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요한복음 O.T 3

요한복음
작성자
yoo eunjoo
작성일
2016-03-16 23:05
조회
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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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실제라면 실제의 삶에 있어서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실제로 나타나야 되는 것이고 말씀의 본질이 사랑과 생명이라면 사랑과 생명의 속성들이 우리들의 실재 속에서 드러나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성품과 생명의 공동체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정말로 말씀을 듣고 행하고 적용하고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말씀을 들어도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원래는 말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 자연입니다. 그 자연의 법칙을 깬 것이 기적이라면 순리가 역리가 되고 역리가 순리가 되어버리니까 말씀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의 속성, 생명의 속성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를 보면 결국에는 마음의 문제인데 마음에 대한 인식 또는 마음에 대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해와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 세계관, 가치관, 보는 틀이 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봐야 되는가 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못 볼까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지식과 감정과 의지라고 하는 세 가지의 요소, 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자극을 주면 그것에 대한 반응을 감정으로 나타내서 결과가 옵니다. 개를 통한 무조건반사에 대한 실험을 했을 때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건이나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것들을 만나면 무조건반사적인 행동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싫은 사람도 있는데 심리학에서는 그것이 자기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합니다. 제 딸을 잘 살펴보면 저랑 비슷합니다. 제가 저를 볼 때는 그런 면들이 있는지 몰랐는데 딸을 보니까 돌아다니는 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사건과 상황과 사람이라고 하는 자극이 주어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으로 반응합니다. 감정에 반응을 하니까 감정이 자신의 마음을 굳어버리게 하고 굳어지니까 그 때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식이 됩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때는 좋고 어떤 때는 죽을 것 같이 요동치는 것인데 사건과 상황과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죽을 맛인 것입니다.

A가 너무 싫어서 도망을 갔더니 A’가 있습니다. 이 사람을 통과하지 않으면 더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통과하면 A 형태의 사람들은 다 통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정을 잡아야 되는데 어떻게 잡느냐 하면 진리지식으로 잡는 것입니다. 지식이 세워지면 그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이 의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가 생기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식을 할 때 비가 오나 눈이오나 서로 사랑하겠느냐고 묻는데 그 묻는 것은 의지입니다. 사랑은 의지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의지로 시작하는 개념이 진리지식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지식, 틀, 관이 바뀌지 않으면 계속 똑같습니다. 작심삼일, 삼일마다 작심하라고 할 정도로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리지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지식이 틀입니다. 노가다란 말은 가다가 없다 즉 틀이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지식을 내가 지식으로 어떻게 받을 것이냐 하면 또 다른 관점이 있는 것인데 진리지식은 사랑과 생명이라고 하는 속성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사랑의 속성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자신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힘이 사랑이고, 또 여유롭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 사랑이고, 또 직면할 수 있는, 자기의 상처를 볼 수 있는 힘이 사랑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근원과 연결되려는 속성이 있고, 성장하고 성숙해지려고 하는 것이 생명의 속성이고, 생명을 낳으려고 하는 생명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 지식은 사랑과 생명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여해 줄 수 있는 지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용하려 하거나 생명이 아닌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면 생명의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옳고 그름, 선악과가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선악이라고 하는 옳고 그름 속에는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지막에는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정말 살게 하는 지식인지 사랑하게 하는 지식인지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라고 하는 삶, 십자가로 다가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인데 십자가에서 말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일까? 사랑과 생명의 가치가 무엇일까? 그것은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생명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꾸로 수단과 사망은 내가 기필코 차지하고야 말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하고야 말리라고 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어떤 순간이든 내어줄 수 있는 어떤 상황에든 자기 것을 놓을 수 있는 지식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의 삶은 한 마디로 하면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은 가장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가치는 부자가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지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치는 완전히 거꾸로 입니다. 힘이 없음이 힘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힘이 없음이 진정한 사랑이고 생명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을 본다면 신약을 통해서는 어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광만 이야기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고 유대교입니다. 영광과 죽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부재라고 하는 것이 합해져야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우리한테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지식, 진리지식이 우리에게 와야 됩니다. 진리지식은 ‘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나를 original sin 원죄의 개념으로 보았는데 성경은 원죄가 아니라 original blessing 원복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존재로 보십니다. 그것이 원복입니다.

