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설교) 생각하여 보라 (욥기 4:1-11, 요한복음 9:1-12절)

본문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욥을 공격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욥기는 욥의 세 친구와 유력자라고 얘기하고 있는 또 다른 권위자가 욥을 계속 공격하고 말로써 그가 의인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내용입니다.

욥이 첫 번째 받았던 공격은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는 관점에서 욥이 왜 고난 가운데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과응보나 자업자득이라는 관점을 뛰어넘지 않으면 어쩌면 우리는 욥이라고 하는 사람을 용납할 수 없고 또한 내가 믿고 있는 예수를 진정한 구원자로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과응보 또는 자업자득, 자기가 한 행위대로 반드시 보상이든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종교생활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가 정성입니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제사를 지낼 때 재물에 누가 먼저 손을 대면 절대로 안됐습니다. 제 아버님의 평생소원이 손자를 낳는 것이었는데 큰형님이 교회를 다니시고 나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예쁜 손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제사 음식에 손을 대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그 재물을 조상님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은 정성을 들여서 무엇인가 해야지만 정성을 받은 존재가 마음이 흡족해서 기도를 들어준다는 것이 종교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하나님한테도 정성을 들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헌금을 드릴 때도 그냥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주 빳빳한 현금을 은행에서 찾아서 헌금으로 드리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뭔가 정성을 드리고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믿는 신이 그것에 대해서 흡족해 한다고 하는 것이 인과응보나 자업자득을 확대한 생각이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욥이 주인공입니다. 욥이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욥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세움을 받을 것이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친구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고 욥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런 고난 가운데 있는지를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를 통해서 욥을 공격하는 핵심의 말이 4장 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

죄 없이 망한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망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직한 자는 끊어지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큰 교회의 장로님이 교회를 나오셨기에 왜 나오셨느냐고 물었더니 사업에 망하고 나니까 자기가 장로라고 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가 없다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드린 사람들은 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망한 자이기 때문에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다닐 수가 없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결과를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흥하고 그 사람이 건강하고 그 사람이 잘 나가고 있으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병이 들고 망하고 잘못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분명하게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겪고 있는 고난은 경험하고 있는 고통은 죄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이고 자업자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친구는 당연하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당연한 말을 종교성을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데마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는 그냥 친구가 아닐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기 때문에 그런 친구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의 수준이 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수준이 되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알 수도 있고 또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너무나 신실해서 꼬박꼬박 아주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장 7절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실제의 삶도 어쩌면 똑같이 당연히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당연히 내가 믿는 예수는 그렇게 살았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는 늘 인과응보와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누군가를 정죄하고 나 스스로를 정죄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떠나지 않으면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 시대에 예수가 온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2천 년 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에 십자가 앞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 메시야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얘기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자라면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요즘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다시 이해가 됐습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뜻이 이스라엘입니다. 저는 그 말이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5장 말씀을 다시 읽어보니까 다시 이해가 됐습니다. 하나님이 져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뜻이 하나님을 이겨먹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이 지는 자이고 실패하는 자이고 결국에는 망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져주시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쉬운 것 같습니다. 죽으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을 것이고 고요할 것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다 망한다 실패한다는 이 말은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었다 깨도 받아들이기 힘든 말일 것입니다. 60되신 목사님과 탁구를 치면서도 처음에는 져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치다가 갑자기 ‘오늘은 좀 봐 줄까?’ 라고 한 마디 하시면 승부욕이 올라와서 이겨먹는 것이 저의 모습입니다. 지는 것이 싫고 실패하는 것이 싫고 망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 죽는 것은 쉬운데 지는 것은 싫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싫고 망한 자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이 하나님이 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져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진정한 장자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인생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져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성공의 노래를 불러야지만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어린아이 같이 말하고 어린아이 같이 깨닫고 어린아이 같이 생각했던 것들이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바뀌었다고 말씀합니다.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무엇일까요?

말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밀고자가 말입니다. 말이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말씀이 실재이고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 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본질이고 그것이 드러나고 보여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하려면 깨달아야 하는데 깨닫는다는 말의 뜻은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리적이고 적합하고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한다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돼서 이해한 것을 내가 말로 표현합니다.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하나이지만 생각하는 것,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름을 짓는 능력,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생각이 무너져버렸습니다. 만드는 것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오만과 편견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불완전한 정죄를 통해서 계속 무엇인가 만들어냅니다.

마을에서 회의를 하는데 설명을 몇 번씩 했는데도 절대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점이 아줌마들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말만 열심히 얘기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얘기 듣지 않고 자기를 말하는데 오만과 편견에 잡혀있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이해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얼마나 불쌍한데. 내가 얼마나 거룩한데,’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쌍하다는 말과 깨끗하다는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자기가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인데 그 사건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그 상황 때문에 깨끗함이 무너져서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자기연민 가운데 있고 자기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맹인을 보면서 제자들이 주님께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그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만과 편견입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하는 것입니다. 제 3의 관점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고난을 받고 그가 채찍에 맞음을 당하고 그가 병들고 그가 아파하는 그 모든 것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죄가 없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아픔과 고난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눈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것이 나의 고난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해석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망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오늘 병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릎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고 무슨 죄가 있기에 고난 가운데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아픕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의 고통과 고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남들은 행복해 보이지만 아닙니다.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숙제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자리가 있습니다. 집집마다 다 비밀 한 가지씩 있습니다. 어떤 집안은 왕족의 집안입니다. 부인이 두세 명씩 있습니다. 또 어떤 집은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들이 다 깨져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멀쩡한 집안처럼 보입니다. 집집마다 코끼리 한 마리씩 다 있습니다.

