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원복 7

원복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7 02:40
조회
1172
축구 하다가 공에 맞고 나서 다음에 안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라는 걸 고민하고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저 보다 더 세게 맞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안 보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내가 매일 감사하고 매일 축복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인생의 결론이 수고와 슬픔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행복하게 살아도 인생 수고와 슬픔 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수고와 슬픔 밖에 없다고 교인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살면 살수록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깨지고 찢어지느라 슬픈 것입니다. 그것이 상처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자기 상처 얘기하기 시작하면 아마도 밤을 새야할 것입니다.

제가 고슴도치사랑이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서로의 상처 때문에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떨어질 수도 없고 붙을 수도 없는 가시의 길이가 있습니다. 고슴도치의 사랑을 해야 하는데 어미가 아이를 안아줄 때는 얼마나 아플까요? 아파도 참아내면서 안아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상처는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고 어느 순간 툭툭 튀어나옵니다. 자기도 모르는 순간 어떤 사건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해되지 않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 상처로 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상처는 개성입니다. 개성은 각각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람만의 성질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다릅니다. 열 명이 모이면 열 명이 백 명이 모이면 백 명이 다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40년 가까이 병원 원목을 하시고 은퇴하시는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상담을 하시고 결론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시게 되었느냐고 여쭈었더니 그 분이 배운 모든 상담이론을 가지고 병원에서 사람들을 만나 상담을 했는데 어떤 이론도 항상 통하지 않더라고 하셨습니다. 비슷한 유형도 있고 조금 다른 유형도 있지만 결론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의 다큐문서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성이 있습니다. 이 개성을 개 같은 성질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개성을 축복 아래서 해석해야 상처가 다시 보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취하셔서 축복하시고 떼셨는데 떡의 입장에서는 무지무지 아픈 것입니다. 그런데 떼어지는 순간에 한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떡이 떼어지는 순간에 나눠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실은 나눠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상처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축복 아래 해석하니까  그 상처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운동권이었고 감옥에도 다녀왔습니다. 열아홉 살 때부터 스물아홉 살 때 까지 딱 십년 운동을 했는데 하나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십년의 시간이 너무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지우고 싶은 십 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선배를 만났는데 그 분이 80년대에 뭔가 같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이랬든 저랬든 민족을 생각하는 민족의 세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희 교회가 작은 교회인데 저는 지금도 나라를 걱정하고 삽니다. 저한테 그 삶이 상처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시기였는데 그것 자체가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주신 것이라는 축복아래 그것을 해석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과거가 지워야할 과거가 아니라 이해가 되고 빛나는 과거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의 위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똑같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일 것입니다. 부모가 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 분에게 위로가 되기 힘듭니다. 똑같은 입장의 사람이나 더한 사람이 위로가 됩니다. 내가 받은 상처 자체가 똑같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해석하지 못하면 계속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가진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사업을 하다가 네 번을 망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에 한 번 망한 사람이 죽을 것 같다고 난리를 치기에 네 번 망한 친구를 소개해줬습니다. 존재자체가 위로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번 망한 사람은 네 번의 망함이 저주 아래 있으면 내가 왜 망했을까? 하면서 고민하고 있을 텐데 축복아래 해석하면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상처가 사람을 만나는 통로가 됩니다.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위로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성경에 모세라는 사람이 살인을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모세는 구약의 인물이고 신약은 2천 년 뒤에 쓰여진 성경입니다. 신약에서는 모세가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을 떠났다고 해석합니다. 사실은 살인을 저지르고 살려고 도망친 것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모세의 인생을 축복아래 해석한 것입니다.

이혼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는데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혼이 믿음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만들어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남 탓만 하는 문제가 됩니다.