첫 번째는 존재론입니다.
원복이라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존재론적으로 보면 바닥에서부터 나의 존재, 뿌리를 보는 것입니다. 6학년 때 뿌리라고 하는 미국 드라마를 보았는데 쿤타킨테가 나옵니다. 주인공이 기자인데 자기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말 노예의 후손인가 궁금해서 뿌리를 찾아간 것입니다. 갔더니 가장 먼저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왔던 첫 번째 조상이 쿤타킨테였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쿤타킨테를 찾았더니 어떤 부족 국가의 추장의 아들이었습니다. 추장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왕족입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의 자기의 삶이 노예였다고 생각을 했는데 자기의 뿌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먹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인식의 전환이 생긴 것입니다. 옛날에는 먹어도 노예의 근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속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근성이 무엇이냐 하면 왕족의 근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존재들은 늘 1968년 10월 10일에 태어나서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갈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아셨느냐 하면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기도 전에 창세전에 태초에 하나님이 나를 아셨고 또 나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으로부터 온 존재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는 죽어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또 다른 인생이 있다고 또 다른 삶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이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고 하는 나는 육에서부터 육으로 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에서부터 와서 영으로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게 다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40, 50 자기 나이에 따라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영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무게라는 것 자체가, 존재 자체가 영에서 와서 영으로 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삶 자체가 우리에게 중요하긴 하지만 또한 그것 자체를 뛰어 넘은 존재로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힐링캠프에 나왔던 법륜스님이 자기 얘기를 하시면서 경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경주에 있는 절에 갔을 때 그 절의 대스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답니다. ‘너 어디에서 왔느냐?’ ‘저 학교에서 왔는대요?’ ‘학교 전에는 어디에서 왔느냐?’‘집에서 왔는대요?’‘집에 있기 전에 어디에 있었느냐?’ …..‘엄마 뱃속에 있었는대요?’ ‘엄마 뱃속에 있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모르는대요?’ ‘이제 어디로 갈 거냐?’‘학교로 갈 건대요?’‘학교에서는 어디로 갈거냐?’ ‘모르겠는대요?’ 라고 대화를 했는데 마지막에 스님이 어디에서 온지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놈이 왜 그렇게 바쁘냐고 얘기하셨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얘기합니다. 영에서 와서 영으로 갈 수 있는 존재가 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나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목적론에 대한 말씀입니다.
목적론은 내 삶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 하면 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둡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저만 빼고 다 교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수가 된 다음에는 뭘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꿈이 없습니다. 엄마들이, 우리의 윗세대들이 늘 모이면 평등을 얘기하는데 평등이 평수와 등수라고 합니다. 집이 없을 때는 집을 사는 것이 꿈이고 20평에 살고 있으면 30평에서 사는 것이 꿈이고 다 사람들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한테 영원에서 영원으로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원한 시간에 목적을 두고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카돌릭 신자인 최인호 작가가 예수님과 우리는 동시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시간 속에서 2천년이라는 시간은 1초 밖에 안 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초 전에 계셨던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살게 하셨는데 사람이 100살을 산다 할지라도 영원한 시간 속에서는 너무나 짧은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한테 뭘 원하시는 것인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을 한들 영원한 시간 속에서 티가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를 살아도 1초를 살아도 그것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 속에서 지나가는 시간으로 쓴다면 그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영원한 시간으로 쓰기 시작하면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는 하나님의 시간으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없어지셨다가 3년 사역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짧은 시간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33년의 시간 거기다가 공생애라는 3년의 시간 거기다가 십자가 위에서의 6시간, 너무나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시간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서 영원한 시간 가운데서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시간은 6시간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 있는 가치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크로노스라는 시간과 카이로스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1, 2, 3, 4 …. 순서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어느 찰나에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그 찰나에 들어오는 시간이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의 카이로스가 오면 그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이 영원한 시간으로 변화되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첫 운전을 할 때 몸을 바싹 당겨 앉아서 코앞만 보고 운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앞에 무엇인가 나타나면 핸들을 확 꺾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도 몇 번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100M앞을 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때까지와는 다르게 운전을 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잡혀버리면 보험을 들어야 하고 100년을 사는 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잘 모르게 됩니다. 성경공부 돈 되는 일 아닙니다. 그런데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살도록 우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치론입니다.
