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장 2

수아사람 빌닷이 욥을 욕하면서 모든 세상의 법칙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한데 욥은 창대하다가 미약해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세상의 법칙을 액자로 만들어서 집이나 가게에 걸어놓습니다. 욥기 1장 1절에 보면 욥은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고 순전한 사람이었다가 몰락했기 때문에, 창대함에서 미약함으로 갔기 때문에 욥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대하지 않은 사람은 감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옛날에 못살았던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부자였던 사람들이 저만 만나면 이상하게 가난하다고 말하기에 바쁩니다. 부자였을 때는 왜 나를 안 만났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다 창대하다가 미약해지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욥기를 보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창대함과 창대함 사이에 반드시 통과해야 될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인데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창대함은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에서 고난 때문에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고생만 하다고 죽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고난도 이겨냅니다. 하지만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사고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의 언어는 미약에서 창대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첫 번째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미 선택받은 사람, 창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지 이 속에서 감사가 나옵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미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창대케 하셨기 때문에 그 상황 속에서도 나는 끝까지 그리아니하실찌라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절대감사 하고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택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선택받았다는 것, 선민사상이 너무 지나치면 문제이지만 선민이라고 하는 이 자부심은 절대로 까먹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도 저주할 것이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도 축복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순간에 누가 그를 저주하면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저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건드리면 죽는데?’ 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를 건드리면 슬퍼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드린 사람을 불쌍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선택받았다는 생각이 뚜렷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절대감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축복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복을 주셨습니다. 다스리고 정복하고 충만하라고 하는 원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하는 자가 아니라 축복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있어야 나눠줄 수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나눠주면 서로가 불쌍하고 서로가 미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원래 주셨습니다. 선택과 복의 차이가 있는데 선택은 말로 선택했다고 하시는 것이지만 복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의 권위가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권, 물권, 영권, 언권을 주셨습니다. 사람을 다스리고 물건을 다스리고 귀신을 다스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의 권한이 있습니다. 인권과 물권은 제사장이 가졌던 권리이고 영권은 왕이 가졌던 권한이고 언권은 선지자가 가졌던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들이 실제적으로 이 네 가지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이 네 가지의 권한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축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self 축복도 있습니다. 가끔 힘들면 자기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 해도 됩니다. 가금 힘들면 저는 그렇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터치해 주는 것도 축복 중에 하나입니다. 말로 축복하는 것도 있지만 터치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지고 죽는 사람도 있고 만져서 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아이들을 위해 축복기도 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으면 해 주는데 최고의 축복은 부모가 자식에게 해 주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권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축복하셨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상처받은 자로 세우셨습니다. 상처 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커서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다 어렸을 때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상처는 다 부모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우다가 화가 나니까 애한테 화풀이를 합니다. 그러면 애한테는 날벼락이 떨어진 느낌입니다. 아이는 그냥 배고프다고 한 마디 한 것인데 그 말한 것 때문에 반은 죽도록 혼이 났습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배고프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후로는 밥 먹을 때 마다 맞은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밥 먹는데 자기가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는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상처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아이들은 갑자기 때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한 삼십분 정도 왜 맞아야 되는지를 충분히 설명한 다음에 때리면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갑자기 잘못했다고 때리면 날벼락 떨어진 것 같아서 잘못을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상처 안 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모습입니다. 

