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2

두 번째 기적을 일으키라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제가 손을 대면 병자가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교회 금방 부흥할 것 같습니다. 온갖 질병이름을 간판에 써서 걸어놓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만지기만 해도 다 낫는다면 아마도 금방 부흥할 것입니다. 

저희 교회 어떤 자매가 자기 인생이 너무 우울한데 왜 우울하냐고 끝까지 물어봤더니 3천만 원이 필요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덥석 주고 싶었습니다. 목회자들이든지 누구든지 슈퍼맨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빨간 팬티만 입으면 힘이 세지고 가면만 쓰면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들이 아프시군요.’ 이렇게 한 마디만 해도 되는 용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늘 기적을 꿈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뛰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을 먼저 주셨습니다. 기적이 반복되면 자연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 위를 걸어가면 자연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빠져죽었다면 기적입니다. 기적과 자연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데 한 사람이 물 위를 걸어간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사실은 자연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숨 쉬는 것이 정말 기적입니다. 만약에 내가 숨을 한 번 쉴 때 마다 100원씩 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은 공짜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가장 비싼 것을 가장 귀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생명은 다 공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자연의 법칙을 깬 것이 기적인데 사람들은 맨날 기적을 바라고 삽니다. 다른 사람 보다 더 낫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적 바라고 살지 말고 말씀을 먹이고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사역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말씀을 먹이고 치는 것, 최고의 기적은 일상 가운데서 말씀을 주는 것입니다. 

현대의학과 동양의 의학의 차이가 있습니다.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으면 수술을 합니다. 그런데 동양의 의학은 똑같이 약을 먹는데 약의 차원이 다릅니다. 게다가 약을 먹이기 전에 보약을 먹게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침이나 뜸을 뜹니다. 가장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일상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청계산에 갔더니 서울의 모든 기가 그곳에 있어서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있는 곳인 것 같다고 거기에 가야지만 하늘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대단히 영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이 기적을 바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환자로 치면 수술을 받아야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영성 있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사람들과 평범하게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릅니다. 40일 금식  해야 되고 특별새벽기도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입신하는 것은 수술하는 것과 같습니다. 입신정도는 해야지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수술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상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가장 평범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내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좀 밋밋한 사람이고 청계산에 가야지만 또 대단한 것을 봐야지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이 맨날 뭐가 보인다고 하는데 대단하게 보이지만 제가 보기엔 환자입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삶을 주신 것입니다. 천지를 만드셔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을 보고 대단한 것을 느끼고 대단한 것을 깨달아야지만 자기가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현대의학입니다. 현대사회가 약물사회입니다. 각성제를 먹어야지만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제가 너무 피곤하다고 했더니 박카스를 먹으라고 누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박카스를 먹어야 되고 박카스도 모자라서 잠을 안자는 약을 먹고 비몽사몽을 이겨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곤하면 자야 됩니다. 일상의 삶이 주는 아주 평범한 것 속에 진리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진리를 빼먹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지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상 있습니다. 믿음의 세상이 있는데 그 믿음의 세계도 창조질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옥한음목사님이 하신 말씀인데 영적세계를 경험하면 할수록 일상의 삶, 자연의 세계를 벗어나는 영적세계는 없다는 것을 느끼셨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에는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영적 유혹입니다. 주님은 그 유혹을 말씀을 먹이고 치라는 것으로, 일상의 삶으로 이겨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음식으로 고치지 못할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고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먹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먹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어떤 의사는 절대로 수술을 받지 말라는 책을 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의사들도 가능하면 수술 안 받는다고 합니다. 암수술 전문의사가 암에 걸렸는데 수술을 안 받았다고 합니다. 암도 두 종류의 암이 있다고 합니다. 진짜 암은 죽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수술을 해도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가짜 암이라고 합니다. 정확하지 않은데 암인 것 같다고 진단을 하고 수술하고 나서 암수술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랍니다. 일본 의사가 쓴 책에 있는 내용들인데 그 분은 가능하면 수술 하지 말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환자들이 오면 어떤 음식을 먹으라고 얘기해주고 그냥 견디라고 얘기한다고 합니다. 감기 걸렸다고 오면 견디라고 하는 것이 처방입니다. 

영적으로 얘기하면 말씀공부 하고 성경 잘 읽고 말씀대로 잘 살려고 노력해 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게 다입니다. 그런데 뭐가 보인다, 뭐가 들린다고 하고 자기가 기도해 봤는데 주기도문 50번 외우라고 하셨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세계가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실은 사역을 하시면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기적도 십자가로 가는 길이었을 뿐이지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한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성공의 지름길로 가라고 유혹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형들을 봤을 때는 정말 다른 세상의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생이 돼보니까 다 별 볼일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누나들을 보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또 막상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까 다 별 볼일 없어 보였습니다. 스물 몇 살 때 제 선배가 서른이었는데 선배한테 왜 그렇게 사느냐고 상처 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서른이 되면 멋지게 살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 서른에 미국에서 화장실 청소했습니다. 