나에 대한 가치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가치를 다 소유에 둡니다. 소유냐? 존재냐? 나에게 능력이 있고 가지고 있는 재산도 있고 지위도 있고 그래서 자신은 굉장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은 지위나 권력에 가치를 둔다면 생명의 관계는 철저하게 존재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존재가치로 보십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천하보다 귀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가치만큼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짜리입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저 사람 참 능력 있는 사람이야.’ 라고 하는데 능력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능력은 없는데 사람 참 좋아.’ 라고 하는 성품가치입니다.

그런데 능력 보다 성품 보다 더 좋은 것이 존재가치입니다. 어떤 복지관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12시가 시작이었는데 늦게 도착해서 도착하자마자 아무 정보 없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끝나고 나서 총무님이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정신지체아들이어서 제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능력도 없고 성품가치도 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들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것은 존재가치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종하고 자녀의 차이가 있습니다. 주인이 일 그만하고 쉬라고 하면 종은 ‘나 잘렸나 보다.’ 라고 생각하는데 자녀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웬 떡이냐?’ 하고 쉰다는 것입니다. 제 딸이 세 살인가 네 살 때 침대에서 같이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벽에 일어나더니 저보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침대가 좁아서 못자겠다는 것입니다. 순간 내 집이고 내 침대인데 이 배짱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제 딸이 삼촌 집에서 살았다면 또는 입양된 아이라면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 당당함은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짜 아버지로 오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가치로 인정하고 대우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사람들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노예의 근성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40년 뒤에 길갈에서 노예의 수치가 굴러갔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늘 노예라는 자기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나온 사람으로 대우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이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람들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늘 자유인의 가치로 보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내가 가지고 있다 없다, 먹을 것이 있다 없다, 계속 소유와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가치를 평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은 위에서부터 오는 인식론입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사실은 존재론과 목적론과 가치론과 인식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식론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제일 자기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착각입니다. 조해리의 창에 보면 나라는 존재가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르는 나, 나는 모르는데 남이 알고 있는 나,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가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것은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의 창이 넓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공개의 창이라고 합니다.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르는 창은 비밀의 창입니다. 나는 모르는데 남이 알고 있는 나는 착각의 창이고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는 신비의 창입니다. 사람들이 공개의 창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 사람이 건강하다고 얘기하는 것인데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르는 비밀을 공개해야 합니다. 사랑의 속성이 나에게 들어오면 정직하고 솔직해집니다. 정직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내 상처를 직면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만이 그 비밀을 공개하게 합니다. 이 비밀이 사랑으로 공개가 안 되면 물고문 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고통이고 죽음인 것입니다. 착각은 나는 모르는데 남이 나를 아는 것이니까 컨설팅을 받으면 됩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것은 기도해야 합니다. 신비는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이 너무 무서우니까 밀을 까야 하는데 소리가 나면 미디안 사람들이 와서 빼앗아 갈까봐 포도주 틀에 밀을 까고 있습니다. 겁쟁이 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강한 용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드온의 착각입니다.

