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요한복음 O.T – 첫째날

요한복음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6 23:00
조회
8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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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

사람들은 종교적이지 않은데 영적입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현실의 표현이 종교여야 합니다. 종교와 영적인 것이 같이 가야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적이면서도 종교적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도 종교적인 것입니다. 원시의 샤머니즘을 현대의 샤머니즘으로 해석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맑스가 봤던 것은 철저하게 경제 개념 속에서의 유물론적인 사고에 의한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지 사실은 지금도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가치 또는 관념적인 비유적인 상징적인 의미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층적 종교, 심층적 종교를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표층적 종교라는 것은 시대와 공간 안에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시대적이고 한시적입니다. 그리고 공간적이고 역사적입니다. 그런데 심층적 종교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층적 종교를 안 보고 표층적 종교만 보면 시대적 한계, 공간적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심층적 종교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선택하려고 하는 것인데 자기의 내면에 있는 가장 영적인 가치를 보고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이 시대나 이 공간 속에서,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표층적 종교가 결혼이라면 심층적 종교는 사랑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결혼 보다 사랑이 더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모든 관계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제 아내가 어제 말하기를 자기가 옥택연도 좋아하고 성시경도 좋아하는 걸 보면 대체로 노래도 잘 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도 잘 하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남편은 그런 사람을 고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노래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는 사람을 왜 선택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처가의 가족은 다 성악가들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도 노래를 굉장히 잘합니다. 그런데 연애시절에 제가 전화기에 대고 한 시간씩 노래를 불러줬는데도 그 때는 그렇게 좋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노래 부르면 그만 부르라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지무지 크고 넓은 것이지만 결혼이라는 한 제도 안으로 들어갈 때 사랑 안에서 결혼으로 가야지 결혼하고 나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영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종교로 표현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사실 죽을 맛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내가 왜 이 사람을 선택했을까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에는 자기 결단도 있지만 콩깍지가 씌워지는 또 다른 신비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시스템 안에서 부조리함이나 그런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면 심층적인 종교마저도 원래 가지고 있던 원형적인 그것 자체가 훼손됩니다. 결혼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헤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는 결혼이라는 것은 불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옛날에는 중매를 통해 결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면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우리 어르신들은 그렇게 살았던 부분도 있습니다. 결혼생활을 통해서 사랑하게 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정상적인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같이 있고 싶으니까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것이 하나의 제도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결혼을 해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폭력입니다.

표층적 종교라는 것은 늘 한계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데 심층적 종교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은 다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층적 종교,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의 개념들은 다 사랑의 표현일 뿐이지 그 자체가 결혼을 위한 어떤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사랑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사랑만 하면 되지 왜 결혼을 하느냐 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해야지만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고 생명이 나옵니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고도 생명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한 책임은 서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책임한 것 속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하다가 결혼은 안 했는데 애를 가져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고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심층적 종교라고 하는 것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질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 속에서의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시대와 공간 안에서 표현하는 것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시대와 공간 안에서 표현되지 않는 것은 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마음을 그림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러내 주는데 드러내 주는 속에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아 그거구나.’ 라고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이 그 안에서 불일 듯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책 한 권을 읽고도 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림 하나 보고도 인생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더 그런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표층적 종교라는 것이 심층적 종교를 무시한 채 결혼생활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사랑이 없는 결혼은 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늘 물어야 합니다. 이게 진짜 사랑인지.

박재화 된, 교리화 된 예수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이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살아있는 예수, 진짜 예수, 내 본질인 예수를 계속 말해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시대와 공간 안에서 표현해 주는 언어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표현 언어가 불교와 더 맞는다면 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목사님들은 이 얘기 들으면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언어를 그렇게 표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장 괜찮은 아내가 우리 집사람입니다. 가장 멋있는 여자가 우리 집사람입니다. 나한테 딱 맞는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못나고 이상하더라도 최고라고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 믿는 사람과 ‘너도 최고니? 나도 최고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대에 종교생활을 하겠다고 자기를 죽이고 온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목사이든지 좀 이상하든지입니다.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20대에 신학대에 갔을 때 그 안에서도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안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저를 싫어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신앙생활 열심히 안했을 것 같습니다. 집사나 장로였다면 별로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들은 목사가 아니라도 교회에 다니시는 걸 보면 정말 믿음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사랑의 실재