하나 더 나가서 상처가 왜 개성이 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이것을 축복 아래서 해석하지 않으면 상처는 계속 죽음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자기 민족을 박해하는 애굽의 병사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일 환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세에게 재판관이냐고 오히려 따졌습니다. 거기다 애굽사람들은 살인자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모세는 실질적으로 살인의 죄를 피하기 위해서 도망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의 기자는 그것을 다르게 씁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하고’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도망간 것입니다. 수배를 당해서 도망간 것인데 히브리서 11장의 기자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축복 아래서 해석을 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나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건이든 그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밥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밥에 대한 관점을 또 다시 해석하지 않으면 계속 밥 먹을 때 마다 울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지 보는 관점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 아래서 상처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람마다 단점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점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장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맨날 감정이 헤픕니다. 남의 감정도 잘탑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을 읽어낼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빅마우스가 있습니다. 빅마우스는 마케팅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떠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상품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빅마우스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알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압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입 좀 다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입을 다물라고 하면 다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가서 말합니다. 우리교회 이야기를 다른 동네 사람이 더 잘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그 쪽 가서 떠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을 바꿔서 떠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점을 다르게 보고 떠들으라고 말합니다. 나쁘게 얘기하지 말고 괜찮다고 얘기하라고 합니다. 좋은 것도 있지 않느냐고 말해줍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단점이 최고의 장점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주신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사업을 하다가 네 번 망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은 아직도 부자입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망한 자의 아버지라고 얘기해 줬습니다. 두 번 정도 망하고 온 사람은 그 사람에게 항상 소개를 시켜줬습니다. 두 번 망한 사람은 자기는 두 번이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람한테 부모님이 살아계신 사람이 아무리 위로의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신 사람들은 있는 그 자체가 위로입니다. 나에게는 상처인데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열아홉 살부터 스물아홉 살 까지 십년 동안 운동권으로 살았는데 제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거역의 삶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에 스무 살에 복음을 만났으면 찌질하지 않게 살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또 대단한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희 선배 목사님이 80년대에 운동을 했던 도서관에 갔던 그 때 당시에 공부했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고 얘기하셨습니다. 그 선물이 민족의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뭔지는 모르지만 민족을 어떻게 살릴까? 민족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민족에 대해서 함께 아파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그만 교회를 하고 있지만 이 나라와 민족을 어떻게 세울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어떻게 살릴까?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그럴까를 보니까 운동권 때 했던 상처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지역에서 도서관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드는데 관장이 동네방네 다니며 강연을 했습니다. 도서관을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를 얘기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교회가 도와줬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상하다고 교회가 왜 도와주느냐고, 교회는 조심해야 된다고, 교회에 먹힐 수 있다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교회에 대한 의심을 하다가 목사님이 옛날에 운동권이었다고 말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해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운동권의 통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운동권을 만나면 그 사람의 고민과 생각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랍비문서에 엘리야한테 누가 찾아와서 그리스도, 메시야가 언제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오셨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래서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성문 밖에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성문 밖은 소회된 사람들, 병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성문 밖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누가 그리스도이고 누가 메시야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성문 밖에 가면 다 아파서 붕대를 싸매고 있는데 한 사람, 자기 붕대를 풀어서 다른 사람을 싸매주고 있는 사람이 메시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붕대가 있어야지 싸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멀쩡한 사람은 붕대가 없어서 싸매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붕대를 풀어서 다른 사람을 싸매줄 수 있는 사람이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상처는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는 어린 나귀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가 없으면 좋겠다고 상처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온전하고 깨끗하게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너무 깨끗해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진리를 못 쫓아갑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진리를 말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손해 볼 줄도 알아야 하는데 진리를 위해서는 내가 죽을 수도 있어야 하는데 모든 사람들한테 나는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종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 속에는 반드시 진리가 있습니다. 반드시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 이상해.’ 라고 할 때도 진리를 쫓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진리를 위해서 손해 보라고 할 때는 할 수 없이 손해 보고 가야 되는 것이고 모욕과 수치가 있다고 할지라도 진리를 쫓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갔는데 칼에 살짝 스치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전쟁터에 나갔는데 살짝 스친 상처 보고도 아프다고 너무 힘들어하면 한 대 맞고 두 대 더 맞습니다. 전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리썰웨폰 영화에서 경찰들이 옷을 벗으면서 상처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우리도 그런 신앙의 상처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멀쩡합니다. 칼 들고 들어오면 맨날 도망가고 뭐 하라고 하면 피하고 맨날 ‘당신은 찬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찬양만 듣고 ‘나가세, 나가세’ 같은 찬양은 듣지 않습니다. 

네 번째 상처를 받으면 나눠주는 자가 됩니다. 나눠주는 삶이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사람은 시간의 영원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명의 비밀은 나눠주는 것입니다. 생명은 나눠줄 때 영생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움켜쥐어야지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은 나눠주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것이 영생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으로 나눠주는 것 보다 더 큰 차원은 부재 가운데 죽음 가운데 주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나를 나눠주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내가 없이 나를 나눠주는 것이 진짜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을 나눠주셨습니다. 그런데 진짜 나눠준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지금까지 나눠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재 가운데 나눠주는 것입니다. 나 없이 나를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개척을 두 번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개척을 할 때 청년목회를 했는데 3년 동안 맨날 모이면 10명 12명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그러다가 공부가 다 끝나서 귀국할 때가 됐는데 어떤 학교의 한국 학생들을 위해서 불고기 파티를 했는데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교회가 30명 40명씩 모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떠나려고 하니까 갑자기 왜 부흥을 시키시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알았습니다. 내가 없어지더라도 그 교회가 남는 것이 영원히 내 이름이 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있을 때는 부흥하고 내가 없어지면 교회가 문을 닫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지금 14년이 됐는데 아직 살아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개척목사는 저입니다. 십년 째 됐을 때 그 교회에 갔었는데 저를 소개할 때 ‘L.A 꿈이 있는 교회를 설립하시고 개척하신 목사님’ 이라고 소개를 하셨습니다. 길게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희 지역에 OOO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3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아들이 아니라 교회를 잘 세울만한 새로운 목사님께 물려줬습니다. 그런데 지금 500명 정도 되는 교회로 컸습니다. 그런데 은퇴 목사님은 여전히 OOO교회의 설립자이면서 큰 교회의 개척목사님이십니다. 부재 가운데 나눠주는 것이 진짜인 것입니다.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