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로마서 15:22-29, 시편 65:1-13)

오늘 말씀은 로마서의 결론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 로마서 1장부터 지금까지 로마의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결론이 열매입니다. 신앙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사건이고 말씀은 역사이고 말씀은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아주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실제적인 것을 얘기하면 혹시라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율법주의로 들을까봐 사도바울은 기쁘게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근거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매를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열매는 결과인데 결과를 이루어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늘 결과를 얘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하는 것도 열매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열매가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열매가 모든 기준입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명령어는 없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무를 바꾸라고 얘기합니다. 또 씨를 바꾸라고 얘기합니다. 씨를 바꾸고 나무를 바꿔야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부터 쭉 씨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그것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종자가 씨가 나무가 자연스럽게 그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되라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씨, 종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개척교회 축하예배를 갔는데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오는 사람 아무나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40년 목회를 하고나니까 씨를 보면 나중에 어떤 열매가 맺힐 것인지가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안 되는 놈은 끝까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나 받지 말고 될 만한 사람만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다가 근심하고 갔습니다. 저는 그 말씀의 핵심이 가려서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씨가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 씨를 분별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혈과 육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 하나님의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목마른 사슴이 시내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 있는 나무가 살려면 뿌리를 깊이 내려서 물을 찾듯이 물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진리에 대해서 갈급함도 없고 진리에 대해서 목마름도 없고 내가 어떤 것을 갈망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아닌 짐승처럼 늘 비교하고 경쟁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니 오히려 진리를 비진리로 말하면서 비진리가 진리인 것처럼 진리를 누르고 살아가는 인생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계속 했던 얘기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고 마지막 열매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를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나님이 골치 아프게 사람을 만드셨을까?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잘 먹고 잘 사실 수 있으실 텐데……세 분이서도 충분히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을 텐데…… 모여서 늘 잔치분위기로 사실 수 있으실 텐데…… 왜 굳이 말도 안 듣는 사람을 만드셔서 골치 아픈 이 역사를 시작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자식을 낳아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데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냥 밉지만은 않은 것이 자식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존재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고 하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가 한 몸이 되는 신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이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나는 내 거룩함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행위나 그 어떤 것으로도 내가 창조주 앞에 설 수 없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존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의 경험이, 이 비밀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누가 뭐라고 해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있는데 주제가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세상과 구별되어서 이미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에이, 무슨 하나님의 나라야.’ 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맨날 싸우고 맨날 미워하고 밥이 탔네 안 탔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나라야.‘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보면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입니다. 로마서로 얘기하면 믿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나와 하나님이 단일을 이루고 있는 그 신비한 체험, 남에게 말해줄 수 없는 하나님과 내가 단 둘이서 사랑하는 그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그런 모임이 교회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환희와 아름다움과 풍성함과 내가 계속 생명력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힘을 우리 가운데 이미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의 경험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증언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하나님의 경험을 하고 우리끼리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을 이길만한 비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끼리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증인의 삶으로 살아가야 되는데 그렇게 살려고 하니까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이상하다고 아닌 것 같고 합니다. 

악한 영들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악한 영들이 대적한 것에 대해서 처벌하려고하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폭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약속이 되어서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사단이, 거룩하지 않은 영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증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를 증인으로 세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단도 똑같습니다. 사단이 옳다고 하는 사람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누가 옳았는지를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몸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고 하는 것을 몸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가 증인의 삶으로 증언할 수 있고 그 증언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은 두 가지 자기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입니다. 증인의 삶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 육체에 남은 고난을 내가 뒤집어쓰고 살겠노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도바울이었습니다. 땅 끝이 어떤 사람은 북한이라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중국이라고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다시 돌아가는 예루살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땅 끝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서쪽 끝에 위치한 서바나(spain)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땅 끝, 서바나를 품고 있었습니다. 서바나가 지금의 포루투갈과 스페인지역입니다. 오늘 날의 포르투칼의 로카곶이라는 곳에 십자가 탑이 있는데 유럽반도의 최남서쪽 위도와 경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땅 끝에 가야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바나에 가기 위해서는 로마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뿐만 아니라 사명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함께 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쓴 목적입니다. 사도바울은 서바나에 가기 위해서 로마교회에 편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이 사도바울을 도와주는 것이고 사도바울과 같이 서바나로 가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못 갔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 보니까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로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28절)’ 열매를 확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26절에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26절)’ 

지금 예루살렘 교회가 가뭄이 들고 그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지금의 그리스지역에 있는 교회성도들입니다.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베뢰아 이런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헌금을 받아서, 연보를 받아서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을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고 나면 사도바울도 그들에게 가서 로마교회도 연보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서바나로 갈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이 열매라는 말씀은 1장 13절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15장에서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길이 막혔도다(1:13절)’ 