사람들은 성경공부라고 하면 다 information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이고 이렇게 공부합니다. 사실은 말씀공부는 formation, 형성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고나면 뭔가 자기의 가치관이 만들어지고 세워져야 되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다 지식공부를 한 것입니다. ‘나 하나 알았다.’ 이런 것입니다. 그렇데 그렇게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똑같은 말씀을 40번 50번 들어도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 대부분이 설교를 어려워하시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꾸 information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죽을 맛입니다. information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계속 공부하고 공부해야 되는데 그래도 못 쫓아갑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formation이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아 나 저 말씀 들었어.’ 가 아니라 왜 지금 이 말씀을 나한테 하시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왜 공부해야 되고 그 말씀을 듣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 두 가지가 정립이 되고 나면 요한복음 공부로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가 깨달아지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가 보이는 역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순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배우려면 10년을 또는 20년을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1초 만에 끝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운로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100페이지의 문서 작업을 하려면 일주일이 걸릴 수 있는데 다운로드를 받으면 1초 만에 100페이지가 내 것이 되는 게 가능합니다. 물론 크로노스라고 하는 일상적이고 규칙적이고 순서적인 시간도 있지만 카이로스라고 하는 하나님의 갑작스럽게 오는 우리들의 시간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믿습니다. 다운로드 받는 것을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안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입니다. 사람들은 다 99%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의 영감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99%입니다. 영감은 진짜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99%가 되어야 1%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운로드를 받으려면 윈도우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기본 시스템, 체계가 되어야지 그 안에서 다운로드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윈도우 체계만 만들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10장 100장 자기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성경에 보면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된 그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실재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실재를 듣지 못하는 것은 계속 지식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information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저 사람은 그르다고 계속 판단하면 누군가를 정죄합니다. 그리고 정죄하면 교만해지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말씀, 생명, 그 말씀을 들으면 생명이 나오는 것인데 오히려 그 생명의 말씀 때문에 생명이 죽습니다.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데 선악과가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이 기준을 세워줬지만 그 기준의 뜻이 생명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옳다고 정죄하기 시작하고 교만해 져서 패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실재로 사람들이 계속 선악의 문제로 바라보니까 생명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의 재판에서 선악의 문제를 보니까 내가 옳아야 되기 때문에 아이를 반으로 갈라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를 반으로 가르는 그 과정이 생명에 관심이 있는 엄마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질 수 있는 힘이 생명에서 옵니다. 생명을 묵상하지 않으면 절대로 옳고 그름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말씀을 들었는데 말씀이 생명인데 오히려 그 말씀이 선악의 지식으로 계속 가다 보니까 죽는 것입니다.

말씀의 본질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실재로 보여지고 있는 말씀의 본체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본성이 성령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을 관계해 주고 사람과 사람도 관계해 주고 사람과 물질을 관계해 줄 수 있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말씀의 본성이신 성령님이라는 뜻은 그 실재가 성령님을 통해서 사랑이라고 하는 속성, 섬김이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사랑의 관계와 사랑의 섬김이라고 하는 실재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은 사람이 사랑하게 되고 관계하게 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먼저 성품이 바뀝니다. 또 한 가지는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열매입니다.

요한복음을 듣고 나면 우리의 성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가 30년 40년 목회 했는데 사람 성질은 안 바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안 가르쳐줘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 지식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면 말씀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고, 사랑의 관계이고, 사랑의 섬김이기 때문에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20대 때 만나셨다면 아마도 이 자리에 같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질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모릅니다. 늘 내 편과 적을 가르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적과의 동침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적과의 동침이 편해진 것입니다.

