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설교) 무 덤 (욥기 3:20-26, 골로새서 2:20-23)

오늘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라는 찬양을 했는데 단 한 사람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찬양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에 소리를 빼고 얼굴 표정만 봤다면 장례식장에 온 심각한 사람들 표정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어제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 김정운교수의 <오늘 미래를 만나다> 라는 신년특집프로그램 1,2,3부를 봤습니다. 그 어느 목사님의 설교 보다 아멘이 저절로 나오는 프로였습니다. 그 분 말씀이 재미있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재미’가 저에게 잘 맞는 단어인데 결론은 재미에 의미를 부여해서 오늘을 살라는 것입니다. 내일을, 미래를 사는 우리에게 키워드가 오늘을 사는데 재미있게 그리고 의미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서의 주제입니다. 전도서는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사는데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을 사는 것처럼 즐겁고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준 감정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대해서 공감을 하는데 인류가 재미를 추구하게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먹고 살만하게 된 시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먹고살만하게 되니까 재미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사느냐고 물으면 죽지 못해서 산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재미를 추구하고 살지 못합니다.

영화 <국제시장>을 봤는데 미리 평론을 보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비판을 잘 할 수 있을까? 라고 마음을 먹고 앉아서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 내내 울컥울컥하는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화가 너무 작위적이었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러 다니신 어르신 세대를 그리고 있는데 불사조처럼 죽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인데 그 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울컥했습니다. 아버지 세대는 살려고 살았습니다. 좀 더 인간답게 살려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며 그렇게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세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난해도 라면 2천 원짜리 먹고 나서 5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세대입니다. 아버지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가치가 다른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서 저 어렸을 때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에게는 교회가 너무 재미있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놀이터는 교회였습니다. 집안이 전부 불교였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제가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절이 더 재미있었으면 절에 다녔을지도 모릅니다. 머리 깎고 설법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제 호를 청산으로 지었으니까 청산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절에 가는 것 보다 교회 가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교회는 저에게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예쁜 여자애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청년 목회를 했는데 교회 여자청년들한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취하신다. 그러니까 예쁘게 하고 다녀라 그래야 남자청년들이 교회 많이 온다.’ 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기자생활을 할 때 예수 전도단을 설립하신 로랭커닝햄 목사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예수를 연구만 했지 그렇게 표현하신 목사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를 만났는데 너무 좋다고 너무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무 재미있다고 얘기하셨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제가 만난 첫 번째 예수는 너무 좋았고 신났고 매일 교회에 가는 것이 죽지 못해 끌려간 것이 아니라 정말 기뻐하며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 전도사도 아닌데 수련회를 서너 군데를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재미있다는 곳을 찾아다녔고 새로운 사람들은 보통 수련회비도 공짜였기 때문입니다. 돈도 안 내고 말씀만 외우면 밥도 주고 새로운 사람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줬습니다.

첫 번째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교회에서 낡은 제 신발을 잃어버렸는데 선생님이 새 신발을 사주신 일이었습니다. 공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 다니는 사람조차도 얼굴표정이 죽지 못해서 사는 얼굴이고 ‘기쁘고 기쁘도다.’ 라고 하는 찬양을 부르면서도 전혀 기쁜 얼굴이 아닙니다. 어제 강의 내용 중에 들었던 실험이야기가 있는데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가로저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이 어려운 강의를 알아듣더라는 것입니다. 몸의 언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실제 실험결과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말하는 사람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덤’인데 이미 무덤가에 있는 사람들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원고와는 다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재미있게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재미있게 살려면 다 내려놓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쓰라고 얘기하는데 사실 돈과 시간과 생명은 같은 것입니다. 내가 생명을 시간으로 환산하는 것이고 그 시간의 환산을 또 돈으로 쓰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2천 불을 번다 3천 불을 번다 4천 불을 번다고 말하면 정말 돈 많이 벌어서 좋겠다고 얘기하지 않고 많이 버는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살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굳이 그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 불을 벌려면 내가 시간을 그만큼 투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기자는 아침에 얼굴 한 번 보여 주고 나가서 사우나 가서 쉬다가 취재 하고 기사 쓰고 일을 끝내는데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신문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바쁘게 일을 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 까지 일을 하고 그만큼의 대가를 받습니다. 어디 나가서 먹고 수다 떨고 사우나를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미국의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6시 퇴근 후에는 더 이상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말이 없고 늘 시간이 없습니다. 늘 일을 하면서도 늘 일을 안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가가 어떨지를 염려하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불안하니까 조급하고 조급하니까 어떤 순간에 신뢰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으니까 불의라고 하는 악한 행동을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몸이 따로 놉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저는 가끔 청년들한테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김정운 교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50세에 맞춰있다고 얘기했습니다. 50세 까지 일하고 20년 살고 죽거나 10년 살고 죽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100세 시대입니다. 50세 까지 일을 하고 나서 50년이 남아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똑같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데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사실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진짜 재미있으려면 무엇인가 포기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자극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를 쿡 찔렀을 때 반응하고 살면 매일 세상의 것을 쫓아서 살다보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보면 나를 위해서 살고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국제시장에서 보면 아버지 세대들은 의논하지 않습니다. 몰래 엿듣고 자기가 결정해서 통보하고 희생하며 삽니다. 소통하고 공감하지 않아서 나이가 70넘고 80이 됐는데 가족과는 따로 놉니다. 그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똑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최고라고 내가 믿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진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통하지 않습니다. 소통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면서 평가에 대해 반응하고 살아갑니다.