열매는 중화된 언어입니다. ‘돈 내라.’고 직접 얘기하기가 그러니까 돈이라고 하는 연보를 열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그들이 어렵고 힘든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헌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15:27절)’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1장부터 계속 한 이야기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셨습니다. 자녀일 뿐만 아니라 후사로 만드셨습니다. 후사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동역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있으면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육신의 것으로 섬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말씀에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로 얘기하면 믿음은 행함이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신령한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사도바울이 계속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도 주님께 받았다고 생각하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것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육신의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섬기는 열매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오직 성령의 열매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쫓아가면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신령한 것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신령한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을 통해서 반드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는 이 아홉 가지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자기의 성품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었다면 성품이 좋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으되 성질은 변하지 않더라가 되면 안 됩니다. 하도 안 변하니까 그것이 자연이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확 바뀌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예수 믿으면 성격 좋아져야 합니다. 성질도 안변하고 아무것도 안 변하면서 매일 예수 믿는다고 합니다. 신령한 것을 받았는데 육신으로 나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 사람들이 교회가 어려울 때는 헌금 설교도 좀 하시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헌금을 얘기하는 순간부터 이미 율법주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신령한 것에 대해서 경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령한 것을 경험해야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 헌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맨날 보이는 것만 얘기합니다. 우리가 이 로마교회처럼 신령한 것을 받았으면 육신의 것으로 나누고 섬길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육신의 것은 하나님 앞에 신령한 것을 받아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안 받고 주려면 죽을 맛입니다. 

열매의 신앙이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믿음이 시편 65편에서 열매 맺는 신앙의 비밀을 얘기합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편 65:2)’ 

기도는 신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가 주께 나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육체로 섬겨주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시편 65편을 쭉 읽어보면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사람이 한 것이 없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고 모든 육체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지만 육체의 모든 결과는 모든 열매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 의, 권능, 즐거움, 곡식을 주심, 노래하는 것,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신령한 것을 주신 것도 있지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모든 것도 주님이 주셨습니다. 내가 헌금할 만한 것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 65편이 가지고 있는 구제적이고 실제적인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육체적인 것은 내가 이루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로마서의 주제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의 눈이 있느냐 입니다. 시편 기자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면 아름다움도 의도 권능도 즐거움도 곡식을 주심도 노래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셨군요 라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안에서 믿음의 눈이 떠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믿음의 눈을 뜨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는 줄 것이 없습니다. 나눌 것이 없습니다. 섬길 것이 없습니다. 집 사야 되고 자동차 사야 되고 받아도 받아도 한이 없는 늪과 같이 우리는 늘 무엇인가 계속해서 내 것을 채울 수밖에 없는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삶 밖에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내가 먹고 살고 다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마음의 염려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아버지를 의지하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위탁하는 믿음의 눈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살면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열매를 가지고 섬기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저희 교인 중에 한 사람이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볼 때 마다 제가 밥을 샀습니다. 그런데 3천만 원을 사기 당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부자였습니다. 저는 사기당할 3천만 원도 없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그 돈이 어디에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안 먹고 안 입고 모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불행해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부터는 돈 모으지 말고 한 달에 한 번씩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외식도 하고 또 정말 고마운 사람들한테 밥 좀 사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라고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 3천만 원 모아서 결국은 한 방에 없앨 것을 왜 그렇게 없다고 하면서 살았는지 답답했습니다. 

믿음의 눈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내가 내 삶에 대해서 해석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가난했습니다. 교회가 지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삶이 노예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도바울이 돈 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것을 보고 믿음의 해석을 하고나니까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명의 길을 갈 때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맨날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나누고 베풀고 섬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3년 째 공부하고 있는데 결론이 제발 없는 것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육신의 것을 드릴 수 있는 그 믿음이 우리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매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데 나를 통해 보이셔야 합니다. 그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데 ‘저 분을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아.’ ‘저 사람 믿는 것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아.’라고 하는 사단의 증인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매의 신앙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실재를 노래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무엇인가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편 기자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이룬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실재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실제로 오셔서 실재의 노래를 하셔야 합니다. 

열매의 신앙은 사람들에게 확증합니다.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롬 15:28)’ 

확증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우리 가운데 우리의 몸 가운데 있다고 하는 확증, 증인의 삶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사도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서 말합니다.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그것을 위해서 로마교회가 함께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맞다고 얘기합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은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땅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는 하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이지만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있고 
보이는 하나님으로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보이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 안에서 
함께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내 몸이 주님의 흔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몸이 주님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되기를 원합니다. 

2014. 8. 24

You may also lik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