내가 찢어지는 아픔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떡 하나가 100번 찢어지면 100명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무지하게 찢어지면 찢어질수록 사람이 삽니다. 내가 어마어마하게 상처가 많다면 어마어마한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일부러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존재자체가 상처인 사람도 있습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순간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처를 내가 안 받겠다고 발버둥 쳐도 받을 수 있고 상처를 받겠다고 들이댄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에는 그냥 사는 것 자체가 다 상처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저주아래서 해석하지 않고 축복 아래 해석해야 합니다. 내가 A인데 보통은 A'가 싫습니다. A가 싫어하는 사람은 Z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Z는 괜찮습니다.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라고 얘기하는데 자기가 자기 모습을 보고 싫은 것입니다. 부모들이 보통 자기랑 닮은 아이를 미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A'가 싫은 사람은 A‘를 만나기 싫어서 피하면 이번에는 A''가 나타납니다. 줄줄이 나타납니다. A'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A''를 만나고 나서 알게 됩니다. 그런데 B' C' 줄줄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내가 다 사귀고 살아야 하는데 축복아래서 나를 정의해야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Taken, Blessed, Broken 다 내가 원해서 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다 주어진 것, 수동태입니다. 딱 한 가지 능동태가 있는데 그것이 Sharing, 나눠주는 것입니다. 원복의 기본이 나눠줄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원복을 받았으니까 ‘그래 난 괜찮아.’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을 나눠줄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만 능동태입니다.

사람들은 나눠주는 것도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나눠주는 것은 죽음으로 내가 없는 인생가운데서도 나를 나눠주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두 번 개척을 했습니다. 첫 번째 개척교회를 할 때 교인이 열 명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구마 줄기처럼 한 사람이 끌려오니까 줄줄이 끌려오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교인이 30명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나는 3년 동안 생고생을 했는데 갑자기 부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는 영원히 제 이름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있을 때 부흥하다가 떠나고 나서 없어지는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미국도 생겼다 없어지는 교회가 정말 많이 있는데 15년 된 그 교회가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아있습니다. 창립기념예배를 드릴 때는 항상 정영구 목사가 사람들과 함께 세운 교회라고 여전히 제 이름이 불리고 있습니다. 제가 없는데 저를 나눠주는 것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을 때만 나눠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아이를 통해서 여전히 내가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제일 중요한 것은 후임자이고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원복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죽었다 깨도 나눠줄 수 없을 것입니다. 원복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매일 열심히 벌고 열심히 투자하며 살아야 합니다. 원복을 받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원래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은 늪의 인생이고 덤의 인생입니다. 지금 망해도 덤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늪인 사람이 있습니다. 늪은 움직일 때 마다 더 빠져 들어갑니다. 지금 여기에서 죽어도 남은 인생입니다. 그래야 나눠줄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종교의 감사가 비교감사인데 내가 저 사람 보다 조금 나아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아픈데 나는 안 아프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은 병에 걸리면 감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상황감사입니다. 올 한 해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진짜는 절대감사하는 것입니다. 찔려도 무너져도 망해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아니하실찌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Broken 안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절대감사입니다.

절대감사는 원복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창세전에 복 중에 짓기도 전에 이미 복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믿고 시작하는 것이 절대감사입니다. 저는 그것이 신앙의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으로 얘기하면 새옹지마입니다. 화가 되는 상황이 돌아보면 복이 되고 복이 되었던 상황도 다시 화를 부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든 복이든 다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리는 남편이 있을 때 그 남편의 폭력을 감수하는 것은 절대감사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럴 때 아내는 남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남편을 보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해 나에게 주신 영적 지식 또는 영적인 답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남편이지만 가만히 끊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끊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재혼주례는 절대 해 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카돌릭에서는 낙태도 절대 해서는 안 되고 이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맺어준 사람을 사람이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가지고 호주인가 어디에서는 이혼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맺어주셨으니까 끊으시는 것도 하나님이 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혼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성경에서 이혼하지 말라고 한 것은 관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의미이지 이혼하지 말라는 또 다른 율법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기, 과정, 원인을 얘기하시는 분입니다. 이혼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버리면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농사를 지어서 추구하고 떨어뜨린 이삭을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현대에 이혼율이 증가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여자들이 경제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때리는 남편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빨리 신고해서 치료 받게 하고 기다려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고하면 바로 이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면들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매 맞는 여자들이 사는 집이 있습니다. 알면 남편이 쫓아오니까 비밀로 하고 모여서 삽니다. 그 곳 담당자가 하는 말이 때리는 남편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면 병원에 보내고 그 과정도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맞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감사가 모든 것에 다 감사하라는 이야기이지만 실제적으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2016.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