욥이 지금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죽음 뒤에 안식과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 다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욥은 죽지도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은 다 죽고 재산도 몰살되었고 온몸에는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고 친구들은 와서 기가 막히니까 아무 소리도 못합니다. 그 상황 가운데에서 욥이 진짜 자신도 죽고 싶다고 그런데 죽지 못하겠다고 한 마디 합니다.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22절)’

무덤에서 기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의 차이입니다.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6절)’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죽어도 되는데 그 죽음의 자리에 갔더니 그 안에 또 다른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골로새서 2장 20절에서 23절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20절)’

욥은 지금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음만이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그 곳에 갔더니 또 다른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네오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네오는 new라는 뜻입니다. 네오가 양복 입은 사람들에게 매일 쫓겨 다니며 살다가 총에 맞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의 눈물 때문에 다시 깨어납니다. 그랬더니 양복 입은 사람들이 가짜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가상의 세계의 부호였습니다. 자기만큼 빠르다고 생각했던 총알이 단지 하나의 부호였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다시 이해하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진짜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생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만 생명이 생명다워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시 이야기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 이 말을 골로새서 2장에서는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에서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삶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습니다. 욥과 같은 그리스도의 사람과 미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미친 사람의 공통점이 웃는다는 것입니다. 이 웃음이, 기쁨이 재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재미있습니다. 내가 생고생을 하고 있는데 보람이 있습니다. 죽음 뒤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이 영원한 안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삶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욥이 4장 이후 42장까지 가는 고난을 무덤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풀리는 것이 아니고 해결된 것이 아니고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 평안도 없고 안식도 없고 기쁨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진짜 죽음을 통과하고 나니까 참된 기쁨과 참된 즐거움을 알게 됩니다.

제가 가끔 하는 말이 기독교인들처럼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쉬는 날 와서 앉아서 질문도 못 하고 30분 동안 설교를 들어야 하고 갑자기 돈도 내라고 하고 또 어떤 교회에 가면 돈 덜 냈다고 혼도 냅니다. 기독교인만큼 비참한 삶이 없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이라고 하는 육신의 세계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삶으로부터 죽어야 합니다. 가장 인간적인 욕구와 욕망으로부터 죽었다는 것입니다. 욥기 3장 전체를 보면 ‘나’라는 표현이 20번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복을 받았고 그래서 사람들한테 증거가 되고 내가 성공해야지 다른 사람들한테 잘 보여야지 내가 예수를 잘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어야만 돼 그래서 영광의 십자가가 있어야 되고 늘 승리의 십자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죽어야 합니다. 무덤에서 죽지 않으면 내가 그 죽음의 자리에 가지 않으면 인생은 슬픔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고 있는 한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 무덤의 자리 반응하지 않는 자리에 가야하는데 그것이 내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100세 까지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생각하는 것이 50년 동안 뭐 하고 살지? 뭐 해서 먹고 살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노숙자로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여러분들에게 제 노후를 책임지시라고 말해야 합니다. 요즘은 교회를 은퇴하면서 팔아먹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후임자한테 교인 한 사람당 얼마씩 계산해서 3억을 달라고 5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300명 되는 교회에 들어가시는 목사님이 3억을 주고 들어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어떤 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싸게 가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후가 걱정이니까 그렇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억을 주신 목사님은 다른 사람한테 5억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돈이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조차도 매일 돈에 반응합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5억 내세요.’ 라고 하면 ‘네’하고 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교회입니다. 저는 쫀쫀하게 ‘여러분 헌금 합시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 죽은 사람들인데 세상의 어떤 것을 다 버린 사람들인데……우리는 죽고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안 죽으면 벌떡 벌떡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사람들은 차력사가 됩니다. 몸 위에 벽돌을 올려놓는데 100개 정도 올려놓을 때 까지는 버티다가 101개 올려놓는 순간 죽을 것 같다고 벌떡 일어납니다. 안 죽은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23절)’

