굽에 들어가셔서 늘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그네는 구약으로 얘기하면 히브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이 합비루라는 뜻입니다. 합비루가 가장 소외된 계층을 의미합니다. 똑같이 이스라엘이라는 말도 지극히 작은 민족, 지극히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누가 깨어있고 누가 하나님 앞에 자원함으로 올 수 있느냐 하면 지극히 작은 자의 삶으로 살아내는 자입니다. 내가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시편 51편 말씀을 보면 마음에 상함이, 통회하는 마음이 없는 한 우리는 깨어있지도 못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그것이 애굽 생활입니다. 갈릴리와 나사렛입니다. 저는 서울 구로동출신입니다. 

대학에 가서 보니까 시골에서 자란 애들은 너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강남 애들은 너무나 세련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구로동애들은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릅니다. 놀지도 못하고 세련되지도 못합니다. 갈릴리와 나사렛은 구로동과 같은 도시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얘기하면 전라도 광주입니다. 유명한 역사학자가 갈릴리 사람들은 욱하는 성격이 있고 이 사람들은 너무나 험악하고 너무나 예의바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나사렛은 갈릴리에서도 가장 못 사는 동네입니다. 주님이 그 곳에 오신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외된 공간에 놓여진 분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삶입니다. 주님이 스스로 기준을 낮추시면서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문을 낮추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높이고 있습니다. CTS라디오 방송을 하는데 같이 리베이트 하는 목사님은 교리와 신조를 믿지 않으면 다 가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다 높여놨습니다. 아무나 구원받지 못합니다. 저도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장로교인들이 천국에 가면 천사가 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얘기한답니다. 장로교인들은 자기네만 구원받는 줄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 상처가 될 테니까 다 조용히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소외된 공간 속으로 오셨습니다. 내가 지극히 작은 자이고 소외된 공간 속에 있기 때문에 정말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야지만 그 안에서 깨어있고 하나님 앞에 자원하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없는 것이 진짜 있는 것입니다. 진짜로 없다고 생각해야지 진짜로 있는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나에게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원수들이 너무 많아서 기도할 때 마다 원수들이 다 죽었으면 지구인의 반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겸손하면 다 나에게 주신 사람들이고 나에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함께 더불어서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망한 자의 모델이고 모든 실패자의 모델이십니다. 그런데 망해도 잘 망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로 소외된 공간에 살면 서도 자기가 부자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로동에서 같이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과 가끔 만나서 얘기하면 구로동에서 참 잘 자랐다고들 자화자찬을 합니다.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란 것이 기적이라고들 말합니다. 

생명을 살리고 있느냐? 생명이 어떤 생명이냐?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늘 묻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열심히 논리를 얘기하는데 헬라적인 사고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적인 사고는 말씀을 듣고 그냥 통전적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단도 삼단도 결국에는 마지막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단은 교단의 문제가 아니고 말씀 안에서 예수나 생명을 말하지 않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우리 안에 우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이단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논리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 다니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논리가 아니라 그 사람을 더 사랑해 보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싸워야 될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논리는 나중에 ‘이게 뭐지?’ 할 때 가르쳐 주는 것이고 ‘이게 뭐지?’ 라고 말하지 않는 한 계속 사랑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단은 그냥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세 가지 기준에 들어야 이단입니다. 세 가지를 뺀 나머지는 1.5단입니다. 잘 모르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 안에서 합의가 안 되니까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기독교라고 얘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성경입니다. 66권으로 막아놓았습니다. 다른 성경, 갈라디아서로 말하면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통일교는 통일교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만큼 중시합니다. 제가 아무리 여러분들한테 설명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성경만큼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최고의 말씀입니다. 다른 것을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그렇고 JMS도 그렇고 성경이 아닌 다른 성경들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삼위일체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론인데 삼위일체라는 것은 세 분의 인격이 있지만 그 분이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증인은 여호와가 최고의 신이고 여호와가 만든 신중에 하나가 예수입니다. 단신론인데 단신론은 삼위일체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만 강조 하거나 성령만 강조하거나 여호와하나님만 강조하면 다 이단입니다. 세 분이 같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론적인 것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설명할 때 마다 다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삼위일체를 가지고 막 얘기하는데 얘기하는 사람이 이단이라고 찍혔습니다. 이단 감별사가 이단으로 찍힌 것입니다. 그정도로 삼위일체는 말하는 순간에 다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래나 저래나 우리는 예수인데 예수가 아닌 또 다른 구원자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통일교 문선명씨가 살아있을 때 T.V방송을 틀다가 문선명씨를 봤습니다. 그랜데 그가 예수는 실패한 구원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성공한 구원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예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주입니다. 

교주가 있거나 삼위일체에서 벗어났거나 성경이 아닌 다른 성경을 읽으면 이단인 것입니다. 나머지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는 정말 용광로처럼 모든 것이 다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단, 삼단을 얘기하는데 아닌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2천 년 역사 속에서 이미 합의된 과정들이 있습니다. 이 합의가 진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 안에서 합의된 내용을 지켜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고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원칙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201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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