비밀은 공개하고 착각은 컨설팅을 받고 신비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결국에는 나라고 하는 이 존재가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를 만드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심리학이 끝이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관심이 사람의 무의식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합니다. 10%는 물 위에 떠 있는 인식의 세계이고 90%는 물 밑에 가라앉아 있는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함을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을 어떻게 끄집어내서 살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신비의 세계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경전이라는 것 자체가 상징과 신비와 역설을 가지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문자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곰이 마늘을 먹고서 사람이 됐습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마늘을 먹으면 곰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그 상징, 설화를 읽는 우리의 관점 똑같이 경전을 읽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 상징과 신비와 역설입니다. 신비의 하나님이 나를 보는 것 자체가 사실은 나의 인식의 정도인데 우리는 경전이라고 하는 성경을 통해서 나를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지 않으면 계속 자기의 경험, 자기의 상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인한 오해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용사로 보고 있는데 맨날 자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한테 가서 하나님이 열방의 선지자라고 말씀하셨더니 예레미야가 자기는 어린아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자기인식은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식은 열방의 선지자입니다. 용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을 깨는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이 반복되면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질서를 주신 것입니다. 3만 명과 300명이 싸우면 3만 명이 이기는 것이 자연인데 기드온은 기적을 보여줘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300명으로도 이길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청계산 이 서울의 영계가 열리는 하늘을 경험해야 된다고 하는 말은 거기에 가야지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야 합니다. 서대문에서도 구로동에서도 상도동에서도 살아야 되는데 청계산에 가서 살아야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호흡기를 해야만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호흡기를 떼고 내가 평상시에 밥 먹고 놀고 장난치고 무슨 일을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 자연이 하나님입니다. 내 일상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이 진짜입니다. 진리는 평범함 입니다.

유대교라는 말의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을 율법과 동일시해서 믿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규칙과 율례와 법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규칙입니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유대교 안에도 사실은 기독교가 있습니다. 구약 안에 예수로 해석되지 않는 것은 사실은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는 이유는 구약 안에 예수가 있기 때문에 구약을 읽는 것이지 예수가 빠져있는 상태에서 유대교의 구약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카돌릭이라는 말이 사실 자기들이 그 이름을 선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카돌릭이라는 말 자체가 공교회라는 뜻이 있습니다. 교회가 오순절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동방정교회 주교님을 만났는데 자기네들이 정통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네들이 정통이었는데 천 년이 됐을 때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구약의 개념을 말할 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온 것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창세기는 기독교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져 나간 것이 유대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유대교는 소위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영광이 아니라 고난이라고 하는 것, 죽음이라는 것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과 고난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말은 신의 사랑을 의미하는데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죽어줄 수 있다는 의미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전도연에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축복송을 불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가장 불편하고 낯이 뜨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연에 대해서 누구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교회에 온 사람이라는 관심입니다. 유일하게 송강호만 예수의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 자체를 자꾸 종교적이거나 어떤 공간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종교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는 죽음입니다. 기독교는 신앙이고 생명이라면 종교의 틀을 벗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내용이 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이 틀은 최소한의 틀이고 내용을 더 풍성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틀만 더 풍성해지고 내용이 빈약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층적 종교와 표층적 종교라면 표층적 종교는 최소한입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는 더 풍성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이 틀은 최소한의 틀이고 진짜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틀이 있어야 생명이 나옵니다. 사랑하고 결혼하면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이 자녀는 합법적인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틀이 없다면 연애를 해서 아이는 낳았는데 누가 부모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틀이 너무 커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카돌릭 안에 구원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 구원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똑같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유대교인이면서도 기독교인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카돌릭, 동방정교회, 침례교, 장로교 전부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안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와 이슬람과 기독교는 가치가 분명 다릅니다. 진리와 생명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내 것만 이라고 하는 것이 유대교입니다. 혈연에 딱 잡혀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알라와 예수가 있는데 여호와는 유대교의 하나님이고 알라는 이슬람의 하나님이고 예수는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자가 하나님이신데 그것이 우리에게는 예수라는 표현입니다. 여호와는 그저 유일신 하나입니다. 이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혈연에 꽉 잡혀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힘이나 권력들이 영광의 여호와가 와서 자신의 힘과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종으로 오셨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게다가 죽었습니다. 유대교의 여호와는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습니다. 늘 영광의 메시야로 와서 늘 능력의 하나님, 군사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으로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이 고난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영원한 생명을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