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원복 6

원복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39
조회
1052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감정으로 살면 헤어질 수밖에 없고 감정 따라 가면 새로운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의지와 지식으로 살아내겠다고 결정해야 감정도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똑같이 우리가 어떤 것을 받아들일 때 지식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1초에도 여덟 번이나 바뀌는 것입니다. 좋았다 싫었다 요동을 칩니다. 제가 아침형 인간이 아니고 저녁형 인간이라 아침에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후 네 시가 저에게는 기분이 최고인 시간입니다. 그래서 고3 때 네 시부터 다섯 시 까지 딱 한 시간 공부를 했습니다. 아침에 회의를 하면 제가 까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또 밥만 먹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그래서 저희 교인들은 저한테 상담할 때 식사를 하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게다가 상담을 하면 정답부터 바로 들이대는 성격이라 어떤 분은 울고 섭섭하다고 하고 갑니다. 한동안 그 말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답을 얘기해 주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왜 공격을 할까? 납득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여자들은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남자인 저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자들은 말을 하면서 감정을 해소하고 결론도 내린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나는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야.’ 라고 공감이 안 되는 이유를 말하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오해가 덜했습니다. 한 동안은 공감이 안 되도 주눅이 들어서 공감이 되는 척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니까 관계가 편해졌습니다. 혼의 문제를 내가 어떻게 보고 컨트롤할 것인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과 혼의 존재라는 것은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가 육의 존재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민들레  가족상담센타>에서 강의를 하는데 첫 강의 내용이 사람이 짐승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프면 기분 나쁘고 배가 부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쑥불쑥 경쟁하고 비교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고상해.’ 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면이라고 합니다. 가면을 쓰고 있으면 대화를 하는데 자꾸 막힙니다. 서로 말을 놓으면 갑자기 관계가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가면을 벗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욕을 하면 가족이라는 느낌이 확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육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복에 대한 네 가지의 관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Taken 취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만찬을 합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주님의 살이고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식의 동작이 네 가지였습니다. 떡을 취하고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눠서 먹이셨습니다. Taken, Blessed, Broken, sharing입니다.
이 네 가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복입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사실 혼이라고 하는 존재는 영과 육 사이에서 반응하고 표현하는 것이지 주는 아닙니다. 영의 컨트롤을 받을 것이냐 육의 컨트롤을 받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도 육도 사실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너무 영적으로만 얘기하면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붕붕 날아다니고 구름 타고 다닐 수 없습니다. 최고의 도인은 오늘 내가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면서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평범한 사람입니다. 무협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일본에 아주 유명한 무사가 있는데 그 무인이 정말 강한 사람인데 일본에 최고의 강자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났습니다. 만나서 다 이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만난 한 사람은 강해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깨달았는데 진짜 강함은 가장 평범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강함이 오히려 해가 되고 강함으로 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가장 육적입니다. 가장 육적인 사람이 가장 영적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계속 영적인 것만 추구하거나 짐승처럼 육적인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영의 세계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잡혀있다고 생각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Taken은 내가 잡혀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누군가에게 매인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한테는 누군가가 하나님이라고 바로 설명하면 끝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시는 분들한테는 다르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영의 존재가 있습니다. 불교든 무교든 어떤 것이든 반드시 영의 존재가 있다고 믿습니다. 인도에 여행을 다녀온 제 후배가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배였는데도 하나님은 너무 작다고 했습니다. 인도에 갔더니 온갖 신들이 있는데 그 신들 중에서 자기가 받은 신은 아름다운 신이라고 했습니다. 요가를 할 때 몸의 형태를 잡는 자세들이 사실은 영적인 접촉점을 만들어내는 전봇대 같은 것입니다. 요가의 끝이 ‘아름다운 영을 받으세요.’입니다. 심리학이든 요가든 결국 어떤 관점의 영적인 실체, 영적인 존재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를 잘 읽어보면 아들러가 사람을 초인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의 끝이 사람이 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수령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한테 수령 자리를 물려주니까 진정한 수령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할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사람이 그렇게 초월적인 존재로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원성, 정치성, 창조성 이런 것이 사실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내가 어떤 것에 매인바 되었다는 것은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창조 전에 내가 있기도 전에 엄마 뱃속에 생기기도 전에 이미 축복을 받은 존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Taken입니다.