20대 때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빈 것이고 40대 때 데모하면 머리가 빈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20대 때는 감정으로 움직이고 40대 때는 냉철하게 이성으로 생각하고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슴이 없거나 머리가 비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품이라는 것 자체가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섬김을 통해서 나오는 생명을 낳을 수 있는 힘입니다. 가정공동체 교회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생명을 낳기 위해서 서로가 연대하는 것입니다. 운동권적으로 얘기하면 연합하고 연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독립적인 사람이 상호의존 할 수 있습니다.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은 늘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붙어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연합한다는 말은 가장 독립이 된 상태라는 말인데 그것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공동체는 아무나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개인주의를 굉장히 나쁘게 얘기하는데 사실 개인주의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독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없애고 전체주의로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개인주의가 있어야 합니다. 다 개별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서로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존중해 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자라나면 이제는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못 가고 우리는 자기 힘으로 모든 사람을 끌고 가려고 합니다. 자기 권위주의를 가지고 뭔가 끄집어내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숙한 공동체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한테 욕을 먹는 이유가 성숙한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공동체가 말씀을 위와 같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솔직해 지고 정직해 집니다.
그래서 자기의 찌질함도 말할 수 있습니다. 김어준씨가 연애를 하면서 자기의 찌질함을 적나라하게 봤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찌질한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할 수 있는 힘이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받았던 경험이 있어야지만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사랑은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죽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서 완성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기가 힘드니까 일단 받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한한 사랑을 먼저 받고 시작해야 되는데 사실은 그것이 가정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가정에서 잘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정공동체에서 사랑 받지 못한 경우에는 교회공동체에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가정에서 늘 소외되고 외로웠던 경험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 가서 존재자체로 사랑받은 느낌이 있습니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웃어주고 잃어버린 신발도 사 주는 교회가 너무 따뜻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튼 사랑은 받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솔직하고 정직한 것입니다. 안 그러면 자백이 되고 스스로 거짓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는 척하고 살거나 IBM(이미 버린 몸) 하고 삽니다. 척 하고 살면 안 됩니다. 특별히 자기의 본질에 대해서 뭔가 있는 척하고 살면 안 됩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척입니다. ‘나 힘들어요.’ 라고 표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즘 대화법에 I massage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폭로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상처가 되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를 가장 부드럽게 합니다.
또는 여유 있게 하고 숨을 쉬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부드러워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숨 쉬게도 해 주고 여유 있게 받아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받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안 그러면 강팍해지고 절대로 손해 볼 수 없고 책임만 가지고 삽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님이 하신 말처럼 현대인은 100KM로 달리는 자동차의 운전자와 같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꽃도 보고 사람도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이고 사랑은 우리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없어지면 강팍해지고 스스로 계속해서 책임만 묻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기 있게 합니다.
용기의 반대는 회피입니다. 정직하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 용기입니다. 사랑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직면하는 것입니다. 직면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 불 뱀에 물렸습니다. 그런데 불 뱀에 물렸을 때 하나님이 놋 뱀을 만드셔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안 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뱀에 물린 사람은 다시는 뱀이 보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통과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상처를 뚫고 지나가지 않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통과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늘 회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도망가고 싶은 것입니다. 회피하면 늘 숙제를 남겨두고 노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재미있게 놀아도 늘 한 곁에 숙제가 있는 것입니다. 숙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단, 거짓 영은 우리의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딱 고 문제만 지적합니다. ‘너 그거 할 수 있니?’,‘너 그거 하고 있는 거니?’,‘그거 아직도 문제잖아.’ 라고 우리한테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면해야 합니다. 직면하는 순간에 그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순간에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인정할 때 마다 그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정하기 싫으니까 회피하고 회피하다 보니까 정말 구원의 경험을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구원받는 자이냐 하면 인생의 바닥 에서 용기 있게 ‘그래, 그래도 하나님이 날 살게끔 하실 거야.’ 라고 신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자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속성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성품이 변하고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에 정직해지고 부드러워지고 용기 있게 되니까 성품이 변하는 것이고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