주님이 맹인을 고치시려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실로암으로 보내십니다. 성경은 실로암을 설명하는데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죄의 문제를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슬픔 가운데서 다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믿는데 그 사람이 실로암에 보내지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은 그냥 왔다가 그냥 지나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보냄을 받았다는 자기의 확신, 소명, 의미, 목적, 삶의 방향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죄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고 있는 또 다른 차원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로암으로 보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이라는 사람은 자기 방향을 모릅니다. 실로암을 모릅니다. 그런데 어렴풋이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고 정직한 자였습니다. 확실히는 모르고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답을 아는 자가 아니라 의문 가운데 질문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내가 부르심을 받고 소명을 받을 수 있었는데 왜 고통 가운데 고난 가운데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습니다. 가롯유다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목을 메어서 죄값을 치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롯유다가 아닌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고 여전히 가늘고 길게 살고 있는 베드로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리가 이상하고 나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막연한 믿음, 막연한 소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말한 ‘생각하여보라.’ 라는 말에서 생각이 무엇일까요? 이 생각은 염려와 두려움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상처와 외로움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탐심과 그리움의 생각입니다. 이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어떤 상황이 올 때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하려고 어떤 것을 보충해서 맥락과 맥락을 연결하려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fact가 있어도 그 fact를 연결해줄 자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fact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생각을 보는데 염려와 두려움의 생각으로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오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에 잡혀있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한다할지라도 상처로 외로움으로 다시 해석하니까 fact와 fact를 연결하는 상처와 외로움 때문에 아니라고, 죄가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욕적으로 무엇인가 하려는 탐심과 계속 갈망하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깨끗해지려고 거룩해지려고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화가 나는 것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건망지고 무례하다고 얘기를 하셔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더 건방지고 무례한 목사님한테 전화를 해서 상담을 했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받아들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저를 건무선생으로 불러달라고 얘기했습니다.

사단은 염려와 두려움, 상처와 외로움, 탐심과 그리움을 계속 찌릅니다. 찌르면서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내가 얼마나 깨끗하고 내가 얼마나 거룩하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슬프고 그러니까 오만하고 교만합니다.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어린아이 같이 말하고 어린 아이 같이 깨닫고 어린 아이 같이 생각했던 것을 장성한 분량으로 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바스의 생각의 결론이 4장 6절입니다.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6절)’

경외하지 않았고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각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은 내어주고 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망한 자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절대로 성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실패한 자였고 망한 자였고 지는 자였습니다. 예수의 삶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없고 나를 깊이 생각하면 다 염려와 두려움이고 상처와 외로움이고 탐심과 그리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바깥에 도와주는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 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 내 안에 계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팔복을 얘기하시는데 팔복을 받는 사람이 온갖 병에 걸린 무리들입니다. 우리는 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병에 걸리든 고난 가운데 있든 어떤 상황 가운데 있든 하나님 앞에 복이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어주고 꾸어주고 베풀고 섬길 때 마다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복이 넘치고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비밀을 간직하고 사시기를 생각하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 7:14)
기쁜 날에는 즐거워하는데 힘들고 어려울 때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곤고하다는 것은 지금 내 인생의 바닥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짜 바닥에서는 나도 없고 내 자랑도 없고 인간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본질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내를 찾듯이 내 인생의 갈급함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우물을 찾듯이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자기 인생의 곤고한 날을 생각했다면 욥을 찾아와서 그렇게 함부로 일방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울어주고 곁에서 돌봐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거꾸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을 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생각해 보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고3 때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밤 11시까지 생활했는데 공부는 많이 안했지만 밤에 집에 오면서 하늘에 있는 별을 봤습니다. 우주를 봤습니다. 내가 있는 이 세계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사방이 다 막혀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사방에 우겨쌈이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또 다른 소망을 봅니다.

위에 것을 보라는 것은 조금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치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해보라는 것입니다. 다 가난합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사람들 안에 부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환타지 리얼리즘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리얼리즘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환타지가 있습니다. 또 다른 소망이 또 다른 꿈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가 작지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라고 믿고 삽니다. 한국교회를 걱정하고 어떻게 살릴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 목회 잘 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환타지는 웃깁니다. 리얼리즘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위에 것을 보기를 위에 것을 생각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세상의 것에 대해서
염려와 두려움에
상처와 외로움에
탐심과 그리움으로 생각하지 말라고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팔로 너를 붙들리라.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른과 같이 생각하라고

생각을 바꾸는 결단의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2015.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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