제 아내가 50이 돼서도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저에게 확 꽂혀서 한동안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교회 집사님 한 분이 50 돼도 똑같다고 그냥 이렇게 사는 거라고 얘기해 주셔서 위안이 됐습니다.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 늘 앞서 간 사람들을 보면서 로망을 가졌었는데 그게 하나의 관계이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몇 살이라고 뭘 해야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름길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점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고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점프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단은 계속 점프하라고 말합니다. 로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문화 속에도 한탕주의가 있습니다. 대박이 나기를 바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 대박이 나면 누군가는 쪽박을 찼다는 얘기가 됩니다. 부동산업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5억 10억 이익이 났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반대로 –5억 –10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부자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대박문화이고 로또문화이고 한탕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수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하나님의 충성스러우심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살아내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교인이 100명 되면 또는 교인이 500명이 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1000명인 교회는 2000명 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교회가 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못하면 다 이벤트입니다. 내 인생에서 뭘 가지면 하겠다고 하는 것은 다이벤트입니다. 삶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디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타주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로또와 한탕과 대박을 바라는 것은 내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이타주의의 삶을 살아내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수단으로 사람을 보려고 합니다. 교회를 팔아먹는 사람들은 한 명당 100만 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교회 안의 관계도 이미 수단의 관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늘 기적을 바라고 살고 늘 지름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나의 모습인데 이렇게 살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타주의의 삶을 살아가는 원리가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의 원리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기록되었으되(4절), 기록되었으되(7절), 기록되었으되(10절)’ 

기록은 구약의 말씀인데 이 구약의 말씀을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는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Tell me the truth myself. 자기 스스로에게 진리를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명한 책의 제목입니다. 기독교 대학의 교수이고 목사이고 상담가이신 분이 우울증에 걸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는데 말씀을 자꾸 자기에게 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계속 들려주니까 우울증이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진리를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하고 말씀을 말하십니다. 예전에 나왔던 휴대폰 광고가 있었는데 사람을 터치하면 다른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터치하라는 내용의 광고였습니다. 터치할 때 우리는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터치했더니 성질이 나옵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삶 가운데는 반드시 자극이 있습니다. 자극에 따라서 반드시 반응이 나타납니다.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늘 하는 얘기가 ‘당신이 그것을 말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자극을 줬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자극이 없을 때는 다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자극이 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극입니다. 문제는 또 반응입니다. 자극에 대해 믿음의 반응이 나와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말씀입니다. 누군가 찌를 때 마다 말씀이 나와야 되는데 찌를 대 마다 성질이 나오기 시작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자극은 반드시 있습니다. 얼굴만 봐도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냥 싫습니다. 그런데 자극은 순간 순간 오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자극이 올 때 마다 튀어나오는 것이 ‘기록되었으되’ 여야 합니다. 

믿음의 세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한테 속담이나 격언을 많이 가르치라고 합니다. 속담이나 격언은 인류가 지내오면서 엑기스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그 사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속담을 묵상하면 잘 모르지만 하늘이 도울 것이니까 최선을 다하고 살아야겠다고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속담도 격언도 그런 힘이 있는 것인데 말씀은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말씀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혼한 사람도 다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혼하고 상처밖에 안 남았습니다. 맨날 자기가 왜 억울한지만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말씀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성질만 나오고 한만 나오고 남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맨날 얘기하면 그 사람은 남편과 얼굴 비슷한 사람만 만나도 화가 납니다. 아무 말도 안했는데 얼굴만 봐도 싫은 것입니다.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 어떤 분이 있었는데 옛날 자기 원수하고 제가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생겼겠네요? 하고 말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생기려고 노력한 것도 아닌데…… 사람이 참 힘든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장소에 앉아있는 이유가 되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또 내 가정에 내 인생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내 교회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 왜 살아야 되는지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말씀이 길이고 말씀이 빛이고 말씀이 진리인데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은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인생의 말씀은 시편 46편 10절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의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입니다. 저희 공동체 하나교회에 주신 말씀은 ‘파지 않은 우물, 쌓지 않은 성을 차지할 것이다.’입니다. 올해 우리 공동체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입니다. 이 말씀을 받은 뒤로 정말 온갖 사건들이 품위 없게 만들고 질서가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어느 해에는 야고보서 1장 말씀인데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는 말씀을 받았는데 정말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 동안 온갖 모양의 사건과 온갖 인물들의 시험을 주시는데 온전히 기쁘게 여기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만남에도 다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만남을 왜 허락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목사가 아닌 사람한테 주례 부탁을 하는 것이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정 없으면 스님한테라도 주례를 서 달라고 해야 합니다. 결혼이라는 관계를 시작하는데 영적인 가치를 빼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교수님이 주례사에서 쉰 소리를 하시는데 은혜도 안 되고 그런 결혼식을 하는 것이 이해가 안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얘기하면 가치 있게 살아야 합니다. 

아파트 광고도 이제는 가치를 추구하는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는 다 물질의 세계에 대해 얘기합니다. 교회가 오히려 가치가 없습니다. 말씀이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에 보면 말씀이 성령의 검입니다. 구원의 투구, 평안의 복음의 신,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가 다 방어용인데 성령의 검 말씀만 공격용입니다. 말씀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말로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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