모양은 있는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불쑥불쑥 일어납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알아주지 않아?’ 라고 합니다. 이것은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초등학문에서 죽지 않고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21절)’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산 사람은 초등학문을 붙잡고 싶습니다. 내가 권력을 잡고 싶고 영광을 잡고 싶고 내가 승리를 잡고 싶고 다른 사람 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권력의 맛을 보고 싶어서 거기에 손을 대고 connection 하고 있으면 한 자리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지도 않고 맛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지켜냅니까? 불쑥불쑥 내가 살아있으면 꿈틀꿈틀 살아서 어떻게든 한 자리 하고 싶은데 어떻게 지켜낼 수 겠습니까?

반응하지 않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욥은 그것을 무덤에서 안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도 부도 명예도 다 아니라는 것을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유언할 때 돈 많이 벌었으면 좋았을 걸, 하지 않고 서울대 갈 걸 하는 사람도 없고 얼굴이 좀 더 예뻤으면 좋았을 걸, 하는 사람 없습니다. 미안하다고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다 관계적인 가장 성품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세상의 평가에 물들어서 내가 없습니다. 죽으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이 내가 진짜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를 찾는다고 했을 때의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준 나입니다. 제가 요즘 동네사람들하고 자주 긴 시간 동안 회의를 하는데 그 사람들하고 매일 싸웁니다. 그랬더니 같이 일하는 국장이 지금까지 동네에서 자기를 늑대라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사람들이 목사인 저의 본질이 드러난 것을 보게 됐다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것입니다. 용납할 수 없으면 끝 까지 싸우기 때문입니다. 저도 정말 목사님은 좋은 분이시라고 너그러운 분이시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준 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을 우리는 무덤에서 아는 것입니다. 진짜 슬퍼해야하는 사람은 무덤에서도 모르는 사람, 죽음의 자리에 가서도 못 찾는 사람입니다. 내가 없어지니까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구조가 있고 세상을 움직이는 시스템인 세속의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라고 하는 구조는 사랑하셨지만 세속의 정신과는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미 없는 초등학문에 붙잡혀서 거기서 살려고 합니다. 거기에 반응하고 살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무덤에서 압니다.

골로새서에 있는 말씀에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것을 영어로 보니까 handle, taste, touch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인데 십자가가 죽음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늘 불안과 불신과 불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어떤 사람은 또 다른 즐거움의 세계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영원입니다. 잘 돌아가시기를, 잘 죽기를 바랍니다. 아니 2천 년 전에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죽음을 진짜로 경험한 사람만이 진짜 즐거움과 진짜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부와 기쁨과 즐거움은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과 상관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고 붙잡고 그것을 터치하고 살아가는 그래서 새로운 생명을 묵상하고 살아가는 우리 하나교회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의 기도>

여전히 내가 초등학문이라고 하는
세상의 평가나 세상의 어떤 것에 메어있습니까?
그 곳에는 평안도 없고 안식도 없고 휴식도 없고
불안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선포하고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사람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말로 만들어진 나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존재로 나를 부르셨고
세속의 정신에 반응하고 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나서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인생 가운데서도
진정한 즐거움과 진정한 기쁨을
맛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그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
그 무덤가에서 모든 사람이 슬피 울고 있지만
나는 그 안에 또 다른 기쁨과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2015.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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