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3

두 번째 4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4절,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의 입으로’ 7절,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10절,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 중심입니다. 나의 주님, 주재권, 결국에는 영적인 전쟁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전쟁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한다면 그 말씀을 가지고 이기실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돌려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기려고 편법을 쓰거나 이기려고 하나님의 법이 아닌 것을 우리가 하고 있을 필요가 없고 내가 그 모든 것을 해야 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완벽주의가 죄입니다. 1부터 100까지 내가 다 하는 것은 죄입니다. 여호와 이레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겪고 나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축복 중에 하나가 대적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대적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원수를 이겼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는 것이 여호와 이레의 신앙입니다. 자기 아들을 바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제는 아브라함에게 대적의 문이 열렸습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종교는 100% 자기열심입니다. 종교는 자기의 정성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정성의 종교가 아닙니다. 엄밀히 따지면 정성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정한수 떠 놓고 정성껏 기도하고, 탑을 돌아도 정성껏, 3천배를 해도 정성껏 드리는 것인데 정성의 끝이 자기의 아들을 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몰렉의 제사입니다. 가나안 종교의 풍요의 신이든 어떤 신이든 마지막은 자기의 아들을 번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 조금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다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정성의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신앙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신앙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예수를 믿으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3년 동안 안 믿은 사람이 있습니다. 믿는다는 고백이 입에서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순간에 완벽하게 해야 되는데 자기는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완벽주의입니다. 그리고 완벽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해야 합니다. 완벽주의가 왜 신앙 없음이냐 하면 하나님이 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고아입니다. 다른 사람이 일하는 것을 못 보는 일중독자입니다. 다 못 미더워서 자기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로로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절대로 과로사가 없습니다. 불교는 원래 과로사가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정성종교입니다. 그리고 샤머니즘도 자기가 희생을 해야 하는 종교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에 예수님이 사단에게 물러가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귀신도 마귀도 인격적입니다. 무당은 그냥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귀신도 말을 하고 붙습니다. 들어오라고 얘기를 할 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의 창조성이 있고 말의 힘이 있습니다. 영상에 한계가 있는 이유는 보이는 것을 넘어 말은 그 이상의 창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로 하는 설교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물러가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방법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나님 앞에 선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이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방법이고 예수님도 그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사역의 중심으로 가시기 위한 영적전쟁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십자가로 가야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전쟁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떠밀렸습니다. 리더십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떠밀린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을 만하니까 떠미는 것입니다. 사자가 자기 새끼를 바위에서 밀어 떨어뜨려서 스스로 올라오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은 적어도 밀림의 왕으로 살려면 그 정도는 겪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관계도 견고해지고 단단해지려면 서로 미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좋은 사람은 좋은 관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 자식관계와 똑같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집은 이상한 집안입니다. 피터지게 싸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저게 웬수인지 자식인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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