사람이 원죄에 빠져있으면 좋지 않은 상황이나 사건을 만났을 때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 축구를 한 적이 있는데 상대 팀은 정말 선수급이었습니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씨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잘 못한 게 많은 사람은 벼락 맞을까 봐 밖에도 못 나갈 그런 날씨에 축구를 했는데 결국 10:1로 졌습니다. 나중에 목욕탕에 같이 가서 보니까 11명 중에 대여섯 명은 몸에 문신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하고 축구를 하는데 한 사람이 뻥 찬 공에 제가 얼굴을 맞았습니다. 정말 하늘이 노랗고 별이 반짝이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 공을 맞았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상의 죄인지 내 죄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계속 묵상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오는 순간 조상의 죄인지 나의 죄인지를 따지고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공에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있기도 전에 이미 복 가운데 있게 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육강식, 인과응보, 권선징악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현대에 와서는 권선징악이 이미 깨졌습니다. ‘놀부보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래 ‘흥부 보쌈’을 먹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놀부 보쌈’을 먹는 이유는 이제는 흥부가 착하고 놀부가 악한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것이 양이 많은지, 어떤 것이 맛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진짜 나쁜 사람, 진짜 악한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동화책을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만들었을까? 왜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만들었을까?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세 살 이하의 아이들은 도덕적 관점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의 관점을 분명하게 심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청소년 시기에 갈 때 까지 가게 된다고 합니다. 갈 때 까지 가고 나서야 ‘여기 까지는 되고 여기 까지는 안 되는 것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 살 이전에 그 기준을 배우면 원초적 두려움을 알고 관계 안에서 더 이상 나가면 안 된다는 선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화책은 애매모호하게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인과응보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에 맞은 이유는 조상의 죄든 내 죄든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 자체가 어디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사를 지내셨는데 제사를 왜 지내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믿음의 체계 안에서 그렇게 해 왔던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믿음의 체계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인과응보’ 다 라는 믿음의 체계에서 ‘나는 복 받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어.’ 라고 믿음의 체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Taken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드린바 되고 취한 바 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복 받은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실재가 다를 것입니다. 말이 다를 수도 있고 행동이 다를 수도 있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다를 수 있고 사건을 대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공에 맞았다고 누구의 죄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 맞았구나. 무지 아프다.’ 거기서 끝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실재적인 복인 것입니다. 죄를 생각하게 되면 500만 원짜리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실에서 매일 저주를 풀려고 하는 삶을 살아냅니다.

Blessed라고 하는 것은 내가 실재로 그것을 경험하고 살다보니까 실재가 있는 것이고 그러고 나니까 감사하고 다른 사람도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죄에 걸려있으면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매일 그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행하면서 저주 가운데 삽니다. 그것이 실재입니다. 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매일 육이라고 하는 내 현실은 계속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축복 받고 행복하다고 이미 창세 전 부터 Taken 취한바 된 사람이라고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감사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줄 수 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60세가 다 된 선교사 한 분을 만났는데 케냐에서 20년 동안 영어교사로 계셨던 분입니다. 제 아내가 영어교육과를 다녀서 그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다시 중국에 가서 선교를 하려고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을 저희 집에 초대해서 같이 식사를 하는데 기도할 때 계속해서 축복한다, 축복한다, 축복한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저는 영어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도 별로 은혜를 몰랐는데 그 분이 하시 기도는 정말 그 어떤 기도 보다 은혜가 됐습니다. 다른 말은 잘 안 들려도 계속해서 축복한다는 그 말이 들렸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매일 자기 것에 잡혀 있는 사람은 그렇게 남을 축복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