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1

트랙백 주소 : http://hanakmc.net/gnu/bbs/tb.php/grace/985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분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라고 했을 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복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로 표현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습니다.

율법이 원래는 거룩한 것, 선한 것인데 율법을 듣고 적용하는 사람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사람의 욕망이 드러나서 비교하고 경쟁하고 그러다보니까 사망의 길이 된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한 것인데 율법을 쓰고 있는 내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습니다. 내가 죽고 나니까 더 이상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왕 노릇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왕 노릇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제는 내 안에 은혜의 남편으로서의 주님과 죽고 부활한 ‘나’가 은혜의 남편을 섬기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율법이 다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이해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은혜를 통해서 율법을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팔복을 통해서 율법을 다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율법으로 바로 가버리면 율법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받고 있는 나의 문제 때문에 계속 그것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 죽이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너무 많아도 씨가 죽고 너무 빛 가운데 씨가 드러나 있어도 죽습니다. 물과 빛은 생명의 근원인데 물이 넘치니까 마실만한 물, 깨끗한 물이 없어서 죽고 빛이 생명의 근원인데 너무 드러내니까 말라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은혜로, 반드시 복을 통해서 봐야지만 율법이 율법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옛날 율법은 이렇지만 지금의 율법은 이렇다 라고 하신 말의 의미는 복을 통해서 받은 율법은 그 율법의 정신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은혜로 율법을 해석하게 되면 율법이 죽이는 율법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율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 틀과 기준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틀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교수님이 펫북에 글을 쓰셨는데 복음을 따라서 사는데 복음주의자가 아니고 자유를 쫓아가는데 자유주의자가 아니고 원칙, 가장 근본을 쫓아서 가는데 보수주의자가 아닌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율법이 율법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자꾸 율법을 들이대기 시작하니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에 율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율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로 얘기하면 아브라함이 먼저 있었던 것이고 모세가 나중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순서의 차이인 것 같은데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의 신분이 분명하면, 절대 자존감이 있으면 이제는 그 법을 가지고 남을 죽이지도 않고 자기 자신도 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법을 쓰는 것이고 또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더 온전하고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는 도구로 법을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끝에서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고 하신 온전이 무엇이냐 하면 법을 다시 해석한 것이고 이 해석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자유롭다고 해서 막무가내 방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신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 됨,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단일과 획일은 다른 것입니다. 획일은 하나로 흡수해 버리는 것이고 단일을 이루는 것은 어떤 방향이든 어떤 목적이든 그런 것 자체가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그것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듯이,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듯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입니다. 생명관계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 중에 하나입니다.

여행관련 프로그램을 시청했는데 볼리비아에 가면 밀림에 working하는 야자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다른 나무 때문에 햇빛이 가려지면 3~4M까지 옮겨간다고 합니다. 사진작가가 세계여행을 하는 프로인데 그 작가가 하는 말이 대단한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내를 찾듯이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듯이 내가 근본을 찾아서 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시편말씀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의 존재가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가 자리를 옮기듯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가를 찾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밀감이라고 하는 생명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생명관계가 기도입니다. ‘구하라’고 하는 성경의 표현은 다 기도에 관련되어 있는 것인데 기도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하나님과 우리가 단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니라.’

말씀과 기도는 사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다 눈을 감아야 되고 손을 모아서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기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눈을 안 감습니다. 눈 뜨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눈을 감는 것이 약간은 동양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기도의 종류 중에 눈 뜨고 선포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기도를 늘 정형화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미국에서 한국기도를 배운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기도입니다. ‘주여, 주여, 주여’를 미국사람들이 한국말로 하는 것입니다. 순복음이 모든 부흥의 아이콘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부흥의 비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삼창’을 하는 기도가 한국식 기도라고 이야기를 하고 배웁니다. 저는 꼭 그런 기도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떼제식 침묵의 기도를 해보기도 했는데 떼제식으로 조용히 기도를 하니까 약간 밥 먹고 김치 안 먹은 느낌이 있습니다. ‘주여 삼창’을 꼭 외치고 기도를 해야 기도를 했다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저도 한국 사람인가봅니다.

몇 십 년 동안 침묵기도만 하시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그 분을 초청해서 목회자들과 함께 기도모임을 하기도 했는데 습관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의 친밀한 관계의 소통입니다. 그것이 말씀과 기도가 같아지는 것입니다. 미국 순복음 중에 아주 극단의 순복음들은 방언이 구원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순복음은 미국이 원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를 골방기도라고 합니다. 골방기도는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처럼 문을 닫고 하는 기도입니다. 세상과 다 단절을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수도사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기도 중에 하나가 골방기도입니다. 골방기도의 내용이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입니다. 나의 나됨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찾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나, 둘 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기도의 종류들이 나옵니다. 기도에는 긴급한 것을 구하는 간구와 대신 하는 도고가 있고 공식적인 기도와 늘 감사하는 감사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들을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cry out 울부짖으며 하는 것입니다. 선포기도라고도 하는데 세상을 향해서나 영적인 전쟁을 하거나 선포하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 앞에서 하는 기도는 W.W.J.D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입니다. 이것은 일상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수도사들은 숨을 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숨 쉼 기도가 있는데 날숨부터 시작합니다. 숨을 내 쉬면서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수도사들이 했던 기도입니다. 숨 쉬는 기도가 골방기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1500년 동안 가지고 있던 신앙의 행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너무 많이 까먹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런 기도의 방법들입니다. 미로기도라는 것이 있는데 충북 제천에 가면 카돌릭 성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 보면 미로로 된 곳을 30분 정도 걸으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길을 만들어서 걸으면서 기도합니다. 대부분이 이곳에서 숨 쉼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의 기도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삶으로 그냥 살아내는 것입니다. 눈 뜨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면서도 또 누구를 만나면서도 어떤 일을 하면서도 늘 기도하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골방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친밀감으로 가는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하는 기도는 드러나는 것이고 성령 앞에서 하는 기도는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종류가 교단별 특징과 비슷합니다. 골방기도는 장로교 교인들이 잘합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하는 소리를 지르며 하는 기도는 순복음 교단에서 잘 합니다. ‘주여 삼창’기도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계속 세상을 향해서 선포하고 떠들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 앞에서 하는 기도는 기장이나 운동권교단에서 ‘기도는 왜 해? 그냥 살면 돼지.’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이 기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기도가 다 있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처럼 이 세 가지의 기도가 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잘 맞는 기도가 또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 해보고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이 세 가지의 기도가 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에만 치중하면 다른 사람이 배겨나지를 못합니다. 주여 삼창만 하면 화내는 사람이 있고 침묵기도만 하면 답답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기도 안 하면 기도 안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도 편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